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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75화 (75/342)

Chapter 75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10)

자신을 두들기는 마왕의 손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평소에 사용하던 말투조차 집어던지고 엉엉 우는 그녀는 뭐랄까,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존재하던 마왕의 모습과는 꽤 차이가 있었다.

내 눈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마왕이라고?

그럴 리가.

"나, 나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흑, 그런데, 못 하겠어어......"

너 따위한테 절대 흥분 못 해.

절대로 못 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차라리 처음부터 잘 해줬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거 아니야.

"아리엘..."

"이름으로 부르지, 킁, 마라. 그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네 소꿉친구와 겹쳐 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정곡이었다.

상대를 아리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덮어씌워져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보지 않았다.

그래서, 범하지 않았다.

"...차라리 다른 놈이랑 하는 편이 낫겠어."

"그건 안 돼!!"

힘 없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리는 마왕에, 반사적으로 외친다.

얼마나 큰 소리던지 방 안에 메아리가 칠 정도였다.

그 소리 때문에 놀란 건지, 아니면 제가 한 부정 때문인지 마왕의 눈동자가 크게 떠져있었다.

"왜 안되는데?"

"너, 말투를ㅡ 아니, 아니다."

"왜 안되는데?"

제 옷깃을 죽죽 잡아당기며 해오는 행동 하나하나가 유혹적이라, 그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상 말을 했다가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

...이건 전부 이 녀석이 잘못한 거야.

"윽?! 가, 갑자기 누, 누르지 말거라!"

괜히 신경질이 나서 그 새까만 정수리를 꾹 짓누르니 화들짝 놀라서는 몸을 덜덜 떨어댄다.

아, 하는 찰나 멀어진 부드러운 신체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잠시, 제 얼굴을 쓸어내린 마왕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이번 건, 내가 잘못했구나."

"..."

"내가 잠시 미쳤었지."

스스로의 목을 조를 정도의 짙은 자괴감이 용사의 목덜미 또한 슬슬 감싸왔다.

분명, 상대와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거겠지.

마왕을 따라 한숨을 내뱉은 용사가 밖으로 꺼내져 있던 제 좆을 다시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라앉지를 않잖아...'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혼자 처리를 라고 자야할 듯 싶었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네 앞에 좋은게 있는데 왜 사용하지 않느냐고 속삭였지만, 그 정도 말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

"...갑자기 왜?"

제 앞으로 내밀어진 새하얀 손바닥에 용사가 표정을 굳혔다.

무언가를 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뭘?

머릿속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마왕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손 좀 다오."

반쯤 억지로 뿔을 건네받던 기억이 있어서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런 것까지 거절할 정도로 야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일에 대한 죄책감에서 나오는 행동일지도 몰랐지만서도.

"크구나."

'아서의 손은, 엄청 크구나.'

"..."

상념을 털어낸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진짜 같은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겹쳐 보지 마.

마왕과 아리엘은 다른 사람이야.

괜히 이상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자, 그러면ㅡ"

"너..."

"...어때, 마왕성에 있을 때의 생각도 나고 좋지 않느냐?"

제 손을 가져간 마왕이 한 행동은, 다름 아닌 본인의 목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용사는 이를 악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좌책감이라도 느끼기를 바라는 거야? 그때 일을 계속해서 곱씹으면서?"

이런 식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이미 용사는 제 말대로 매일마다 마왕성에서의 일을 곱씹으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 끝이 마왕을 향한 의심과 제 소꿉친구의 부활을 위한 집착으로 마무리 된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은 절대 거짓이 아닐 터였다.

그렇기에 말이 뾰족하게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내뱉고 난 뒤의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었지만, 후회를 하더라도 말을 물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부정이었다.

어째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왕의 모습에, 용사의 팔이 잘게 떨려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대의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하자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밖에 없었다.

"목을 졸라도 기분이 좋을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망가져야 할까, 궁금해서 그랬다."

"너ㅡ"

"자, 한 번 다시 해 다오."

일말의 여지조차 없었다.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본인 앞에 있는게 진짜 자신이 아니라는 듯 행동하는 마왕에 용사가 그 가녀린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변하지 않았다.

마왕과 용사의 관계는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더욱 파국을 향해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지? 언제는 그렇게 즐거운 듯이 하더니만..."

