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9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4)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조금만 몸을 틀어도 어깨가 부딪힐 것 같은 밀도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어깨가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이 몸뚱이가 싫은 것도 있고, 사람들의 시선이 내쪽을 향할 때면 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람들이 지낼만한 곳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래요."
온 대륙이 초토화가 되었기에, 정작 사람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
그 얼마 남지 않은 곳에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몰리니 그만큼 북적이게 된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앗, 이거 보세요! 응, 아리엘 씨!"
"...응? 으응."
이렇게 듣는 귀가 많는 곳에서는 차마 마왕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모양이었는지 이름을 불러댄다.
성녀의 입에서 나오는 세 글자가 어찌나 어색하던지, 반사적으로 이상한 목소리로 대답해버렸다.
상대는 뭐가 그리 좋은지 베시시 웃고 있을 뿐이었만서도.
"이것 보세요, 사과가 녹색이에요!"
언젠가 찾아갔던 마을에서 발견한 것이라고는 의기양양해져서는 가슴을 쭉 펴댄다.
녹색 사과. 녹색 사과가 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한 성녀의 모습에 소심한 동작으로 짝짝 박수를 쳐줬다
와, 정말 대단해. 사과가 녹색이라니.
"그거 이외에도 신기한게 엄청 많다구요."
"...그렇구나."
확실히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기는 했다.
멍하니 성녀가 과일을 계산하고 있는 걸 바라보다가, 문득 건물과 건물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읏."
...뭔가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마왕군이 세상을 개판을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도 불량배들은 존재하는 모양이구나.
골목 어귀에 죽을 치고 앉아서는 담배인지 뭔지 모를 것을 푹푹 피워대고 있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겠지, 설마.
"자, 한 번 드셔보세요!"
"아, 알겠으니까 너무 들이밀지 말거라."
눈앞에 쭉 내밀어지는 녹색 사과를 부담스럽게 바라보다가도, 먹을 것을 보니 비명을 지르는 위장에 군침을 삼켰다.
...과일 정도는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느린 동작으로 사과를 받아들고는 한 입 베어물자, 턱이 덜덜 떨려왔다.
"...셔."
"그, 그 정도로 시셨어요?"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셨다.
그런 나를 보며 당황하던 성녀가 내 손에 들려있던 사과를 가져가서는 한 입 베어물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는게, 아무래도 그녀의 입에는 별 문제가 없는 듯 싶었다.
"읍, 으."
"자, 잠시만요! 물 좀 구해올게요!"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사라지는 성녀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옆에 딱 달라붙기로 하지 않았었나.
그래도 이 자리에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싶어 잠시 기다리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돌아다녀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윽. 미, 미안하지만ㅡ"
밀리고, 밀리고, 떠밀린다.
이 정도로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곧 죄악.
성녀를 기다릴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막상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있다면 저기 저 골목 정도 뿐인데...'
양아치들이 있는 곳에 갔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그렇게 사람들의 파도에 휩쓸려 발걸음이 닿는대로 걸어다니기 시작한다.
사람이 더 적은 곳으로, 내가 잠시 멈춰설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여긴."
하지만 사람이 적은 곳에는 그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만취한 인간들과, 그 인간들의 옆에 붙어있는 반나체의 여자들의 모습에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생각해보면 뭔가 골목 같이 음습한 곳을 통과한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만지시면 안 되는데~♥"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사랑을 속삭이고, 키스를 해댄다.
몸을 팔고 몸을 사는 이들이 뒤섞인 난잡한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서 빨리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 것 뿐이었다.
'...여기에 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고.'
나는 저 녀석들과 같은 창녀가 아니야.
조금 더 깊숙한 곳에서 관계를 나누고 있는 이들을 시야에 담아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귓가에서 속삭여오는 목소리가 너도 저들과 다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거기 이쁜 언니~♥"
그렇게 이 장소를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목소리.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꾸며진 간드러진 음성에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몸을 돌린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리 와서 저랑 좋은 시간을ㅡ"
"...아."
"켁..."
시선이 이어진다.
분홍빛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나를 보며 당황한 듯한 표정까지.
익숙할 정도로 자주 보았던 모습의 여자에, 반사적으로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마왕님?"
서큐버스, 할리벨.
용사의 꿈에 침입해 그 소꿉친구의 모습으로 그를 유혹하다가 결국 살해당하는, 초반 부근에 등장하는 캐릭터.
