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86 빛나는 가축떼(4)
소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문을 두어 번 노크했다.
"콜린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안쪽에서 대답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 콜린은 심호흡을 했다.
이어서 그는 차가운 손잡이에 손을 얹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온게냐?"
창문이 새까맣게칠해진 기이한 방.
그곳에서는 한 사람의 노인이 아늑한 의자에 앉아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친절한 할머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친절함을 얼굴에 담고 있으면서도, 분위기에 녹아든 위압감은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지금은 마치에게 넘어간 보병관의 이전 주인, 전대 제후인 하얀 여왕, 쥬브 니구라스.
그녀를바라보고 있으면 무심코 한 차원 위의 존재라는 생각을 해버리고 만다.
"여왕님 혼자이신가요?"
"그래. 카티는 지금 일하는 중이야."
떠올려보면 모자 장수의 조언자로 일했던 그녀였다.
정권이 바뀐 지금 상황에서 카티의 도움이필요한 일은 이것저것 많으리라. 한창 바쁠 때다.
"가능하면 두 분 모두 계셨으면 좋았겠지만, 그리 상관은 없겠네요. 앉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편하게 있거라."
하얀 여왕의 허락을 받은 뒤 콜린은 의자 하나를 살짝 끌고와 그녀와 마주앉았다.
정황상 평소에 카티가 쓰던 의자겠지.
"잠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무슨 이야기이기에 이토록 온 것이니."
"저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콜린은 빙빙 돌리기보단 직설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순간 하얀 여왕의 눈썹이 움찔 떨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해선 내가 반대로 물어야겠구나.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라기보다 전언에 가깝습니다만… 미친 아랍인으로부터 말이지요."
콜린은 얼마 전 읽었던 편지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다마스쿠스. 738년."
편지는 찢어버렸지만, 그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암기한 이후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대는 악몽이다. 벙어리가 대체로 옳다. 회임에 대한 염려는 당장은 불필요. 어떤 경우에도 남색은 불필요."
말을 이어나가면서 콜린은 하얀 여왕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어떠한 특이사항이 보이지는 않았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원탁에서. 정치에 있어선 모든 구성원이 잠재적 적.각오해둘 것…이상입니다."
"…암호인가? 미안하다. 내용을 이해하질 못하겠구나."
그녀가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암호라고 할 정도로 꼬여있는 글은 아니다. 그러나상대의 특정 지식을 전제로 하는 문장이었다.
"다마스쿠스 738년. 이건 엄밀히 말해서 내용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알리는 표시지요."
편지의 발신인은 당연하게도 미친 시인 압둘 알하자드였다.
아랍어로 적혀있는 데서 짐작해볼 수 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아랍어를 쓰는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걸 위해 한 차례 더 단언해주는 것이다.
738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완성된 책. 이슬람의 거문고라고도, 소리의 책이라고도 불리는 그것.
네크로노미콘의 원전이 되는 알 아지프, 그 저자인 압둘 알하자드를 말이다.
"실질적으로 본론은 다음 문장부터입니다. 아니, 엄밀히제가 누구인지 이 문장에서 전부 밝히고 있습니다."
──그대는 악몽이다.
"여기서 일단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콜린의 정체가, 그의 기원이 '악몽'이라고 불릴 정도로 끔찍한 무언가였을 가능성.
예를 들자면 저번에 폭주해서 큰 재앙으로 번질 뻔 했던 페스트의 예를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굳이 이렇게 표현할 가능성은 적다고 콜린은 판단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가능성은…
"제가 문자 그대로 '악몽'이다."
악몽. 영어로는 나이트메어.
그 어원은 밤(night)과 악마(mare). 밤에 나돌아다니며 악몽과 가위눌림을 뿌리고 다니는 몽마.
mare라는 어휘에는 암말이라는 의미도 있기에 말의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다만… 정황을 따져보면 정말 나이트메어 그 자체인 건 아닐 거예요."
여기서는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하면 간단히 답이 나온다.
몽마. 뛰어난 정력.
거기서 콜린이 떠올릴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인큐버스뿐이었다.
그건 이미 예전에 추론했던 해답이기도 했다.
"벙어리가 대체로 옳다. 이건 제가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를 위한 힌트겠지요."
몽마에 대하여 논했던 벙어리라 함은 오로지 한 사람이다.
"뭐, 정확하게는 진짜 벙어리인 게 아니라. 그런 별명이 붙은 사람을 의미하겠지만요."
