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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8화 (18/342)

Chapter 18 - 엄마가 되어버린.(5)

용맹한 드워프 전사 고르돌, 가렌 고르돌 랜드록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제 아내가 마족의 손아귀에 갈가리 찢어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봤는데, 감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비명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사방팔방으로 나뉘어진 제 아내의 육편.

그것이 제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붙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것들이 꿈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고르돌, 정신 차리게!'

마침 자신의 공방에 방문했던 친우가 아니었다면, 본인의 운명 또한 그곳에서 끝나버렸을 터였다.

평생을 철과 함께 살아온 고르돌이 제 분신과도 같은 망치로 무언가를 죽여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단 한 순간에 제 아내를 찢어 죽였던 마족이 다진 고깃덩어리가 되어있는 꼴이란.

생전 전투라고는 어렸을 적 형제와 투닥거리는 것 정도 밖에 해보지 않은 그가 마족을 죽여낼 수 있던 건 전부 전신을 가득 물들인 분노 덕분이었다.

'도망쳐, 마족들이 온다! 마족들이 와!'

'공방을 버리고 도망쳐라! 목숨을 잃으면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야!'

도망치는 동족들과, 끝까지 남아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동족들.

질척한 살점과 철내음을 묻힌 비릿한 망치를 손에 쥐고, 잠시 동안 고민했더랬다.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이곳에 남아 맞서 싸울 것인가.

'먼저 가게.'

'자네 제정신인가?! 여기서 죽으면 그냥 개죽음일 뿐이란 말일세!'

개죽음이라,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죽어버린 제 아내와의 추억으로 물든 이곳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느냔 말인가.

망치 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제 앞을 가로막은 마족의 면상을 순식간에 으깨버린다.

'해야 할 일이 있네.'

'자네 딸을 생각하게!'

딸, 아내가 남긴 마지막 유산.

순간적으로 떠오른 딸아이의 자그마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릴 뻔 했지만, 드워프 특유의 고집은 같은 드워프들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마족들이 후방으로 가려면 이곳을 뚫어야하니, 다른 이들을 지키겠답시고 저 뒤편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끝까지 맞서 싸우는 편이 더 나을 터였다.

'어차피 이곳에서 막아내지 못한다면 다 죽을 뿐이라네.'

'...알겠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친우와, 자리에 남은 자신.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를 지키겠다는 일념 뒤로, 후방에서 몸을 피하고 있을 딸아이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곧 찾아가마. 그러니, 부디 안전하게만 있어다오.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며 달려드는 마수의 옆구리를 박살내고, 그 머리통을 짓이긴 고르돌이 돌연 크게 소리쳤다.

'내가 이곳에 있다! 여기다! 너희가 죽이려는 드워프가 여기에 있다!'

붉게 물든 망치를 쿵쿵 내려치며 마족들의 시선을 끌어모은 그가 땅바닥에 몸을 뉘인 마수의 머리통을 그대로 뭉게버렸다.

마족이란 피와 살점에 목마른 종족.

전투를 위해 살고, 전투를 위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전적인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다.

도발을 해온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 시작된 연전에 고르돌의 몸이 바쁘게 움직였다.

망치로 칼날을 깨부수고, 머리통을 박살내며, 다리를 짓이긴다.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든 대지의 풍경이 그의 눈을 따갑게 찔러왔다.

'이걸로 끝이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린 마족을 내려다 본 고르돌이 짧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이미 드워프의 한계를 초월할 정도로 움직인 몸은 잔뜩 삐걱거려,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게 된다면 곧바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확인해야만 했다.

제 딸 아이의 안전을. 그리고 다른 동족들의 생존을.

'...마키나.'

그렇게 억지로 몸을 움직여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간 끝에 보인 건 몸을 피한 동족들도,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딸도 아니었다.

시체.

자신이 버티고 있으면, 그리고 이겨낸다면 안전할거라고 믿었건만.

간악한 마족들이 끝까지 자신만 노릴 것이라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다.

차라리 딸아이를 곁에 두었다면 무언가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르지.

'혼자 둬서, 미안하구나.'

작은 중얼거림이 피비린내를 품은 바람에 실려 저 하늘을 향해 천천히 흘러올라갔다.

드워프들의 고향에 남은 건 오직 살점과 피웅덩이 뿐이었다.

그날, 가렌 고르돌 랜드록은 총 삼백육십칠 구의 시체를 땅에 묻었다.

무덤마다 하나하나 세워진 묘비는 드워프 특유의 손재주가 발휘되어 꽤나 멀끔한 모양새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다행히도 삼백육십칠 개의 이름 모두가 묘비에 새겨질 수 있었다.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한 남자가, 이런 걸 달고 있어 쓰겠나.'

