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78 공기의 딸(1)
마치 헤어는 괴짜다.
마이페이스적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더욱 자세히는 쾌락주의자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타인에게 너무 심각한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저지른다.
이것도 처음에는 그저 모자 장수 앞에서 발톱을 숨기기 위한 연기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삶을 경험해보면서 약간이나마 생각이 바뀌었던 것이다.
어쭙잖은 허례허식에 얽매이고, 명분이니 뭐니 하는 것에 매달릴 필요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따금은 조금 무례하게 느껴지더라도하고 싶은 말을 하고, 주변에서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이다. 즐기며 살아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아무튼 마치 헤어라는 여자의 가치관은 그렇게 정리해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그녀는 역시 약간 괴짜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콜린은 시선을 마치에게서 그 대화 상대에게로 옮겼다.
고동색의 머리카락. 다름 볼륨감이 있는 가슴을 가린 하얀 천옷은 꽤나 얇은 소재로 되어 있어 검은색 속옷이 비쳐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이름은 루살카, 또 다른 제후인 바다마녀의 사절로 이곳에 온 여자였다.
"어, 그러니까 말이죠…?"
루살카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했다.
물론 그녀 이상으로 콜린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알아차리고야 만다.
저 여자는 최소한 마치급으로 상식적인대화를 박살내는 괴짜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상황에, 그것도 초면에 청혼을 해버리겠는가.
다짜고짜 튀어나온 그 발언에는 마치조차 순간 이마를 짚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내 루살카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으리란 결론에 도달했는지 그대로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만약 평범한 식탁 정도의 높이만 되었어도 곧바로 머리를 박지 않았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아뇨.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모습을 보더니 마치는 입매를 가리고 웃었다.
저쪽의 목적이 무엇이든 먼저 실례를 저지른 이상 대화를 유리하게이끌어나갈 수 있으리라.
"뭐, 뭐든지 할 테니 부디 용서를……."
"…뭐든지?"
그러나 뒤이은 루살카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고 마는 마치였다.
이어서 그녀는 음흉한 눈빛으로 루살카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러면 우선… 으햣!"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가 죄다 드러나기에 콜린은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귀를 홱 붙잡았다.
마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흠칫 떤다.
"으, 아파라… 놔주세요……."
"일주일만에 미인계에 넘어가는 제후가 어디 있어요?"
"넘어가긴 누가 넘어가요. 조금 장난치려고 했던 거라고요."
콜린은 미심쩍은 눈으로 잠시 마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떼었다.
조금 변태같은 여자긴 해도 결코 공사를 혼동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건 콜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미인계…?"
두 사람의 실랑이를 잠시 지켜보던 루살카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뺨을 발그레 붉힌다. 등 뒤에서 돋아난 날개는 자제를 모르고 파닥파닥 흔들렸다.
이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연다.
"저… 혹시 제후님은… '그쪽' 취향이신 건가요……?"
그러곤 '저 정도 가슴을 상대할 수 있다면 한 번쯤은…'하며 홀로 자그맣게 중얼거린다.
루살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콜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선이 잘못된 거 같은데?'
단순히 예의니 상식이니 하는 게 부족한 정도가 아니다.
저건 마치와 비슷하지만 그야말로 공적인 일에 사심을 우겨넣는 타입의 인간이다.
외교 사절은커녕 공직 자체에 들이면 곤란한타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족은 이 정도로 해두고 본론에 들어가는 게 어때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뒤 콜린이 말을 내뱉었다.
조금 전 용건이 있는 건 콜린 쪽이라고 말했던 루살카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평범한 시종인 척 해봐야 별 의미도 없으리라.
그리 생각한 콜린은 전면으로 나서기로 했다.
"아, 그렇지! 까먹을 뻔 했네요."
그의 말을 듣더니 루살카는 정신을 되찾고는 반듯한 자세로 돌아왔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서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저희가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응접실이 침묵에 잠겼다.
"저희가 당신을 이 세계에 불렀습니다."
루살카는 그렇게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분위기가 변해있었다. 진중함을 넘어서 경건함까지 느끼게 할 정도다.
"세계…?"
