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15)
할리벨에게 있어서 창관이란 저를 가두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일마다 약에 절여져, 인간들에게 범해지는 삶을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처음에는 알아서 정기를 바치는 멍청한 것들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채 한 달도 이어지지 않은 한심한 생각이었지만.
"어이, 할리벨!"
"...부, 부르셨나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인간 따위의 목소리에 이렇게 겁이나 먹다니, 한심하잖아.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옷을 끄집어 내려 팔에 난 주사자국을 가려냈다.
"너, 팔렸다."
"......네?"
문 밖으로 나가자마다 들려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팔렸다니, 누가?
내가?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고 있다가, 등을 떠미는 손길에 머뭇머뭇 걸음을 옮겼다.
"자기~ 잠시 시간 어때?"
"아앙, 거기는 안되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아양 섞인 목소리들을 지나친다.
이 골목을 나가면, 자신을 구매한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부디 이곳에서 겪었던 것보다는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설마 고문이라도 당하는 건 아닌 걸까."
몸이 덜덜 떨려왔다.
언젠가의 기억.
용사에게 패배하고 큰 상처를 입어서 죽어가고 있던 그때 만났던 인간들.
그 인간들에게 붙잡혀서는 온종일 갖은 고문들을 당했더랬지.
"..."
하지만 선택지가 없어.
물건이 되어 팔린 이상, 도망치는 것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인간들의 손길이 닿는대로 휩쓸리는 것 뿐.
'누구일까, 나를 산 건.'
내가 마족이라는 것을ㅡ 그리고 서큐버스인 것을 알고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지.
어쩌면 성욕 처리를 위해 사겠다고 한 것일지도 몰랐다.
서큐버스의 육신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명기나 다름 없을 테니까.
'성격 나쁜 인간의 손에 들어가는 건 질색인데.'
지금까지 여러 인간들을 거쳐왔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나 더 끔찍한 부류들이 있었다.
목에 줄을 연결해서 대낮에 알몸으로 기어다니게 하는 녀석들이나, 제 친구들을 불러서 집단으로 범하는 녀석들.
아무리 섹스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능욕 당하는 것만큼은 질색이었다.
"할리벨."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은 전부 헛수고였다.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할리벨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설마.
"......마왕, 님?"
떨리는 목소리를 차마 숨길 수가 없었다.
꿈은 아니겠지?
멍청히 제 볼을 꼬집자,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잖아.
"설마, 저를 사신 건가요?"
제 물음에 마왕님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현실감이 들어, 속에서부터 눈물이 잔뜩 차올랐다.
"...감사,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천천히 뻗어진 손이 그녀의 정수리를 톡톡 두들겼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는 듯한 행동에, 할리벨은 결국 눈물을 참아내지 못했다.
정말 감사해요. 정말, 정말로ㅡ
"자, 가자."
몸을 돌리는 상대의 등 뒤를 따라 걷는다.
어두운 골목 너머로 하얗게 빛나는 넓은 세상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감격스러운 기분에 무어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건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무슨 돈으로 저를 사신거에요? 저, 엄청나게 비싼 몸이라서 쉽지 않으셨을 텐데~"
마왕의 팔에 꼭 달라붙은 할리벨이 제 정수리로 상대의 뺨을 꾹꾹 눌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그저 기분 좋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
"...그래서, 기껏 사온게 '이거'라고?"
태연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속에서 천불이 솟는 듯 싶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할리벨을 그곳에서 꺼내올 수 있게 도와주었으니 지금은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가는게 맞았다.
"뭐, 뿔이 있으니까 대충 쓸만하기는 하겠네."
집요할 정도로 할리벨의 머리 위에 난 뿔을 바라보는 마법사의 모습에 이를 악문다.
저 미친 마법사의 눈에는 그녀가 하나의 마법 재료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
...아니면, 그저 화풀이 상대라던가.
"...저 미친 년은 누구에요, 마왕님?"
그런 마법사를 보며 할리벨이 작게 속삭여왔다.
진심으로 동의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으면 어쩔까 싶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그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해질 수도 있고.
"그것의 무례 정도는 눈 감아줄 수 있어. 네가 나와 한 맹세를 지키기만 한다면 말이야."
맹세.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미친 마법사의 스승을 낳겠다는 그 맹세.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리벨의 팔을 잡아 이끌며, 그대로 방 밖으로 빠져나온다.
