소설리스트

〈 69화 〉69 Because Poe wrote on(3) (69/89)



〈 69화 〉69 Because Poe wrote on(3)

시야가 흔들린다.

아찔해지는 의식을 겨우 붙잡았다.

"우윽……."

목구멍 너머로 욕지기가 올라온다. 진하게 느껴지는 시큼한 맛에 콜린은 입에 든 것을 죄다바닥에 토해내었다.

그러나 지면에 흩뿌려지는 것은 위액이 조금 뒤섞인 침 외에는 없었다.

"콜린, 괜찮아?!"

염려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이어 시야 끝에서 금발이 나부꼈다.

"…괜찮아요. 레니."

욱신거리는 머리를 살짝 감싸쥐고서 콜린은 고개를들었다.

"자, 마시세요."
"고마워요."

뒤이어 마치가 물이 가득 든 잔을 내민다.

그것을 받아들고 조금 들이킨 뒤 콜린은 잔에 담긴 물을 바라보았다.

출렁이던 물결이 잦아들자 이내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몹시 창백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조롱하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충격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콜린은 조금 전 한 차례 죽음을 맞이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공간에서의 죽음은 결코 진정한 죽음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의 정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기에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본래의 콜린이라면 괜찮았을 거란 것도 아니다. 약초 캐기를 부업으로 삼던 소시민 소년의 정신이 견딜 만한 레벨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물은 어디서 났어요?"

이내 콜린은  가지 의문을 품었다.

게임이 시작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마치가 탈락한 건 더욱 최근의 일이었다.

이렇게 다음 탈락자를 위해 미리 준비해두기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말이다.

"한나가 미리 준비해뒀어요."

이내 마치는 싱긋 웃으며 어깨 뒤편을 향해 손짓했다. 그 자리에는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서있었다.

"한나 누나."

콜린은 나지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콜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느꼈던 의문을 한나에게 건네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조금  콜린은 아공간에서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지를 말이다.

레니와 마치가 멀쩡해 보이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이전지니고 있던 정치적 입장을 생각해보면 전장에 나선 일이 분명 꽤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여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고, 죽음을 각오했던 적도 아마 있었으리라.

콜린하고는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한나는 멀쩡했는가.

이전 백설과의 게임에서 그녀는 난쟁이에게 살해당했다.

꼴사납게 헛구역질을 해놓고 무슨 오만함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콜린은 스스로가 꽤 정신력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조차 이 정도로 충격을 받았는데, 어떻게 한나는 백설과의 게임이끝난 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걸까.

적어도 콜린이 파악하고 있던 한나는 죽음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멘탈이 단단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죽음에 대한 한나의 관점이 어딘가 왜곡되어 있다고밖엔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단 말인가. 단순히 짐승을 사냥한다는 것만으로 설명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짐작 가는 일이라면 있지만.'

기억 속에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콜린의 양부모님. 한나의 친부모이기도  그들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어째서 콜린이 한나와 단둘이 지내고 있고, 도망자들의 길잡이라는 체셔의 영지에서 살고 있는지.

"……."

한나는 입을 다문  콜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턱. 잠깐의 침묵 후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콜린의 머리에 마치의 손이 올라온다.

그리고는 좌우로 살짝 흔들듯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전에 제가 말했었죠? 모자 장수가 괴물을 풀었다고."
"…아, 설마."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서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고있으니 마치가 말을 이었다.

이어서 콜린은 그녀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짐작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체셔의 땅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그때 가족과 지낼 곳을 잃은 사람들이에요."

마치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한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떨쳐냈으니까."

그리 말하는 한나의 모습은 조금 슬퍼보였다.

재앙에 휩쓸려 부모를 잃었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콜린이야 어렸던 탓인지 부모님의 모습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보다 나이가 많았을 한나의 기억 속에는 그때의 참상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으리라.

콜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나를 끌어안고 어깨를 살짝 토닥여주었다.

"괜찮다니까."