그 말에 의아함을 품었던 것은 마치 혼자였다.
그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잠시 멍한표정을 짓다가 콜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콜린. 혹시 당신……."
"…뭐, 그런 셈이에요."
콜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치의 의문에 답했다.
그의 현재 상황은 꽤나 복잡했다. 두 사람의 의식이 혼재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괜히 남들에게 말해봐야 혼란을 일으킬 뿐이라 생각했다.
일단 도의상 가족인 한나에게는 설명을 해두긴 했지만 그게 전부─말해주기도 전에 길잡이의 권능으로 알아차린 체셔를 제외하면─였다.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폭탄발언이 튀어나올 줄은 콜린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제게 뭘 바라는 건가요?"
허나 당황해서 가만히 굳어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콜린은 평정을 되찾고 루살카에게 물었다.
분명 황당한 상황이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라면 산더미처럼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호기심을 동하게 했던 건 목적이었다.
어째서 콜린을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일까?
만약 관계자가 한 사람이라면 단순한 유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살카는 조금 전 '저희'라고 말했다.
그녀가 누구의 이름을 대었는지 생각해보면 대강의 윤곽은 그려진다.
당연하게도 집단이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즐기기 위해 움직이기는 쉽지 않다.
굳이 콜린을 데려왔다면, 분명 무언가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없어요."
그리 생각하고있던 콜린이었기에 루살카의 말에는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살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이 세계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그쪽에 좋은 현상이 벌어진다는 거죠?"
"네, 정확하게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에요."
"그럼 여차하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할 수도 있겠네요."
"…녜?"
콜린의 추측에 루살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표정 그대로 굳어버린다.
"뭐, 뭐뭐, 뭐라고요?!"
"아니. 제가 살아있어서 당신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했잖아요?"
"그게 왜 자살이랑 이어지는 거죠?!"
당연하지만 콜린에게 정말로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협상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느닷없이 그런 협박을 당하게 될 상황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만 말이다.
"그…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제발? 자칫하면 계획이 박살나버리는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거 참 고마운 정보였다. 콜린은 아무 말 없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 역시 농담이었던 거죠?"
대체 어떤 의미로 이 웃음을 받아들였던 것인지, 루살카의 표정이 한껏 밝아진다.
"아,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되시면 마녀님의 영지에도 초청하겠습니다. 바닷속 깊은 곳에 잠든, 끓어오르는 혼돈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명소랍니다."
"……잘못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콜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린다.
"끓어오르는… 예?"
"저쪽 지역에서 이 세상을 부르는 이름이에요."
콜린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받아들였는지 마치가 옆에서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저희가 이곳을 원더랜드라고 부르듯 말이죠."
물론 콜린에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예상은 하고 있던사실이었다. 단서라면 충분히 넘치고 흘렀다.
무엇보다 지금의 그를 이 자리에 있게 한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떠올리면 충분히짐작할 수 있는 범위였다.
다만 벌써부터 엮이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는 못했다.
"혹시, 그, 마갈관의 주인께서 다스리는 제후국의 수도 이름이…?"
"르리예(R'lyeh)라고 해요. 정말 아름다운 도시죠,"
자신의 추측이 확정되자 콜린은 이마를 짚었다.
'아니, 괜찮아. 더한 것도 만나봤잖아?'
이아이아, 죽은 크툴루가 그의 처소 르리예에서 꿈꾸며 기다리노니.
콜린은 머릿속으로 농담 삼아 기억하고 있는 주문을 외운 뒤 다시 눈을 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독서를 즐기던 콜린 입장에서는 모를 리 없는 이름이었다.
다만 딱히 '그쪽' 출신이라고 지레 겁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난 번 추론 끝에 콜린이 상상하던 것에 비하면 아득히 약하다는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하얀 여왕까지 목격했던 시점에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지만 역시 조금 어처구니가 없기는 했다.
'…동화 기원인 제후들은 사실 다 그쪽인 건가?'
무심코 그런 생각마저 들어버린다.
떠올려보면 제후 중에 동화 출신이 하나 더 있지 않았는가 싶어 한숨을 내쉬는 콜린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적어도 빨간 망토와는 엮일 일이 없기를 기도하도록 하자.