저곳에 계속 있었더라면 저 미친 년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맹세라니, 무슨 맹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따지듯이 물어오는 할리벨에 어물어물 답했다.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라서, 마법사가 했던 말에 의문을 가지는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났다.
"저 때문에 마왕님이 손해보실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해를 보는게 아니야.
오히려, 그 정도의 대가로 너를 구할 수 있었으니 이득이라고 볼 수 있겠지.
'어차피, 아기는 전부 낳기로 결심했으니까...'
따지고 보자면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엘리와 할리벨을 구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리엘 씨, 오늘은 어디에 다녀오셨ㅡ"
"..."
"아."
그렇게 내가 지내는 방으로 향하던 찰나, 엘리와 딱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내 팔뚝을 붙잡고 딱 달라붙어 있는 할리벨의 모습에 엘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호, 혹시 아리엘 씨의 친구 분이신가요?"
엘리 쪽에서는 할리벨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할리벨 쪽에서는 그녀를 알고 있는 듯 싶었다.
확실히, 용사의 꿈에서만 나타났었으니 엘리가 모를 법도 했다.
"친구는 아니에요."
"그, 그러면..."
"친구보다 훨씬 더 찐ㅡ 한 사이라고나 할까요~♥"
마족들은 하나 같이 성격이 나쁘다고 했었지.
엘리를 놀릴 기회를 포착한 할리벨이 제 몸을 더더욱 밀착시켜오며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상대를 자극해서 어쩌자는 거야, 대체.
실시간으로 미소를 잃어가는 엘리의 모습에 할리벨의 정수리라도 때려주려고 했지만, 들어올린 손마저도 잡아채는 손길에 결국 포기해버렸다.
"그렇죠, 마왕님?"
"...장난은 거기까지 하거라."
손깍지를 껴오는 것을 꾹 잡아 내리고는 방 안으로 밀어넣는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눕는 모습이 참 뭐랄까...
개같았다. 여러 의미로.
"자, 이리로 오세요. 마왕님♥"
저랑, 기분 좋은거 해요♥
숨겨져 있던 뿔과 날개, 그리고 꼬리가 드러난다.
끝부분이 하트 모양으로 맺어진 꼬리가 살랑거리며 날 유혹해 왔다.
"마, 마족?!"
"...하아."
방 안으로 들어온 엘리가 그런 할리벨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신감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다행히 오해는 생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난은 이제 그만 하거라."
"꺅?!"
정수리에 주먹을 쥐어박으니 양손으로 맞은 부위를 꼭꼭 감싼다.
어차피 별로 아프지도 않르면서 엄살 부리기는.
쯧쯧 혀를 차내면서도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엘리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여기는 할리벨. 내 부하 직원이었던 마족이다. 그리고 이쪽은 엘리. 그러니까, 음."
내 친구다.
그 한마디에 어둡던 표정이 밝게 물들었다.
"맞아요! 제가 아리엘 씨의 친구라구요!"
이번에는 엘리가 내 팔뚝이 달라붙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할리벨의 눈빛이 매서워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위협적인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는 성격이 꽤나 안 좋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용사의 꿈에 나타나 그를 농락하고, 다른 남자들을 덮치며 정기를 착취하던 사디스트 서큐버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냥 명절에 놀러온 사촌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뭐,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이겠지만서도.
"저는 마왕님께 단 하나 뿐인! 노예라고요!"
"노, 노예라니 그게 무슨ㅡ"
"이거 보이세요?"
할리벨이 제 목에 걸려있는 초커를 콕콕 건들었다.
가죽으로 된 그것은 보는 사람이 답답해질 정도로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는데, 당사자는 별로 아무렇지 않은 듯 싶었다.
...그보다, 노예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차피 이제는 마왕군도 없겠다, 저희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노예로 받아주시면 되잖아요!
마왕님의 사랑의 노예♥ 라던지!
"그, 그건 제가 용납 못해요!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니... 그것도, 아리엘 씨의 사랑이라니!"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뒤통수가 저려왔다.
죽자살자 싸우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이 이상으로 저 꼴을 보고 있다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아서 스리슬쩍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래, 저 정도면 둘이 알아서 잘 친해질 수 있겠지.
"마왕."
"...용사."
그렇게 잠시 마실이라도 나갈까 싶어 복도를 지나는데, 건너편에서 용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껄끄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저 얼굴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늘은, 잘 지냈어?"
"..."
하지만, 그럼에도 이 분노를 토해내지 않는 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