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68 Because Poe wrote on(2) (68/89)



〈 68화 〉68 Because Poe wrote on(2)

압도적이라 함은 무엇인가?

양민학살이라는 표현이 있다.

상대하는 서로에게 있어 실력의 격차가 너무 큰 탓에 안쪽이 일방적으로 짓밟힐 때 이러한 표현을 쓰곤 한다.

"콜… 린……."

만약에 레니가 바닥에 널브러져 나지막히 이름을 부른 그 소년이 이 상황을 보았더라면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간단히는 상상할 수 없을 장면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레니 테세오. 그 테세우스 가의 딸이 목에 검이 꿰뚫리어 죽어가고 있었다.

한 차례도 저항하지 못했다.

시간을 멈춘다고 하는 권능은 그 정도로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

결국 숨이 끊어져 사라져가는 시체를 모자 장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붕 아래에서 거리를 내려다본다.

조금 전 모자 장수는 저쪽의 한 가게로 누군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백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만 해도 그의 부하였던 여자.

그러나 무능한 그녀는 부점 길드에 패배하고 말았다.

지금의  번거로운 상황의 최대 원흉이기도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도 않았다.

백설은 간사하게도 냉큼 손을 바꿔잡았다.

물론 실제로는 정신을 무너뜨리고 굴복시킨 것에 가까웠지만 모자 장수 입장에서 그것을 알 도리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비록 여기 아공간에서는 게임 때문에 그러지 못하겠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최대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하리라.

모자 장수는 시간을 멈추고서 그리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지붕 아래로 내려오며 모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그는 모자에서은빛의 기다란 체인을 꺼내들었다.

백설은 몹시 짜증나는 상대다. 그녀는 칼이나 총탄으로는 죽지 않는 유사 불사신이었다.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독이나 질식, 혹은 그러한 특성을 가진 무언가.

당연하게도모자 장수는 이에 대한 채비를 해뒀고, 그게 바로  체인이었다.

백설이 게임에 참여하기로 한 이상 바보가 아니라면 그녀를 질식시킬 도구를 챙기는  상식적인 행동이었으니말이다.

혹시나하여 예비를 셋이나 준비해뒀다. 어지간해서는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

물론 여차하면 맨손으로 목을 졸라도 상관없긴 하다.

본체의 전투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백설이다. 제아무리 저항한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난쟁이는 조금 위협적이긴 하지만 그녀들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것보다 시간을 멈추는 게 빠를 테니 걱정할 건 없었다. 난쟁이들에게는 불사의 권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말이다.

모자 장수는 유유히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낡아서 그런지 저항감이 조금 느껴졌지만 잠겨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잽싸게 안쪽을 훑어보았다.

가게의 간판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모자 장수는 이내 카운터 근처에 놓인의자에 백설이 앉아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씨익 웃으며 그는 백설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손에 들고있던 체인을 그녀의 목에  바퀴 감아 잡아당겼다.

부드러운 살점에 금속 체인이 파고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다시 시간 정지를 해제하면 갑자기 막혀오는 호흡에 몹시 고통스러워하겠지.

그러나 악의는 없다. 질식이 아니면 그녀를 죽일 방도가 없을 뿐.

…사실 악의는 엄청나게 있었지만, 그런 이유에서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 건 아니었다.

'자, 어디 발버둥 쳐봐라.'

모자 장수는 체인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최대한 힘이 실어지도록 무릎을 백설의 등에 가져다대어 꾸욱 밀었다.

그리고 권능을 해제했다.

다시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큭?!"

하지만 이어서 무언가가 그를 덮쳤다.

알 수 없는 충격, 눈을 찌르는 듯한 섬광, 그리고 피부를 찢는 열기.

그 순간 겨우 다시 시간을 멈출 수 있었던  그저 생존본능이었고, 그야말로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생각이 멈춰버린다.

그러다가 뒤늦게 잠깐 시간 정지가 풀렸던 사이 코에 파고든 냄새를 인식할  있었다.

'화약…!'

대체 어떻게 이런 트랩을 깔았는가? 그 전에 화약은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아니, 해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었다.

저쪽에는 신출귀몰의 체셔 캣도 있고, 백설이 갖고 있던 은폐 아이템도 있다.

어딘가에 숨어들어서화약을 훔쳐오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함정을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백설은 난쟁이를 여덟 명이나 소환할 수 있는 권능의 보유자였다. 함정의 원리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도 설치할 시간이라면 넘치는 축에 속했다.