"아, 그렇지만 시간을 감안하면 제후 회의 이후에나 초대드릴수 있겠네요."
"제후 회의?"
그런 콜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장담컨대, 결코 모르고 있다─ 루살카는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말에 의아한 목소리로 마치가 되물었다.
"어… 모르시나요?"
"아뇨. 알기야 알죠. 전능하신 태양왕 전하의 이름으로 열두 제후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거잖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마치도이미 숙지하고 있는 지식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되물은 것은 첫째로 정치 쪽의 정보가 부족한 콜린을 위한 것이었고, 둘째로는 마치가 아직 제후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받지 못하였던 탓이었다.
"제후 회의가 열린다고요?"
"어… 원래 제후가 바뀌면 항상 있었거든요."
이내 마치는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그게 전통이었기에 루살카는 자신의 짐작을 전제로 말해온 것이다.
어쩌면 자기 혼자 회의에 초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마치였기에 조금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콜린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말이다.
물론 마치는 얼마 전까지 이곳의 제후였던 하얀 여왕과 비하면 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의 재능이 어떠하고 실력이 어떠하든, 하얀 여왕 본인에게서 정식으로 제후관을 계승받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걸 부정하는 건 마치 헤어에 대한 모욕을 넘어서 하얀 여왕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던 것이다.
콜린은 사람들이 이따금 입에 담곤 하는 '전능하신 태양왕 전하'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이 지방에 대한 하얀 여왕의 통치를 허락하고 있다는건 분명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괜히 정면에서 대놓고 도발해서 제후 규모의 반란군이 발생하는 사태를 일으키고 싶지는않으리라.
그게 상식적인 처사였다.
'아니, 그래도 최근에 상식을 밥말아먹은 양반을 너무 많이 봐서 확신을 못 하겠네…….'
아무튼 그런 회의가 곧 있을 예정이라고한다면 어느 정도 준비는 해둬야겠다.
적어도 다른 제후들 앞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곤란하지 않겠는가.
"흐음… 그러고 보면 궁전에 적절한 마차가 있던가요?"
"이전에 쓰던 게 있지 않겠어요?"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콜린은 마치에게 질문했다.
다만 아직까지 제후로서 완벽한 인수인계가 끝나지 않은 마치였기에 확실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답을 듣고서 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실무 관료들을 쥐어짜서 아는 거 모르는 거 죄다 털어놓게 만드는 것보다도 먼저 바니걸 생산 라인을 트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던 탓이다.
행정 관련으로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철저해질 필요는 있을 것이다.
애초에 살면서 이만한 권력을 손에 넣으리라곤 상상도 안 하고 있던 두 사람이었기에 아직 여러모로 허점이 많았다.
'…좋아. 사람을 굴리는 게 뭔지 보여줘야겠네.'
무려 21세기 한반도에서 단련된 술(術)을 발휘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어, 일단 마차는 필요없을 거예요."
그러던 중 루살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콜린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다 말고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초대장이 오면 그걸로 '문'을 열 수 있거든요."
하긴. 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제후도 포탈을 여는데 과연 그 상위의 존재가 비슷한 걸 하지 못하겠는가?
"그나저나 급히 가야 할 일은 있으신가요?"
이어서 콜린은 분위기를 바꾸어 미소와 함께 루살카를 바라보았다.
"어… 아뇨. 딱히 그런 건 없는데요?"
"그러면 오늘 하루는 여기서 푹 쉬고 돌아가시죠. 방을 하나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저희도 기왕이면 마갈관의 제후 분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콜린은 가슴께에 손을 얹고 최대한의 친절함을 담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저희는 사절로 오신 분을 홀대하는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니까요."
절반 정도는 진실이었다.
내줄 수 있는 방 중에서는 가장 고급진 걸로 마련을 해야겠지.
다만, 유감스럽게도 아주 우연히 도청기가 깔려있는 방을 말이다.
기왕 저런 허술한 양반이 방문해줬다. 정보란 정보는 죄다 털어먹어야지 않겠는가?
콜린은 그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