그래, 분명 죽었을 텐데...
그 캐릭터가 지금, 멀쩡히 살아서는 내 눈앞에 서있었다.
...그것도 몸을 파는 창녀가 되어서.
***
"어, 어, 어째서 여기에 계신 건가요?! 아니, 일단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그래."
반쯤 강제로 건물 안에 들여진다.
커다란 방에 커다란 침대 하나.
이불 위에 늘어붙어 있는 흰 정액자국을 보니 용사의 면상이 떠올라서 더 없이 불쾌해졌다.
"그보다, 대체 뿔은 어떻게 되신 거에요?"
"그냥, 이런 저런 사정이 있었다."
할리벨의 시선이 내 머리 위를 향했다.
경악 섞인 그 얼굴에 무어라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어물쩡 넘어가려고 했지만, 호들갑을 떠는 솜씨가 심상치 않아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그보다, 마왕님에게 남자 냄새가 나는데요."
"......"
하지만 다음 질문에는 정말로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문게 맞았다.
누가 서큐버스 아니랄까봐 남자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꼴이 아주 개 같았다.
"심지어 어디서 맡아봤던 것 같은ㅡ"
"..."
"설마, 용사?"
크게 뜨여졌던 눈동자가 더더욱 크게 뜨여졌다.
이제는 말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는 할리벨의 모습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수치스러워.
죽고 싶어.
어쩌다가 여기에 와서는...
"지셨어요?"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이딴 몸뚱이로 그 괴물 같은 새끼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나를 강간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니, 할리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뿔이 잘리고, 강제로 범해지기까지..."
할리벨의 눈꼬리에 작은 눈물이 맺혔다.
...그게 이 정도로 슬퍼해야 할 일일까.
아, 내가 마왕이니까 이딴 꼴이 된 나를 보고 다른 마족들이 슬퍼하는 건 당연할 일일지도 모르겠네.
'한 종족의 왕이 편할 때 쓰는 고기 인형으로 전락한거나 다름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기분이 절로 울적해졌다.
아니, 울적해질 뻔 했다.
상대가 짓고있는 가학적인 표정만 아니라면, 무어라 위로를 건넸을지도 모를 터였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묘한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러면, 지금 엄청나게 약해지셨겠네요?"
"...아."
싸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마족이란 힘을 숭상하는 종족.
자신보다 강한 자가 몰락한 꼴을 두고 볼 수 없는, 천성이 전투적인 종족이었다.
그건 다른 이들의 정기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서큐버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라서, 약해질대로 약해진 내 꼬라지를 그냥 둘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마왕님!"
"큭?!"
"상상만 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행운이 굴러들어올 줄이야♥"
강제로 찍어누르는 손길에 나는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정기를 빨아먹으며 강해지는 서큐버스가 사창가에서 지내고 있는데, 약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게 아닐까.
나를 내려다보는 분홍색의 눈동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잡아먹으려는 듯한 표정이잖아.'
붉은 입술 사이로 그것보다 더 붉은 색의 혀가 슬쩍 튀어나와서는 입가를 주욱 훑어내렸다.
끈적하게 늘어지는 투명한 선의 향연에, 나는 감히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츄릅♥ 아아, 맛있네요. 맛있어요, 마왕님♥"
"흣..."
할리벨의 혀가 내 목의 그 가느다란 곡선을 타고 주욱 솟아 올랐다.
세포 하나하나를 각성시키는 듯한 그 묘한 감각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신음을 참아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단탈리온도 음마였었지.
"이미 용사에게 엉망으로 따먹히셨으면서, 저한테만 박하게 구시는 건 아니죠?"
"...그만, 둬라."
"에에, 지금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시는 것 같은데..."
입술이 다가온다.
눈을, 코를, 뺨을, 턱을...
마치 탐색하듯이 찍어누르는 그 붉은색 뒤로, 마치 벌에라도 쏘인 듯한 뜨거움이 피부 아래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몸속에서 느껴지는 건 고통이 아닌 쾌락.
천천히 뇌를 녹여내려는 듯한 행동에 숨이 거칠어졌다.
"하, 흐아, 하♥"
"...흠."
그러다가도, 나와 눈을 마주친 할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보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랄까, 아무튼.
뜨거워진 몸에 겨우겨우 이성을 붙잡고 있자니 상대의 얼굴이 저 멀리 떨어져 나갔다.
'...도망쳐야, 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실천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