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14)
현재에도, 그리고 과거에도 용사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건 언제나 차가운 것이었다.
눈으로 덮여진 시체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기를 잠시,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새하얀 숨결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더랬다.
식량을 나르던 이들.
최전방에서 마왕군을 막아내던 기사들.
그들을 지휘하던 기사단장과 그의 부관.
그들의 보호 아래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그리고 우리.
"...용사님."
귓가에 울리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떨궜다.
분명 방금 전까지 함께 싸워왔던 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주세요. 엘리가 오면 분명히ㅡ"
"용사님."
성녀가, 엘리가 오면 살 수 있다.
아무리 커다란 상처라도 신성력을 사용해 고쳐낼 수 있는 그녀였으니, 분명 그의 상처 또한 치료해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용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눈.
이미 생기를 잃어버려, 죽은 자에 가까워진 눈.
"제가, 도움이 되었습니까?"
"...네."
"...다행입니다."
정말로.
유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말이었다.
그저 창을 들어올려, 찔러넣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병사.
얼마 전까지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가 갑작스레 창을 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아아, 그래. 분명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군에 입대 했다고 했었지.
'전부, 너희들 때문이야.'
제 옆에 토막난 마족의 몸뚱이와 흩뿌려진 핏자국을 응시한다.
마족, 마족, 마족.
그 증오스러운 이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그 가증스러운 이름!
"요, 용사님!"
"...엘리."
왜 이렇게 늦었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삼켜냈다.
그녀의 탓이 아니었으니까.
엘리의 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핏자국과 피로에, 용사는 그저 입을 꾹 닫을 뿐이었다.
"다치신 분은ㅡ"
"이미 죽었어."
"..."
"이미, 죽어버렸어."
사람이란 너무 쉽게 죽는다.
마왕군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도 그랬고, 처음 방문했던 마을에서도 그랬고, 지금 이곳에서도 그랬다.
품 안에 안겨있던 바닥에 병사를 눕혀둔 용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새하얀 눈송이가 세상을 희게 물들이고 있었음에도, 눈앞에 보이는 건 오직 어둠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래야만 할까."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병들고, 슬퍼하고, 절망한다.
마족이라는 존재들 때문에 이렇게나 고통 받는다니.
성검의 칼날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마족의 피를 털어내며, 용사가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저, 그, 으..."
죄송해요.
짧게 들려오는 사과의 말에, 용사가 두 눈을 꾹 감았다.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
또 다시, 지켜내지 못했다.
'벌써 이번이 몇 번째일까.'
셀 수 조차 없었다.
오직 피와 죽음만이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 모두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가 이토록 괴로워 하는 이유는 그가 용사였기 때문이었다.
여신에게 선택 받은, 세상을 구원할 존재.
성검을 쥔 순간부터 그 누구도 죽게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건만, 그 맹세를 비웃듯이 모두가 죽어갔다.
"엘리, 다친 사람들을 부탁할게."
"하지만 용사님, 지금 그 상태로 또 전장에 나가시면 이번에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엘리가 외쳤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이제 휴식을 취하라며 외치고 있었지만, 용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쉬면 대체 누가 움직이는데.
용사가 멈춰선다면, 그 시간만큼 무고한 사람들이 마족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정도로 그는 매정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엘리가 물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온 성녀가, 피폐해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 간절한 음성에 용사가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 밑을 진하게 칠한 흑색과 초췌해진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더랬지.
"용사니까."
하나를 구하면 둘이 죽는다.
열을 구하면 스물이 죽는다.
백을 구하면 이백이 죽는다.
천을 구하면 이천이 죽는다.
그런 상황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구하려면, 그만큼 추가적으로 움직이는 수 밖에 없었다.
잠을 줄인다.
밥을 먹을 시간을 줄인다.
휴식 시간을 줄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시간으로 하나라도 더 많은 마족들을 베어낸다.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것이, 용사니까.
***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하늘에 해가 떠오른 채였다.
푸른색으로 뒤바뀐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 보다가, 몸을 덮고 있는 따뜻함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윽..."
...역시 땅바닥에서 그냥 자는 건 무리였나.
딱딱한 바닥에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그런지 몸 전체가 쑤셔왔다.
앓는 소리를 내며 팔을 움직이니 팔꿈치 관절이 이리저리 삐걱거리는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배려를..."