그리고 조금이 더 지나서야 모자 장수는 알아차린다.

지금은 생각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

'호흡이, 부족하다.'

시간을 멈춰놓는 동안 그는 숨을 참아야만 했다.

지붕 위에서부터 백설이 있는 곳까지 시간을 멈추고 이동했으니 자연스럽게 숨이 가빠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작 숨을 골라야 할 때에, 또다시 시간을 멈추고야 말았던 것이다.

잠수를 하다 슬슬 여유롭게 한 번 올라올까 싶던  찰나에 다시 머리를 물에 처박힌 셈이었다.

그렇다고 호흡을 하겠다며 시간 정지를 다시 해제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코앞에서 멈춘 폭발이 다시 재개되어그를 죽음에 몰아넣을 테니까.

'우선 여길 빠져나가야…….'

모자 장수는 각인된 이미지를 떠올리며 섬광 속을 걸어나갔다.

시간을 멈춘 상태에선 시야가 흐릿해진다.

거기에 적응한 그에게 기억을 토대로 눈을 감고 길을 걸어다니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건물을 빠져나와 거리를 벌리자 그제야 조금은 제대로 앞이 보여오기 시작했다.

이제여기서 조금만 더 멀어진 뒤 여유롭게 숨을 들이키면 된다.

비틀비틀 걸어나온 그는 근처에 있는 건물 벽에 몸을 기댄 뒤 권능을 해제하려 했다.

'…아니, 잠깐.'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하고야 만다.

방금 전의 그것은 명백한 함정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걸로 안전을 확신해도 괜찮은 걸까? 상대는 당연히 시간 정지의 권능을 알고 있을 텐데?

이 자리에도 화약이 깔려있지 않다고 어떻게 확신할 있지?

한 번 허점을 찔리자 불안감은 마구 불어났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기저기 함정을 깔아두기엔 시간이 부족…….'

그러다가 모자 장수는 부족한 호흡 속에서 이전 기억을  가지 떠올렸다.

계약을통해 정해진 게임의 장소는'현실의 수도와 동일한 구조의 아공간'이었다.

근원적 계약은  '동일한 구조'라는 것을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받아들였을까?

게임이 시작하는 순간 만종이 울렸다.

또한 종소리는 아공간으로 넘어온 이후에도 들렸다.

이는 그때 아공간에서도 종이 울리고 있는 상태였다는  의미한다.

즉, 이곳의 구조는 아공간이 펼쳐지던 그 시점의 수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함정을 미리깔아뒀다고 한다면, 그 함정 역시  아공간에 재현되었을 것이다.

정황까지도 있었다.

듣기로는 부점 길드의 시안이라는 여자가 어제 여기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모자 장수는 확신했다. 그건 분명 이 근방에서 시선을 떼어놓기 위한 교란이었다.

함정은 존재한다. 거의 100%에 수렴한다고 봐도 좋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대체 어느 장소가 안전하단 말인가?

가장 확실한 건 역설적으로 그 은발 여자가 소란을 피웠던 장소다.

'그건 안 돼. 거기까지 가기엔 호흡이 따라주질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지키고 있어서 함정을 설치할 없는 장소. 이곳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 또한 꽤 튼튼하여 혹시라도 폭발에 휘말리지 않을 장소.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오직 하나였다. 그곳이라면 괜찮다는 확신이 들었다.

모자 장수는 카지노를 향해 힘껏 내달렸다.

숨을 참아야 하는상황에 격한 움직임을 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카지노는 과장을 조금 보태면 코앞에 있는 정도였다.

최대한 빨리 도착한  숨을 몰아서 쉬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 모자 장수는 급히 카지노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윽고 숨을 크게 들이키며 시간 정지를 해제했다.

"쿨럭?!"

바로 다음 순간 코와 입에 무언가 가루 같은 것이 들어왔다.

하필이면 미루고 미루었던 호흡을 겨우 들이키던 찰나여서 기침이 튀어나와버렸다.

방금 전 폭발로 얼굴 근처에 잿가루라도 묻어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추측은 금세 깨져버렸다.

시야에 펼쳐진 것은 자신의 얼굴로 무언가를 뿌려대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모자 장수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녀들'의 얼굴을 말이다.

백설의 난쟁이였다.

"뭐야. 이 빌어먹을 자식은…!"

느닷없는 공격에 분노하며 모자 장수는 그녀의 목덜미에칼을 찔러넣었다.

