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77 너 열국을 엎은 자여
말은 갈기를 털어내더니 한 차례 푸르릉 울었다.
아무렴 매여있는 마차가 조금 거슬려 보였으나,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진 것인지 말은 얌전히 서있을 뿐이었다.
성질이 유순한 것이 군마는 되지 못하리라 싶었다.
반대로 마차를 끄는 짐말로서는 꽤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을까?
콜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의 품종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었으므로 그저 추측에 불과했다.
마차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표현이 올바른가에 대해서는 역시 의문이 들고 만다.
비록 의복을 차려입었으며 두 발로 걷고는 있지만 그들의 본질을 따져보면 하나는 고양이, 하나는 사자였던 탓이다.
"수고 많으셨어요, 체셔. 리온도요."
마차에 올라탄 둘에게 마치 헤어는 작별의 인사를 건네었다.
용병과 비슷한 느낌으로 왔을 뿐이지 실제로는 까마귀 길드 소속인 리온은 물론이고, 체셔 역시 수도를 떠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영지가 존재하는 그로서는, 모자 장수를 쓰러뜨린다는 목적을 달성한 이상 여기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체셔는 씨익 웃었다.
"길안내는 어디 만족했어?"
"그야 물론이죠."
오로지 모자 장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만 맺어진 동맹. 그 존재 이유도 마찬가지로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협력해온 정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뭐, 이제는 내 도움이 필요 없겠지. 이미 다른 길잡이를 찾은 모양이니까."
길잡이의 권능을 가진 자들 중 마치가 알고 있는 사람은 카티와 체셔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러한 의미에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이내 알아차린다.
마치는 조용히 팔을 뻗어 옆에 서있던 콜린과 손을 맞잡았다.
콜린은 그녀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체셔에게로 옮겼다.
"다음에 시간 나면 다들 데리고 만나러 갈게요."
"오긴 어딜 와? 제후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체셔는 팔짱을 끼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내가 뭐가 잘났다고 제후님을 오라가라 할까? 만나려면 내가 와야지."
하더니 그리 덧붙이는 것이었다.
…일단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아뇨. 어차피 언제 가보긴 해야죠. 거의 평생을 살아왔던 도시니까."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콜린이 자라왔던 도시다. 기억의 99% 정도는 펠레이라의 것일정도니 말 다했다.
꼭 콜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곳에는 각자 나름의 추억이 깃들어 있으리라.
아마 그리워질 때마다 이따금씩 찾아가게 되겠지.
"그리고 어차피 그렇게까지 먼 것도 아니잖아요?"
콜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유가 될 때 휴가를 받아서……."
그러나 콜린의 말은 이어지지 않고 툭 끊긴다.
그의 앞에 한 장의 계약서가 나타난 탓이다.
콜린은 무심코 가장 위쪽에 적혀있는 계약자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여왕님?'
이내 깜짝 놀라며 고개를 홱 돌린다.
궁전 쪽을 바라보자 열려있는 창문 너머로 자상해보이는 노파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콜린은 다시 시선을 돌려 계약서를 확인한 뒤 기겁했다.
"콜린. 그거 뭐예요?"
"…차원문을 여는 권능을 양도한다는데요."
이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면그렇게까지 느닷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상식적인 범위의 일도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권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후세에게 넘겨줄 걸 전부 넘겨준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는 모습으로만 보였다.
'진짜 다 내려놓고 쉬려는 건가…….'
어떻게 보자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자신이 해야 하는 건 다 해놓은 그녀였다.
결국 이번 사태를 마무리짓는 데 공헌한 것도 하얀 여왕이 아니었던가.
무엇보다 믿고 있던 부하에게 쿠데타를 한 방 먹고 나면 죄다 때려치고 싶어질 만도 했다.
"뭐야. 그러면 사실상 매일 만날 수도 있겠네?"
콜린의 말을 듣더니 체셔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도 주변 사람들이 많이 떠난다고 하니 내심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는 무리에요."
하지만 콜린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안젤리나를 데려오느라 여왕의 포탈을 이용할 기회가 있었던 그였다.