조금 부루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내버려둬."
"…아직 너는 남아있으니까. 정말로 괜찮아."

이렇게 말하면서도 콜린을 밀어낼 생각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고 그의 온기를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끝난 거지?"

잠시 남매의 포옹을 바라보고 있다가 레니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네. 이제 시간이 될 때까지만 기다리면 끝이에요."

막 술래를 가둬놓고 오는 길이었다. 이걸로 승리는 확정인 셈이다.

"다만…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

하지만 레니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더니 한숨을 쉬었다.

"정확하게 어디부터가 계획이었고, 언제부터 준비를 한 거야?"
"그건 저도 조금 궁금한걸요."
"아, 죄다 설명드리진 않았었죠."

레니가 의문을 품고 마치도 거기에 찬동했다.

"그럼 복기를 해볼까요.다만, 조금 걸릴 테니 앉아서 이야기하죠."

콜린은 그녀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근처에 있던 정자를 가리켰다.


×


날은 따스했지만 그늘 아래서 부러오는 바람은 선선했다.

그 기분 좋은 미묘함을 느끼며 콜린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잠시 숨을 들이켰다가 입을 연다.

"우선, 시작은 역시 모자 장수와 마주친 순간부터였어요."

당연하지만 그것보다 더 이전일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은 모자 장수가 제안한 게임에 그들이 동의하면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그러니 실질적으로 계획을 수립한 건 그 이후가 되겠네요."

콜린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모자 장수와 만난 당일의 일이었다.

"저랑 레니, 한나 누나. 이렇게 셋이 카지노에 갔죠. 그리고 카지노에 걸려있는 계약을 알게 된 거에요."
"카지노의 비품을 바깥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거였지?"
"관리인인 유디트를 유일하게 제외하고."

한나가 맞장구를 치듯 끼어들었고, 콜린은 거기에 추가로 첨언해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시점을 돌려봅시다. 우리는 시간을 멈추는 모자 장수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글… 쎄?"
"그걸 알았으면 제가 이미 그 자식을 때려눕혔죠."

레니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팔짱을 낀 마치도 한 마디 거들었다.

"시간 정지의 약점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빛과 호흡도 정지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거 말고 조금 더 근본적으로 말이에요."

그 부분은 검증이 필요했기에 따로 실험을 했을 뿐이다.

"힌트를 드릴까요? 시간 정지는 순간이동과 어떻게 다르죠?"
"…아! 그렇군요!"

그제야 마치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마주쳤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아무리 시간을 멈춰도 소용이 없겠네요.  권능은 그저 남들보다  많이, 더 빨리 움직이게 해주는 거니까요."
"정답이에요."

만약 팔다리가 꽁꽁 묶여있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순간이동 같은 능력이 있다면 그는 별 문제없이 구속을 벗어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 정지라면?

시간이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할 수 없는 행위는 대부분 시간을 멈추고도   없다.

"즉, 술래잡기라는 게임을 유도하고 카지노에 가둔다. 그게 목적이었구나?"
"일단은 그렇게되겠네요."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지노에 가둘  있다고는 제대로 검증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좀 많이 위험한 다리를 건넌 게 아닌가요?"

그러나 마치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봐온 콜린은 어느 정도 확률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곤 해도 이만큼이나 불확실한 요소에 죄다 올인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엥?저는 검증한 적 없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요?"

그리고 콜린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마치 씨는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다가 자기 설명이 부족했음을깨달았는지 미간을 찌푸린다.

"다들 어제 플레이는 기억하죠?"
"플레이… 어, 음… 응……."

이어진 콜린의 말에 레니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엄청 최고였죠."
"뭐… 그건 확실히."

마치는 싱긋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고, 한나도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었지만 수긍했다.

"딱히 감상을 물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럼 그때 플레이 인원은?"
"콜린, 너를 포함해서 아홉 명. 맞지?"
"구성원은?"
"너하고 나. 레니, 마치 씨, 난쟁이 다섯 명."