가쁜 호흡을 겨우 억누르고 잠깐 정도 시간을 멈추었기에난쟁이는 제대로 대응할 수조차 없었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을  그녀는 목덜미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분명 백설은 다른 건물에 있는데.'

백설이 가진 권능으로는 자기 시야 안에서만 난쟁이를 소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리 난쟁이를 배치해둔 것일까?

하지만 그조차도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논파되고 만다.

모자 장수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난쟁이가 소환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잽싸게 나이프를 머리통에 박아줬지만 그 사이 또 얼굴에 기묘한 가루가 흩뿌려진다.

연신 침을 뱉고 기침을 해도 까끌까끌한 감촉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참 몸을 정비할 여유는 없었다.

방금 그것으로 난쟁이들의 소환자가 이 장소를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백설이 자기 권능을 타인에게 넘겨준 모양이었다.

모자 장수는 이를 갈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구석진 곳의 샹들리에 위에 앉아있는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나부끼며 이쪽을 내려다보는 그는 분명 콜린이라는 이름이었을 터다.

그는 모자 장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샹들리에 위에서 반동을 주는가 싶더니 도약했다.

자연스럽게 콜린의 이동 동선으로 모자 장수의 시선이 향한다.

그 끝에 있는 창문은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활짝 열려있었다.

"도망치게  것 같으냐…!"

거리는 멀었다.

시간을 멈추고 쫓기에는 아직 호흡이 정돈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금까지 상대했던 녀석들에게 통하지 않아 어쩔  없이 근접해서 싸우긴 했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특기는 원거리에서 발휘되니까.

모자 장수는 곧바로 콜린에게 나이프를 던졌다.

"……윽?!"

번득이는 날붙이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들어 소년의 목덜미에 박힌다.

콜린은 피를 흘리며 창틀에 부딪혀 튕겨나오더니 아래로 거꾸러졌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직후 콜린은 나이프를 뽑아내더니 다시금 자신의 목을 찔렀다.

"…현명하군."

그렇게 바닥에 널브러진 소년을 바라보고서 모자 장수는 킥킥 웃었다.

죽음을 맞이한 그의 신체가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한다.

어차피 도망쳐봐야 고통만 늘어날 뿐이라는 걸 파악한 것이리라.

나름 참모를 하고 있을 정도로는 합리적인 소년이었다.

다만 기개가 많이 부족한─그러니까 이른바 너무 과하게 '남성적인'─ 점은 문제라고 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도 문제이지 않은가?

'뭐, 어차피 일이 끝나면 죽일 녀석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이내 모자 장수는 어깨를 으쓱이고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사람.

'우선 백설부터 쫓을까.'

아무리 불사의 권능 탓에 죽지 않았다 해도 그만한 폭발이었다.

분명 상처는 입었을 테고 현장에 돌아가면 흔적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겠지.'

그는 카지노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아니,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활짝 열린 문으로 다가간 순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린다.

모자 장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무거워졌던 몸이 조금은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어… 째서?"

다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자 시야가 휘청이는 바람에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 부딪히고 만다.

나갈 수가 없다. 그는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기현상.

자신이 있는 장소를 감안했을 때 떠올릴  있는 가능성이라곤 오직 하나뿐이었다.

 장소 자체에 맺어진 계약──카지노의 비품은 바깥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이 아공간은 생물을 제외한 모든 것이 현실의 수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뒤이어 혼란에 빠지는 그였다.

모자 장수는 카지노의 비품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 말이다.

'설마.'

그리고 잠시 뒤 두려운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조금 전 난쟁이가 그에게 뿌렸던 가루가, 체내에 들어가고 말았던 그 가루가 어쩌면…….

털썩. 모자 장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코와 입의 점막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라면 괜찮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코는 잘라내면 되고 입은  정도로 헹구면 된다.

그러나… 그 뒤로넘어가버렸다면?

모자 장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무심코 스스로의 목으로 가져갔다.

당연하게도, 목은 자를  없다.

설령 자르고 살아남는다 해도 그 상태로 남을 추격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허탈한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이 아공간이 체내의 침입자와 함께 소멸하는 순간까지 그는 이 건물을 나갈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차라리 아공간이 아니었더라면 카지노의 주인인 유디트와 이야기를 해서 계약의 예외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디서부터 함정이었던 거지?

대체 어디서부터 실수를 했던 거지?

그 공허한 눈동자는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게임이 끝나기까지 대략 55분.

그러나, 그는 이 넓은 건물에 홀로 갇히고 말았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승패가 결정나버린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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