신학과 오컬트가 엮인 이야기 중에는 재미있는 것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인큐버스에 대한 논쟁이었다.
일찍이 인큐버스는 여성을 임신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기독교의 악마는 곧 타락한 천사다. 그러나 천사는 아이를 낳지않는다.
만약 악마인 인큐버스가 여성을 임신시킬 수 있다면, 이는 곧 본래의 신체에 존재하지 않는 기능을 덧붙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의 영역이고, 기독교 세계관에서 창조라고 함은오로지 신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대해 답을 내놓은 게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 벙어리 황소, 천사 박사 등으로도 불리던 전설적인 신학자다.
그는 인큐버스와 서큐버스가 동일한 존재이며, 남성에게서 갈취한 정액을 변질시킨 뒤 여성에게 주입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굳이 편지에서 아퀴나스를 언급한 것은 콜린이 자신의 기원을 인큐버스라 확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리라.
"다음 두 문장은… 개인적인 조언이니 패스하도록 하지요."
아무래도 이 편지를 쓴 사람은 콜린이 문란한 생활을 보낼 것이라 짐작했던 모양이다.
하긴 인큐버스의 피가 흐른다고 하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인큐버스의 특성을 가진다면 회임(懷姙), 즉 임신의 염려가 없다고 함도 당연한 일이었다.
구태여 이 말을 덧붙였다는 건 피임 걱정 없이 마음껏 즐겨도 된다는 그 나름의 배려였을까.
반면 알하자드는 거기에 '당장'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영원히 이른바 씨 없는 수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겠지.
기본적으로 콜린은 번거롭게 피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에 있어서 환영이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신체의 상태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건 여러모로 안심이 되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 수단은 아퀴나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남자와 몸을 겹쳐야 한다는 건 아니니 안심하라며 알하자드는 추가로 덧붙였던 것이다.
"아무튼 또 다음 번 문장은 숨기고 있는 게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해석하면 돼요."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원탁에서 하겠다.
이는 곧 있을 제후 회의에서 만나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 가장 마지막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콜린은 살짝 한숨을 내쉰 뒤 말을이었다.
"정치에 있어서는 모든 구성원이 잠재적인 적이다."
얼핏 보면정치판에 뛰어드는 신입에게 해주는 냉정하지만 친절한 조언으로 보인다.
"다만 이 경우는 아무래도 앞뒤 문맥을 감안할필요가 있습니다."
맥락을 무시하면 단순히 상투적인 조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걸 굳이 이런 이야기 사이에 끼워넣을 이유는 없다.
"이걸 통해서도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게 있다고 봐야겠죠."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일단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면 '의심의 범위를 넓혀라'라는 조언입니다."
그는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인가?
"우선 첫 번째 가능성."
그렇게 말하며 콜린은 스스로의 가슴을 가리켰다.
"심리적인 범위를 넓혀라. 즉, 평소 신뢰하고 있던 존재를 의심하라."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콜린은 스스로의 추측을 부정하며 고개를저었다.
"저쪽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감안하면, 그런 조언을 해주기는 힘들겠지요."
간단히 말해서 이쪽 동료들이 어떤 성격인줄 알고 의심하라느니 뒤통수를 조심하라느니 조언을 하겠는가?
"거기에 그나마 가능성을 더해보면……."
콜린은 시선을 하얀 여왕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쪽을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제후의 자리를 맡고 있던 하얀 여왕이다.
다른 진영에서도 그녀의 성향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거기에 대해 경고하는 건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왕님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 정치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없겠죠."
알하자드는 굳이 정치에 있어서의 구성원이라고 규정해두었다.
그럼 아마도 이미 뒷선으로 물러난 하얀 여왕을 저격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의심을 넓히는 범위는… 이쪽이겠죠."
이어서 콜린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아니, 아마도 그 너머일 것이라고 하얀 여왕은 생각했다.
그는 하늘 위에 떠오른 태양을 부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야기 장소로 이곳을 정한 것은 단지 여왕이 머무는방이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시커멓게 칠해진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햇빛은 일절 들지 않는다. 방은 오로지 인공 조명에 의해서만 밝혀져 있었다.
"어째서 그 사람들이 태양왕과 적대하려는지는 몰라요. 다만 뭔가 엄청난 스케일의 일에 엮여버렸다는 건 확실하더라고요."
콜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당신의 차례라는 듯, 하얀 여왕을 바라보았다.
일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어쩔 수 없다.
"태초에, 이 세상이 둘로 갈라질 적에."