한나는 주저없이 답을 내놓았다. 실상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일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머지 난쟁이 세 명은?"
"마치 씨가  백토라는 녀석이랑 싸우는 과정에서 죽은 거 아냐?"
"아뇨. 그때 죽은 건 두 명이었어요."

레니가 그것 외에 뭐가 있겠냐 싶은 표정으로 말하자 마치가 반박했다.

백토에게 살해당한 난쟁이의 수는 둘뿐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네요. 그때 소환 가능한 건 분명히 다섯 명뿐이었어요.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언제 죽었던 거죠?"

그리고는 귀를 쫑긋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말했잖아요. 카지노의 계약을 검증했다고."

콜린이 유디트에게서 계약의 존재를 전해들은 순간 떠올린 것은  가지였다.

하나,  계약은 아공간에서도 적용되는가?

둘, 파손된 비품도 계약의 대상이 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파손까지 적용되는가?

모자 장수를 사냥하는  이 계약을 이용하려면,우선 그를 어떻게든 카지노로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물론 미끼가 필요할 테고, 미끼가 죽어도 상관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편해진다.

"첫째의문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계약과 권능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이걸 검증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난쟁이를 소환하여 카지노의 칩을 들려준 뒤 송환을 시도해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콜린의 권능으로 난쟁이를 송환할 수 없다면, 제후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아공간에서도 카지노의 계약이 적용된다고 추정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실험 결과 난쟁이는 송환되지않았다.

"물론 완전히 확실한 건 아니었기에 이번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아공간의 카지노로 달려가서 실험을 해봤죠."

이 다음으로해본 실험은 파손된 물건에도 효과가 적용되느냐는 것이었다.

누구도 카지노의 비품을 꺼낼 수 없으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계약에는 유디트라는 예외가 존재했다.

하지만 만약 물건을 부수면 누구라도밖으로 들고갈 수 있다 가정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카지노의 비품을 바깥에 끄집어낼 일이 무언가를 버릴  이외에 더 있겠는가?

그런 경우라면 물품을 파손시킨 다음에 직원들이 옮기도록 시키면  일이다.

그리고 애초에 카드 같은 걸 위조하지 말라고 만들어놓은 계약인데 카드를 찢는 것만으로 꺼낼 수 있게 된다면 계약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파손된 물품에도 계약이 적용된다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 파손해도 괜찮냐는 것이었다.

"다만 이걸 실험해보기 위해선 카지노의 물건을 부술 필요가 있었죠."

콜린에게 있어 그것은 꽤나 큰 난관이었다.

당연하지만 이걸 이용해 함정을 계획하고 있는 입장인데 대놓고 물건을 부숴서 상대에게 정보를 줄 수는 없었다.

"뭐, 사실 칩을 한 장 정도 빼돌리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죠. 주머니 안에 넣어두면 제 칩이 원래 얼마가 있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니까요."
"어? 잠깐만. 그런데……."
"네. 하필 제대로 뭔가 하기도 전에 유디트가 개인실로 불러버린 거예요."

정말로 끔찍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오는 타이밍이었다.

그녀와 했던 게임의 내용은 더욱 끔찍했다.

유디트는 콜린이 가지고 있는칩과 같은 수의 칩을 준비해서 포커를 쳤다.

요컨대 그녀는 콜린의 본래 칩 개수, 그리고 그녀와의 게임이 끝났을 때의 칩 개수를 파악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중 가서 칩 하나가 비는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의 만약을 가정한다면 조금이라도 상대의 의심을  행위는 피하고 싶었다.

"때마침 레니가 칩을 탕진하고 온 게 다행이었죠. 기억하시죠? 제가 반쯤 억지로 칩을 떠넘겼던 거."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대체 왜 그러나 싶긴 했어."

그런 게임 도중에 레니가 와준 것은 아주 천운이었다.

콜린은 레니에게 칩을 한움큼 넘겨주고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하나를 빼돌린다고 한들 알아차릴 방법은 없었다.

