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3 - 진실에 대하여.(5)
"당신이 용사를 사랑한다면 뭔가 바뀔 줄 아셨나요?"
분명 꿈일 텐데, 너무도 선명했다.
여신이 비웃는 그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귀에 남아, 내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그건 과연 꿈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여신이 내 꿈에 나타난 것이었을까.
"...으, 으으."
매일 밤을 두려움으로 보냈다.
잊고 있었던 공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신, 그 증오스러운 이름 덕분에 단 하루도 편히 잘 날이 없었다.
대체 왜야.
대체, 왜지?
"아리엘 씨, 괜찮으세요?"
"흣, 으, 응... 괘, 괜찮다."
엘리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렸다.
분명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저기에서 여신이 튀어나올 거야.
튀어나와서, 또 내 몸을 신성력으로 찔러대겠지.
"미안하구나, 엘리. 지금은 잠시만, 방에서 나가다오."
"...네, 아리엘 씨."
무엇 때문일까.
대체 이유가 뭘까.
할리벨이 나를 치료하기 위해서 마석이라는 물건을 사용했다고 했지.
그게 문제였다면?
마석이라는 물건의 힘을 사용해서, 여신이 손을 쓴 것이라고 한다면?
"흐, 웃기지도 않는구나..."
어떻게 치료를 하던지, 어떤 방식이로든 여신이 손을 썼을 터였다.
차라리 죽는 편이 그 빌어먹을 신의 손아귀에서 벗아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겠지.
하지만 그것 또한 불가능했다.
"마마!"
"...그래."
문이 열리고, 쌍둥이들이 뛰어들어왔다.
분명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린이 들여보낸 모양이었다.
언제나 내가 울적해질 때 쯤이면 린은 저 아이들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활발하고 정신 없는게, 울적한 마음을 잊기에는 딱이었다.
"마마! 오늘도 린 언니가 마법 보여줬어~"
"막막! 꽃잎이 날아다녔어!"
내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기는 아이들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떤 무거운 생각도, 아이들의 미소를 본다면 전부 사라졌다.
비록 그것이 잠시 뿐인 현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 남은 행복은 이것 뿐이니까.
"그래, 그래. 오늘도 재미있었구나."
포근포근한 정수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손길에 맞춰서 귀가 이리저리 움직이는게 상당히 귀여웠다.
행복해.
분명 행복한데, 속에서 꿈틀거리는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벨.'
새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 수인을 떠올렸다.
마수에게서 아이들을 지켜려다가 쓰러진 아이.
살았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팔이 덜덜 떨려왔다.
'이런 생각은 그만 하자.'
누가 죽었니 살았니 생각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레이나, 마법사, 벨과 용사, 그리고 할리벨까지.
죽음에 연관된 이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벨은 살아있을까.
용사가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할리벨은, 과연 깨어날 수 있는 걸까.
"할리벨..."
내가 겪은 고통이 최고라고만 생각했었다.
피를 토하고, 정신을 놓아버렸던 그 순간.
그에 비해서 할리벨은 피도 토하지 않았던 터라 나보다 훨씬 괜찮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진 뒤로부터 지금까지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마마, 안아줘! 안아줘!"
"나도, 나도!!"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을게 분명했다.
그마저도 너무 희미해서 귀를 가져다대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였지만.
안아달라며 엉겨붙은 아이들을 들어올리고는 그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이 특유의 분내가 머릿속을 가득 물들였다.
'...조금은 안심되는 기분이야.'
여전히 마음속은 여러 겹의 불안으로 뒤덮혀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래, 아이들 앞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아직은 짧은 꼬리가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너희, 내가 방에는 들어가지말라고 그렇게나ㅡ"
"..."
"..."
그러고 보니, 꼬리가 있는 아이가 하나 더 있었구나.
내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는 미코의 모습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여신의 힘을 이용해서 나를 괴롭히던 녀석.
저 녀석만 아니었다면 할리벨이 마석을 사용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리 오거라."
하지만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로 변해서 그러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나라는 인간은 어린 아이의 모습이라면 전부 용서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때,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몸이 작아진 미코는 언제나 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저보다 큰 사람을 앞에 두면 때리지 말아달라며 귀를 납작하게 눕히고는 했다.
어렸을 때 학대를 당했다거나 그랬으려나.
만약 그렇다면 조금은 불쌍할 것 같기도 했다.
