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3 - 사랑하는 나의 스승님.(3)
...악몽을 꿔버렸다.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끔찍한 꿈.
칼날에 베이고, 용사에게 범해지고, 마법사에게 구타 당하는 그런ㅡ
"흑, 흐아..."
갑작스러운 진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를 붙잡으니, 어두운 공간이 나를 붙잡아왔다.
'...싫어.'
어두운 장소는 질색이었다.
두 눈을 틀어쥐는 흑색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데?
대체 왜?
"깨어났구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근한 듯 다가오지만, 실상은 그 안에 그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텅 빈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붉은색의 눈동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 나를 대체 어디로 데려온 게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마법사가 손가락을 튕기니, 방 안이 밝게 물들었다.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그러게 그 둘을 왜 내보냈어.
그러게 왜 잠들었어.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괜찮아, 아무짓도 하지 않으니까."
"힉..."
차가운 손길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상대의 눈동자에 내 모습 따위는 단 한 조각도 그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는 내가 아닌 내 뱃속에 있는 아기를 보고 있었다.
그 단순한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이 미친 년에게 아기를 맡겼다가는ㅡ'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만약 저 미친 마법사의 스승이 맞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아니, 상식적으로 따지자면 아닐 확률이 더 높겠지.
무려 1/999,999 의 확률이었으니까!
"아아, 언제 태어나려나..."
오늘? 내일? 그것도 아니라면, 모래?
황홀함으로 짙게 물든 미소가 이토록 끔찍하게 보일 수가 있을까.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본 것처럼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꼭 그런 것 뿐만이 아니라...'
"...윽."
하복부 쪽에, 다시 한 번 고통이 내달렸다.
...설마.
축축한 것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니, 투명한 액체가 졸졸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 으으..."
눈에 담자마자 느껴지는 격통에 고개가 절로 들렸다.
나오는 것 정도는 쉽게 나와도 되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건데?
아기가 내 뱃속의 내장들을 틀어쥐고 버티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태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아아, 드디어... 드디어!"
"흐, 하아아아아악......"
이미 지칠대로 지친 몸뚱이는 비명을 지를 여력까지 없애버렸다.
힘 없이 쏟아지는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배에 힘을 주고 있는 건 거의 본능의 영역이겠지.
'제발, 제발 나와줘...'
하지만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일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힘을 주면, 더 큰 힘으로 버틴다.
앞선 두 번의 출산보다도 고통스러운 경험에 당장 배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조금 더 힘을 주란 말이야, 응?!"
"이, 이게 최대..."
순간 느껴지는 탈력감에 팔다리가 곤두박칠쳤다.
여전히 느껴지는 고통에 전신이 덜덜 떨려왔지만, 이 몸뚱이는 이미 한계에 달한지 오래인 듯 싶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어, 버려.
"아, 아아아아아..."
제발, 그만 괴롭혀 줘.
이제 그만 나와달란 말이야.
아파, 아파, 아파...
"힘을 주라고!!"
"...윽."
마법사의 외침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마지막 한 조각만 남은 기력을 전부 들이부어, 온 신경을 하복부에 집중했다.
하지만 모자랐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아기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헉, 허억, 흐..."
바닥에 대자로 뻗어서는 거칠게 숨을 토해낸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낳겠다고 했잖아.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매일마다 꿈에 나타나서 나를 괴롭혔으면서, 이제는 태어나면서까지 괴롭히겠다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불쑥 튀어나온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스로가 아닌 뱃속의 아기를 향하는 악의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아기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대체 왜?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튀어나온 배를 감싸며 애원했다.
아니, 울부짖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궁을 떼어내서 마법사에게 건네주고만 싶었다.
"빨리 안 낳으면 아기가, 스승님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흑?!"
멱살을 붙잡힌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표독스러운 눈빛.
그것이 나를 향함과 동시에, 짙은 악의를 담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검게 물들였다.
"당장 낳지 않으면, 네가 데려온 마족 년을 죽여버릴 거야."