하얀 여왕은 한숨을 내쉰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양왕이 이쪽 세계─원더랜드를 지배하게 되었지."
그렇게 말하는 여왕의 눈에는 알 수 없는 빛이 감돌았다.
아마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로 열두 제후를 세워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왜 열둘인가 하면, 각자에게 맡겨진 의무 때문이었지."
태양왕과 열두 제후.
지금의 정치 체계가 그때부터 이어져왔던 모양이다.
물론 이야기를 들어봐선 한 번도 왕관의 주인이 바뀐 적이 없다니 당연한 노릇이지만 말이다.
"모든 제후에게는 불멸의 괴물을 억누르고 관리할 책임이 있다. 이들은 죽일 방법이 아예 없거나, 이론상으로만 살해할 수 있거든. 우리를 예로 들자면 페스트가 그것이지."
"…그러고 보니 마치 누나에게 제후 자리가 넘어갔는데 괜찮을까요?"
"거기는 분담을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원래 약해진 상태라면 하얀 여왕 혼자서도 억누를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어쩌다보니 그녀뿐만 아니라 마치 헤어, 안젤리나, 마틸다까지 각자 조금씩 분담하고 있기에 사실상 부담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는 모양이다.
모자 장수의 수작을 비롯하여 우연과 우연이 겹친 끝에 이런 일이 되었던 것이다.
"만약 페스트를 이렇게까지 쪼개어놓지 못했다면 애초에 헤이어에게 제후 자리를 넘겨주지도 않았을 게다."
그 눈빛에서는 분명한 진심이 느껴졌다.
아무리 모두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 쉬고 싶다고 해도, 문자 그대로 남에게 떠넘기기만 하고 냅다 도망쳐버릴 정도로 책임감이 바닥나있지는 않은 그녀였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모두의 의무에 따라 세상이 굴러가기 시작했으나──."
뒤이어 여왕은 살짝 어조를 바꾸어 말을 잇는다.
"문제가 일어나고 말았지. 태양왕이 금기를 저지르고 말았던 게야."
"금기?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죠?"
"그건 잊어버렸단다."
"…예?"
너무나도 무책임한 발언에 콜린이 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하얀 여왕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더욱 정확하게는 잊힘을 당했다고 해야겠지."
"…그것도 태양왕인가요?"
"아마 그럴 게다."
콜린은 다시금 조용히 여왕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인큐버스'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서 잊혀진 이유도 어쩌면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직감이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제후 중 일곱이 모여 태양왕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전쟁이 아니라 결투요?"
"그래. 태양왕을 꺾기 위해서는 그녀의 지배를 깨부술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내 콜린은 태양왕의 권능으로 알려진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근원적 계약이군요."
"그래. 그것은 그녀의본질과 다름없는 것이었기에, 계약이 이뤄진다면 태양왕 본인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게다."
계약은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그것은 태양왕본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기에 왕과 일곱 제후는 지금은 잊혀진 무언가를 걸고 내기를 했던 것이다.
"태양왕은 자신의 자리를, 일곱 제후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에 더불어 다시는 반역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맹세를 판돈으로 걸었지."
이어서 하얀 여왕은 일곱 제후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했다.
백양관의 여디디아, 금우관의 엔키두, 쌍아관의 헤라클레스, 거해관의 제천대성, 천갈관의 대성환희재천, 인마관의 주르투르, 마갈관의 바다마녀.
…태양왕이 아직도 건재한 이상, 그들의 결과가어땠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곱 제후는 일곱 보물을 잃었지.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빼앗은 힘으로 태양왕은 처음에 시도하려고 했던 '금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뒤틀었다."
하얀 여왕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서 잊혀진 어느 존재를 세상에서 추방함으로써 이뤄졌지."
"그런 거였군요."
콜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대충 어떤 상황인지 납득이 갔다.
누군가를 추방하였고, 이 세상을 뒤틀었다.
원더랜드에서 느꼈던 부조화의 원인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태양왕은 인큐버스를 추방시킴으로써 이 세계에서 남성성을 거세했던 것이다.
그리고 루살카 진영의 목표를 위해서 콜린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쪽 진영이 어떻게든 추방당한 인큐버스를 다시 이 세계로 데려왔다는 점이었다.
태양왕에게 다시금 반역의 칼날을 들이밀기 위해서 말이다.
콜린은 무심코 웃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자아, 그러면 이제 어떻게 움직이면 좋으려나?'
캐스팅보트라는 건, 적어도 본인 입장에서만큼은 언제나 즐거운 자리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