그리고 마지막.

자그마한 구덩이 앞에 선 그가 텅 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모두 잃은 남성 드워프들이 의례적으로 행하던 일.

바지춤을 잡아내린 고르돌이 제가 벼려낸 칼날을 손에 쥐고는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세상 다시 없을 고통을 전신에 각인시키고, 다시는 부인과 아이를 만들지 않겠다며 스스로에게 맹세한다.

끊임없이 되뇌이고, 또 되뇌일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그렇게, 가렌 고르돌 랜드록은 아이를 만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영원히.

***

"...그렇다면, 이 아이는 대체 누구의 아이란 말이냐."

피를 철철 쏟아내고 있는 내 머리를 꾹꾹 눌러 지혈하는 성녀의 손길을 느끼며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이런 세계라고 해도,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드워프가 태어나기란 그냥 불가능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분명 저 망할 드워프 녀석이 나를 범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물론 그가 고자라는 이야기를 듣고나서는 조금 마음이 아프기는 했다.

아주 조금.

'어떻게 본인 손으로 자기 좆이랑 불알을 잘라낼 수가 있지?'

상상만 해도 섬뜩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좆과 불알이 덜덜 떨려오는 듯한 감각이랄까.

솔직히 깡으로만 봤을 때는 이 드워프 녀석이 용사든 마왕이든 한 자리 차지하고 있어야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친자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해보시겠어요?"

"그런 것도 있나?"

"물론이죠! 아내의 뱃속에서 태어난 아기가 과연 친자가 맞는지 아닌지는 가정적으로 봤을 때 상당한 중대사니까요."

...끌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분명 제 뱃속에서 나온, 탯줄까지 연결된 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쯤은 꼭 확인해보고 싶었다.

물론 내가 엄마인던 변함이 없으니 확인하는 건 용사 쪽이 되겠지만서도.

"그나저나, 대체 뭐가 가정이란 말이냐. 용사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에이, 섹스하고 애 낳았으면 그게 부부고 가족이지 뭘 또 새삼스럽게..."

"...거북하군."

먹은게 있다면 곧장 토했을 정도로 끔찍한 발언이었다.

내가 누구랑 가족이라고? 누구랑 부부라고?

용사랑?

기가 차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딴 쓰레기와 부부를 하느니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진짜 쓰레기랑 부부를 하고 말지...

진짜 쓰레기는 최소한 강간도 하지 않고, 잠자고 있는데 범하지도 않고, 임신한 몸뚱이를 잘근잘근 짓밟고 욕을 퍼붓지도 않을 테니까.

"마음이 바뀌었어. 그냥 확인하지 않겠다. 내 뱃속에서 나온 아기인 것만으로도 충분해. 용사 따위의 아이인가 아닌가는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뭐어..."

어색하게 말꼬리를 늘이는 성녀에 시선을 뾰족하게 했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다.

드워프ㅡ 그러니까, 고르돌이라고 했던가.

내 아이가 마치 제 아이인 것처럼 품에 안고는 슬픔 젖은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는 아기도 죽여야 한다느니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더니, 아주 웃기지도 않는 꼴이었다.

"이제 돌려줘라. 내 아이이지 않은가."

"..."

"이봐, 듣고 있나?"

안 되겠어. 이 자식, 당장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ㅡ

"조심해서 받아라, 마왕."

"앗, 으응... 아니, 음. 알겠다."

갑작스럽게 건네지는 아기에 당황하면서도, 내 몸은 착실하게 아기를 받아들었다.

작고, 작고, 엄청 작아.

검지 손가락으로 뺨을 콕 찍으니 아기 특유의 분내와 함께 여린 살이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귀여워. 그리고 부드러워.

'위험해...'

내 정신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남성성이 거칠게 요동쳤지만, 어떻게든 겨우겨우 정신을 다 잡았다.

"그러고보니, 중요한 걸 하나 안 했네요."

"...그게 뭐지?"

"그건 바로 ㅡ"

아기의 귀여움을 잔뜩 만끽하고 있으려니, 성녀가 짐짓 심각한 표정과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중요한 걸 안했다니, 뭘? 아기는 그냥 낳는 것만으로 끝나는게 아니었던 거야?

마른침을 삼키며 묻자 그다지 심각한 사항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그러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란 말이야!

속으로 중얼거림과 동시에 눈빛으로 재촉하니, 성녀가 내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내 가슴을 흘긋흘긋 바라보는 눈동자에 조금 기분이 묘해졌지만, 지금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게 우선이었다.

"ㅡ초유 수유."

"뭐?"

"초유 수유를 해야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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