벌겋게 달아오른 손을 쓰다듬던 마왕이, 물기 섞인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렸다.

아파서 그런거겠지.

그냥 아파서, 정신이 없어서 되는대로 말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변하지 않은 걸 알고 있잖아.'

자신을 향한 증오나 분노가 약해진게 아니었다.

그녀가 이토록 편하게 말을 하고, 거리낌이 없어진 건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기 때문이라고 착각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 했기 때문에 걱정이 없어졌다고 봐도 되겠지.

지금도 마찬가지로 본인이 목을 졸려도, 혹여 폭력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무서운거 아니었어?"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었더랬다.

하지만 지금의 생기 하나 없는 눈동자에서는 두려움 따위는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무섭지. 너라면 안 무섭겠느냐?"

아하하, 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토해내던 마왕이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마치 흥이 깨버져버렸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다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 밖을 나서는 그 뒷모습을 용사는 감히 붙잡지 못했다.

***

열이 떨어지지를 않으니, 뇌가 흐물흐물하게 녹아서 제대로 사고가 되지를 않았다.

이대로라면 머리가 불타서 죽어버리지 않을까.

낮은 체온이 이토록 뜨겁게 달아올랐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 하나 내가 위험한 상태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듯 싶었다.

...아니면 관심이 없다던지.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아니,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데?

다른 녀석들도 았잖아.

나만 게임을 한 것도 아니고, 나보다 더 많이 한 녀석들도 있을 텐데 왜 굳이 나인데?

내가 유일하게 해피 엔딩을 봐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궁금하세요?"

복도에 주저앉아서 하염 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말투나 분위기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라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임에도 경각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설마.

"제 귀여운 성녀가 당신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지 뭐에요? 최근에는 저를 찾지도 않아서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윽."

여신의 손길이 내 뺨에 닿았다.

저릿할 정도로 기분 나쁜 감촉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나타난 거야.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

지금도 이렇게나 불행해 죽을 것 같은데, 또 나타나야 할 이유가 대체 뭐냔 말이야...

"억울하시죠? 왜 당신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미치도록 궁금하죠?"

"..."

"후후..."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이 복도 너머로 퍼져나갔다.

뭐가 그렇게 좋아.

내가 이렇게 망가진 꼴이?

아니면, 앞으로 더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 얼굴에 대고 외치기에는, 이미 몸과 정신이 전부 지쳐버렸다.

'...그냥 빨리 끝내고 사라져줬으면.'

신성력으로 인해 느껴질 고통을 상상하며 힘을 풀었다.

하려면 어서 해. 뜸 들이지 말고.

하지만 상대는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는 존재였다.

이를 테면, 그래.

신체의 고통을 각오한 나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가한다던지 하는 것들.

"그러게 왜 혼자 보겠다는 선택지를 선택하셨어요."

"...뭐?"

"모두 같이 보겠다는 선택지를 고르셨으면, 굳이 혼자서만 고통 받지 않아도 되셨을 텐데."

키득키득 웃어보이는 얼굴이, 이리도 끔찍할 수 있을까.

여신의 가죽을 뒤집어 쓴 악마가 나에게 속삭였다.

결국 이건 전부 네 탓이라고.

그러게, 모두와 나눈다는 좋은 선택지를 고르셨으면 얼마나 좋아요?

혹시 몰라. 다 같이 봤다, 라는 선택지를 골랐다면 낳아야 할 아이의 숫자도 그만큼 줄어들지 말이에요.

"그랬다면, 그 증오하는 용사와 붙어있을 시간도 줄어들었을 텐데."

그리고, 당신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도 그만큼 단축되었겠죠.

...턱이 덜덜 떨려왔다.

무어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극도로 절망한 몸뚱이는 단 한 조각의 목소리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바보.

멍청이.

머저리 같은 놈.

깔깔 웃고, 낄낄 비웃고, 하하, 하며 폭소한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다른 이들의 놀림이 내 정신을 마구잡이로 난도질 해댔다.

"아니, 야."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발작적으로 목을 긁어내린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는, 울부짖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 하지 마.

"뭐가 아닌데요? 어차피 뭘 고르던 똑같은 꼴이 되었을 텐데."

성녀의 몸을 차지한 여신이, 입꼬리를 주욱 찢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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