그 경험에서 추정해보자면 짧은 기간 내에 연속해서 포탈을 타는 경우 몸에 꽤나 무리가 갈 것 같았다.
"그러니 이건 비장의 수로 남겨둔다 생각하고, 가능하면 다른 이동수단을 쓰는 게 나을 거예요."
"뭐… 그런가."
체셔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공사를 혼동할 정도로 철이 없지는 않았다.
"아, 이만 출발해야겠다. 잘 있어."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봐요, 체셔."
그러다 문득 체셔는 시간을 확인하고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마차로 이동하다보니 너무 늦으면 노숙을 해야 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넉넉하게 출발해두는 편이 나았다.
이윽고 마부가 천천히 마차를 몰아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콜린과 마치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가는 마차의 꽁무니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러다가 마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콜린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언제든 만나러 갈 수 있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약간 애틋한 마음이 들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라 생사경을함께 건너온 사이라서 그런 걸까.
콜린은 무심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
하늘에서부터그에게로 날아드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그 직후였다.
"으아아아아! 비켜요오오오오!"
전조도 없이 튀어나온 다급한 상황에 콜린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으기이이이익?!"
…당연하게도 그 정체불명의 습격자는 마치에게 언제 꺼낸 건지 모를 배트로 맞아 다시 저 멀리 날아가고야 말았다.
×
출처 불명의 비행체가 국가수반의 거처에 들이받으려던 것을 겨우 저지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뭔가 엄청나게 심각한 사건이 벌어진 것만 같다.
"흐아아……."
그렇지만 얼빵한 천사가 졸음운전─아니, 졸음비행이라고 해야 할까─을 하다가사람과 충돌할 뻔 했다고 하면 순식간에 하찮음이 증폭되고야 만다.
그리고 그 사건의 장본인은 지금 응접실 소파에 앉아 홍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느긋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갑자기 통증이 몰려오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문지른다.
그 이마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어릴 적 친구와 놀다가 뿅망치로 이마를 두들기면 저런 느낌이었다고 콜린은 회상했다.
'…뭐하는 괴물이야?'
하지만 그런 훈훈한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우선, 그녀의 머리를 후려갈긴 건 뿅망치가 아니라 둔탁한 무쇠 배트였다.
이번 페스트 사태 때 박살난 김에 새로 장만한 물건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아프냐를 떠나서 살아는 있느냐를 의심해봐야 할 판인데 그걸 휘두른 장본인이 마치였다.
물론 죽일 기세로 후려친 건 아니겠지.
그렇다곤 해도 사람이 뻥 하고 날아갈 정도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상대의 존재는 경악을 품게 만들었다.
"아무튼… 바다마녀의 사절이라고요?"
이내 마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뻥 하고날아가버렸던 저 여자는 다시금 조심스럽게 날아오더니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바다마녀. 마갈관(磨羯冠)의 주인.
처음에 한 방 먹였던 건 정당방위였으니 그렇다 쳐도, 제후의 이름을 댄 이상 홀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후라고 함은 물론 범접할 수 없는 정도의존재다.
그러나 제후끼리 비교를 하자면 마치 헤어는 아무래도 조금 밀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파릇파릇한 신참이라는 건 제쳐두더라도, 힘에서부터 꽤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마치가 강한 무력을 갖고 있다곤 하지만 전대 제후였던 하얀 여왕하고만 비교해도 밀릴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물론 힘이라는 건 일신의 무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제후국 전체를 두고 보더라도 솔직히 마치의 세력은 많이 부족했다.
콜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가 제후가 되면서 세부 자료를 조금 들춰볼 기회가 그에게도 있었는데, 그때 봤던 처참한 상황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모자 장수라는 희대의 트롤러가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중이었던 것이다.
그 권력의 망자는 조금이라도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세력이 있으면 곧장 꺾어버리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중앙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행정능력이 부족하다면 차라리 지방에 힘을 실어주는 편이 낫다.
봉건제니 지방자치니 하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모자 장수의 목적은 부국강병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였다.
조금이라도 멀쩡하게 힘을 쓸 수 있는 건 그의 소수 친위대 정도였다.
'그나마 그녀석들이라도 제대로 흡수해서 다행이지…….'