그러다가 문득, 내 몸을 덮고 있는 따뜻함에 표정을 와락 찡그렸다.
용사가 두르고 다니던 망토가 내 몸 위에 덮여져 있었다.
이제라도 친절하게 굴 셈인걸까.
...어이가 없어서.
"...역시 생기지 않았구나."
아직까지도 자궁 안에 용사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지만 임신을 하지는 않았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어찌나 절망스럽던지, 절로 기분이 울적해졌다.
완전히 떨어져야만 하는 신세가 되어버리다니, 정말이지...
"비참하구나."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손에 쥔 망토를 짓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용사의 좆에 박혀 헐떡이지 않으면 안되다니, 대체 어디까지 나를 괴롭힐 생각인 걸까.
"...용사."
아직까지 태평하게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녀석을 바라본다.
다크 서클이 짙게 깔린 얼굴은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하, 꼴에 악몽 같은 걸 꾸기도 하네.
...나는 지금 이 순간 순간이 전부 악몽인데 말이야.
"...엘."
"..."
"...아리엘."
가지 마.
제발, 나를 떠나지 마.
애절한 목소리가 햇빛을 삼킨 숲을 희미하게 물들였다.
"...하."
그녀가 너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본 것이라고는 그저 능욕 당하는 캐릭터와 그로 인해 용사가 된 너 뿐이었으니, 모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네가 한 짓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아.
절대로.
"일어나라."
"큭?!"
괜히 심술이 나서 용사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머리도 단련했는지, 아니면 멍청해서 돌대가리인지 후려친 내 주먹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뭐, 깨웠으면 된거겠지.
이대로 놓아두고 마을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왜, 갑자기 나를 죽이고 싶어지기라도 했나?"
전장에서 굴러먹다 왔다는 설정은 폼이 아니었는지, 머리통을 내려치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내 목덜미에 칼을 겨눠댄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칼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하니, 용사가 표정을 찡그렸다.
"...아니."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리는 용사의 모습을 보며 그 옷자락을 꾹 잡아챘다.
의문이 맴도는 그 눈동자 안에 처량하게 주저앉은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허리가 아프니 들고 가라."
"뭐?"
"네 녀석 때문에 땅바닥에서 잤으니, 책임을 지란 뜻이다."
확실히 그 말대로, 마을로 돌아갈 정도로 회복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터였다.
용사의 물건에 꿰어진 건 둘째로 치더라도 맨바닥에선 잔 것이 꽤 문제였던 것 같았다.
"...그래."
가벼운 움직임으로 다가와 나를 안아드려는 용사의 손길에 슬쩍 몸을 맡겼다.
하지만 용사가 한 행동은 나를 안아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그 전에, 흙은 털고 가야지."
"...갑자기 흙 걱정은 왜 하는 게냐."
하반신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리니, 용사가 나를 부축해왔다.
그러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는 내 등허리와 머리카락을 탁탁 털어주는게 정성도 여간 정성이 아니었다.
분명 친절한 척 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속으로 불퉁거리면서 용사의 손길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공포 한 줄기가, 내 목을 졸라왔다.
'...때리는 것 같아서, 무서워.'
가벼운 접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의 폭력을 몸에 새겨버린 몸뚱이가 제멋대로 움츠러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거칠어지고, 시야가 희게 물든다.
작은 충격에도 발작해대는 신체에 속이 울렁거려왔다.
"그, 그만... 그만 하거라."
입을 틀어막으며 용사의 손길을 뿌리친다.
손 치워.
내 몸에 손 대지 마.
때리지 마.
때리지 말아주세요.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흐윽, 흐, 흑......"
"마왕."
"때, 때리지 말아다오..."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멈추려고 해도 멈추지 않는 눈물에 당황했지만, 차라리 이렇게 울어버리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딸꾹질을 하고 숨을 헐떡이는 동안 내 옆에서 용사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게 느껴졌지만, 딱히 울음을 멈추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서."
"..."
"...이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어?"
아플 정도로 맥동하는 심장에 표정을 찡그리자 용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마치 내 피부 색과 같아진 듯한 모습에, 비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과 잘게 떨리는 몸뚱이를 보며 너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당연하게도, 사죄의 말 따위는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