뿔을 잘라서 마법 재료로 쓰고, 날개를 찢어서 방을 장식하고, 꼬리를 뽑아서 사역마의 간식으로 줄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남은 몸뚱이는 원래 있던 곳에다가 던져버릴 거야.
"아, 알겠으니까... 제발..."
그런 말은, 이제 그만 해.
"흐, 흐으으으으으..."
비명을 지를 힘도 아까워 꾹 씹어삼킨다.
남아있는 힘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전신의 힘을 전부 하복부 쪽에 집중했다.
점점 감각이 희미해지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힘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이제는 나와줘.'
팔부터 시작해서 다리.
점점 심장 쪽으로 향하는 탈력감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이 일었다.
쿵, 쿵 하고 힘차게 뛰던 심장의 박동이 점점 느려지고, 동시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죽는다.
이대로 계속 힘을 주다가는, 죽어버릴 거야.
'아, 아...'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머리에 피가 돌지 않아 시야가 점점 깜빡이기 시작했지만, 내 몸 속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본능이 뱃속의 아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제발 나와, 줘.
희미하게 느껴지는 감각 속에서, 아기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
"마왕, 몸은 괜찮ㅡ 마왕?"
방 안에 있는 건 오로지 정적 뿐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주변 공기와 함께 치솟는 불안감에 용사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간 거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했었더랬다.
설사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혼자 다니지는 못할 텐데.
방 안을 빠르게 훑은 용사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쩌면, 엘리의 방에 있을지도 몰라.
"엘리 혹시ㅡ"
"용사님!!"
그렇게 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등 뒤에서 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다가온 그녀가, 그대로 용사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아, 아리엘 씨가... 사라졌어요."
그제서야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마왕이, 그녀가 사라졌다고.
대체 어디로 갔는지 예측이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빠져나간 거지?'
평소에는 엘리와 마족 하나가 붙어있어서 그럴 틈이 없을 터였다.
만약 빠져나간다고 한다면 모두가 잠든 밤에나 가능할 텐데, 그 시간대에는 용사가 깨어있었으니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 움직인게 아닐 수도 있어.
"납치라도 당한거면 어떻게 하죠? 그, 그렇지 않아도 몸이 엄청나게 약해졌는데, 조금이라도 무리를 했다가는 큰일날지도 모른다고요!!"
"잠시만,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내일이면 돌아오겠지, 같은 안일한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들지도 않았다.
절대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던 그 말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차라리 그때 대답을 했었어야 했어.
대답을 하고, 계속해서 옆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겠지.
'차라리 도망쳤다면.'
그랬다면, 안심할 수 있었을까.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마왕에게 있어서 고통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피해 도망쳤다면 오히려 찾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 편이 더 도움이 됐을 테니까.
"레이나 씨랑 에밀리는?"
"......두 사람 다 안보여요."
용사의 질문에 엘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가장 불안하던 두 사람 또한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다.
누구지?
의심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 하나의 확신으로 자라났다.
분명, 둘 중 하나가 범인이야.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일단, 마을을 둘러보면서 찾아보자."
"...할리벨 씨를 불러올게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여관을 빠져나오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디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시선을 움직인다.
검은색의 흔적이 보일 때마다 흠칫거리며 놀라는게, 아무래도 정말 미친 것 같았다.
'그런 짓을 해놓고서는,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찾는다고?'
아리엘ㅡ 제 소꿉친구의 부활을 위해서, 같은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복잡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만약 그것 때문에라면 레이나 씨나 에밀리를 의심하는게 아니라, 마왕이 도망쳤다고 믿었을 터였다.
나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을까.
왜 마왕이 도망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던 거지?
'나를 떠나지 마.'
그 표정.
그 목소리.
자신이 듣고, 보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렇기에 그녀가 한 말 또한 진실된 것이라는 것을, 그 순간부터 깨닫고 있었다.
"아리엘..."
그렇기 때문에 찾아야만 했다.
더 이상 그녀가 고통 받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껏 본인 때문에 힘들었으니, 이제는 그녀의 고통을 제 손으로 덜어줘야만 했다.
"제발, 무사해줘."
하지만, 그는 알까.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움직이는 기준이 소꿉친구가 아닌 마왕이 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