당장이라도 탄식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모자 장수의 친위대에 대해서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모자 장수 개인에 대한 충성이 몹시 적었다는 점이었다.
일부는 제후국 그 자체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케이스는 충성스러운 척만 하고 있던 녀석들이었다.
주로 모자 장수의 밑에서 꼬리를 흔들며 돈이나 권력 등등을 받아먹던 사냥개인 셈이었다.
아니, 사냥개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언제고 주인을 갈아탈 수 있는 똥개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콜린은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기회주의적이라는 건 반대로 말해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다.
또한 모자 장수의 밑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던 모습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과할 정도로 야심만만한 케이스는 없었다.
즉, 적어도 지속적으로 콩고물만 떨어진다면 주인을 물어뜯을 녀석들은 아니었다.
눈치는 있되 커다란 야심은 없다… 그러한 인물들은 친구나 동료로 삼기는 꺼려지지만, 반대로 부하로 부리기에는 아주 좋은 타입이었다.
주인이 잘 풀려야 자기들에게 떨어지는 이득도 늘어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다.
'다음에 교육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잘 써먹어볼까.'
콜린은 그렇게 기대를 품고서 의식을 다시 눈앞의 회화로 옮겨갔다.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었다.
한쪽은 마치 헤어. 그리고 또 한쪽은 바다마녀의 사절이라는 여자다.
새하얀 날개가 등에 자라있어 흡사 천사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아, 네! 마갈관의 주인이시자 별의 딸들을 이끄시는 자, 그리고 가라앉은 섬의 통치자이신 바다마녀 님의 명을 받고 방문하게 된 루살카라고 합니다!"
다만 실제 분위기가 천사를 연상시키느냐 묻는다면 역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우선 첫 만남… 아니, 습격에 대한 변명부터가 가관이었다.
요컨대 여기까지 오는 게 너무나 먼 여정이었기 때문에 비행 도중에 무심코 졸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혼자 내버려두면 어디서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분위기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용케 이런 사람을 사절로 보냈다 싶기도 했으나 콜린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딘가 얼빵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조금 전 일을 떠올려보면 그 방어력만큼은 진짜배기였다.
아마 다른 면에서도 어느 정도 평균을 뛰어넘은 신체능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 이쪽을 신경 써서 중요한 사람을 보낸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그래도 나라면 이런 여자는 안 보냈겠지만.'
일단 처음부터 충돌사고를 낼 뻔 했던 시점에서 이미 충분한 외교적 결례다.
어떤 제후와 비교해도 한끗 밀리는 마치가 상대가 아니었더라면 큰일이 났을 거다.
그리고 정말로 누가 다치는 일이 생겼다간 마치가 상대라도 당장 따로 사람을 보내 사죄해야 할 수준이었고 말이다.
"우선 마치 헤어 님. 보병관의 주인이 되신 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녀님께서도 좋은 관계를 맺길 바란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바로 본론에 들어갈까요?"
당연하지만 단지 축하만을 위해 그녀가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다.
무엇보다 정식 축하 사절에 아무런 선물이 존재하지 않을 리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조금 전의 축하는 명목, 혹은 그저 서두를 던지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본론은 따로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예, 그러면… 조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본론은 제후님이 아니라 뒤에 계신 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루살카는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콜린은 눈을 꿈뻑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간 곱슬거리는 고동색의 머리칼은 어깨까지 자라 있었다.
그보다 더 진한 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며 눈을 맞추었다.
콜린은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참모로서의 입장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지금도 대등한 대화의 참가자보다는 마치의 뒤에 시종처럼 서있었다.
물론 콜린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직접 사람을 보내가며 그에게 용건을 말하려고 하는가는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
마치 헤어도 함께 입을 다물었다는 것은 루살카의 발언을 허락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주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녀는 당당히 말했다.
"결혼해주세요."
그리고 또다시 방 안에 짙은 침묵이 감돈다.
"……."
"……."
"…아, 말실수했다! 방금 말은 없던 걸로 해주세요!"
이쯤 되면 진짜 외교적 결례가 맞지 않은가…?
콜린은 문득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