유디트는 그저 레니에게 실제로 준 것보다 한 개 더 많은 칩을 넘겨줬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제가 카지노를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온 것도 기억하시죠?"

이윽고 레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소에서 콜린은 거의 가루가 된 칩에도 권능이 적용되며, 이는 체내에 있을 때도 효과가 있다는 걸 검증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체내에 칩의 조각이 들어있는 상태로는 난쟁이를 송환시킬 수도 없다는 점이었죠."
"그때 죽은 거군요?"

실험이 끝났다면 증거를 인멸해야만 했다. 세벨. 이번에 고생해준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며 콜린은 그녀의 말에 수긍해주었다.

덧붙여 환금을 안 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장부에 기록이 남아버리니까.

"이제 함정의 재료는구했으니, 어떻게 환경을 조성할 것인지를 생각해봐야죠.  부분은 마치 씨가 고생해준 덕에 편하게 진행했어요."

언제, 어디서, 누가. 게임을 휘어잡기 위해 필요한 카드들이었다.

"우선 마치 씨가 이전에 말해준 이야기에서 판단한 건데요. 모자 장수는 꽤나 과시적인 성향이 있어요."

여기에는 그와의  대면을예로 들 수 있다.

그는 마지막에 방을 떠나며 굳이 자신의 권능을 과시했다.

당시 난쟁이들에게 시간 정지의 실험을 맡겨놓을 수 있었던 것도, 회의가 끝나기 전까지 모자 장수가 반드시 권능을 한 번은 사용하리라 확신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저희가 '언제'와 '어디서'를 지정하고 나면 그걸 이용해서 저희를 엿먹일 뻔했죠."

'그냥 시간을 짧게 잡을 걸' 하는 후회를 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쪽에 대해 우위에  상태로 사냥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도 분명 있었으리라.

남의 마음을 유도하고 조작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만큼 조종하기 쉬운 존재는 없었다.

거기까지 말하고서 콜린은 싱긋 웃었다.

그날 인디언 포커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적어도 심리전의 영역에서 타인에게 패배할 생각 따위는 없던 그였다.

"함정을 만들었고, 함정에 빠뜨리기만 하면 승리하는 환경은 만들었어요. 그럼 이제 마지막 문제는 어떻게 끌어들일……."

그러나  순간 느닷없이 들려온 비명소리에 그의말은 묻히고 말았다.

"뭐, 뭐야?!"

레니는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뽑아들었다.

마치역시 배트를 꽉 쥐더니 콜린과 한나를  뒤에 감추었다.

그리고 눈을  차례 감았다 다시 떴을 때, 그들은 시커멓게 물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니, 명백히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끔찍한 악취가 코끝을 찔러왔다.

"아… 으……."
"…누나?"

털썩. 갑자기 한나가 자리에 주저앉은 탓에 콜린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도망… 콜린. 도망쳐.도망쳐야 해……."

어째선지 그녀의 얼굴은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콜린은 저 너머에 있는 커다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거리와 크기를 감안하면 대략 10미터 정도는되는 생물일까.

시커먼 깃털에 온몸이 뒤덮여 있는 새의 형태였지만, 날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흉흉한 발톱이 달린 팔이 두 쌍 매달려 있었다.

그 존재는 기이하게 자란 덩굴이 휘감긴 몸을 좌우로 비틀더니 듣는 것만으로도 메스꺼움이 올라오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누나.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거예요?"
"네. 그때 제가 말했던 그 녀석이에요. 대체  지금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콜린은 신체를 짓누르는 무게를 겨우 떨쳐내고 입을 열었다.

마치 헤어가 수도에서 도망치게 된 모든 일의 계기. 그녀의 동생인 마틸다와 하얀 여왕이 끝없는 잠에 빠지게 된 원흉. 아마도 한나와 콜린 남매가 더 이상 부모를 만날  없게 된 사건의 범인.

"…페스트."

마치 헤어는 그 괴물의 이름을 조용히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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