"으, 으으으..."
금색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아기들의 것과는 느낌이 달라서 그런지 질리지는 않았다.
내 손길에 맞춰서 귀가 섰다 누웠다 하는게 꽤 볼만했다.
"아직까지 미안해 라고 있는거라면, 그럴 필요는 없다. 애초에 마족이 잘못한게 맞았으니까."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해도, 같은 마족이 한 짓이다.
그것이 비록 말 뿐이라고는 해도, 누군가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다.
"내 동족들이 죽인 네 동족들은, 내가 전부 낳으마."
그 증거로 벨의 부모님이 내 품에 안겨 있었으니 그녀도 안심할 수 있겠지.
아이들은 내 품이 포근했는지, 아니면 하루 종일 뛰어다녀서 지쳤는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깨어있을 때도 그렇지만, 잠들어 있으니까 더 천사 같구나.
"정말이지, 내가 알던 마족이 맞는지..."
"..."
미코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자신이 봐왔던 마족들과 내 차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고민해도 소용 없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마족들과 내가 다른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정신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마족의 신체에 마족의 영혼을 가진 그들과 마족의 몸에 인간의 정신을 가진 내가 서로 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고민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
"요, 용사님 여기는 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백작이었나 남작이었나.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눈앞의 인간이 세계를 배신하고 마족들의 편에 서려고 했다는 것 뿐.
"이, 일단 말씀 좀 나눠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용사님을 위해 준비한 만찬이 있습니다만!"
이런 세상에서도 만찬을 찾고, 만찬을 즐긴다.
역겹기 그지없구나.
그가 마족들에게 인간들의 정보를 팔아먹으려 했음에도 살아남은 건 전부 금과 돈 덕분이었다.
오해가 있었다. 그는 인간들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
그때의 나는 그 공문을 순수하게 믿었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눈앞의 이 남자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나, 나를 지켜라! 저 녀석이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 빨리! 막으라고!"
귀족의 옆에 서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기사라는 존재는 정의를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 아니었던가?
세상이 바뀌면 사상이 바뀐다고, 이제 그들의 정의는 금과 돈이 된 듯 싶었다.
어렸을 때의 꿈이 저런 것들이었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그래, 둘러싸서 죽여! 둘러싸서 죽여버려! 아무리 용사라고는 해도 수는 하나니까! 그래, 그래, 그래!!"
"...하."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저 녀석은.
언제나 전사들의 등 뒤에 숨어있어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나로도 인간 여럿을 상대할 수 있는 마족들을 도륙내던 자신이다.
자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저 숫자를 상대로 지지 않을 것이란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비, 비웃어? 감히 나를!"
"...웃기지도 않아."
이런 놈들에게 세계는 배신 당했는가.
이런 놈들의 손에 마족들이 소환 되었는가.
겨우 이딴 놈들 때문에 아리엘이ㅡ
"뭐, 뭣들 하는 거야! 상대는 하나잖아! 이, 이런 무능한 새끼들 같으니라고! 이 쓰레기 자식들!"
사람을 죽이는 감각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라면.
그것으로 다른 이들의 넋을 기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다.
"..."
"거,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내, 내 기사들이 이렇게나 쉽게 당할 리가 없ㅡ"
"다른 녀석들은 누구지?"
"......뭐?"
다른 녀석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세계를 배신한 배신자들.
마족들을 소환한 빌어먹을 악의 종자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의 무리들.
"나는 몰라! 그런 것 따위 저, 절대 모른다고! 나는 그저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야!"
성검에 묻은 핏자국이 붉게 빛났다.
얼굴이 희게 질려서는 바닥을 나뒹구는 귀족의 모습에 표정을 굳혔다.
아무것도 모를 리가.
뭐라도 알고 있으니 배신할 준비를 했겠지.
그 대가가 겨우 돈 따위라고 해도, 무언가 정보가 있었기에 그러려고 한거겠지.
"끄아아아아악?!?!!!"
칼날이 팔을 찔렀다.
마치 두부를 찌르듯 들어간 칼날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다시 뽑혀져 나왔다.
앞으로 팔 하나에 다리 둘.
네 개의 팔다리에 전부 구멍을 뚫은 뒤에는 머리가 목표가 될 터였다.
"나는 몰라, 나를 모른다고! 나는 몰ㅡ"
"아니, 너는 알고 있어."
나한테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용사의 검이 서늘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