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5 - 진실에 대하여.(7)
모닥불 앞에 말 없이 앉아, 불쏘시개로 뜨겁게 달아오른 장작을 쑤셔댄다.
반대쪽애 앉은 마족은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건 인간에게 당했다는 증오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에게 구원을 바랬다는 수치심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결국 인간에게 구원 받았다는 현실 때문일까.
"...구해줘서, 고마워."
자그맣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무어라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비는 어디까지 내리는 것이 좋을까.
인간을 죽이지 않았다면 살려둔다.
하지만, 단 하나라도 죽였다면 죽는 것이 맞았다.
"인간을 죽였나?"
"..."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상대의 눈동자가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나를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있는지 몸에 힘을 주고 있지는 않았다.
"몇이나 죽였지?"
"...셋."
셋.
하나가 셋을 죽였다라.
달아오른 불쏘시개가 용사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셋의 목숨을 거둔 이가 겨우 하나의 목숨으로 끝나는게 과연 맞는 일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죽였지?"
"...그건."
그렇기에 이유를 물었다.
분명 눈앞의 마족은 인간을 죽인 살인자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용사는 그 이유를 듣고자 했다.
어쩌면 그건 작은 희망이기도 했다.
마족이 마냥 극악무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희망.
"마족 어린아이를 제물로 쓰려고 했어."
"..."
"나머지 둘은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죽였고."
제 손을 내려다 보던 마족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죽인 인간들의 얼굴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꼴보기 싫어서 죽였다라.
그 이유 뿐이라면 확실히 극악무도한 존재가 맞았지만, 앞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너희 마족은, 어린아이를 짐이라고 생각하잖나. 그런데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인간을 죽였다고?"
"...보통은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의 질문을 들은 마족이 깊은 숨을 토해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라...
보통이라면 곧바로 목을 쳤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인간들이 서로 성향이 다른 것처럼, 마족들 또한 성향이 달랐다면?
인간들 중에서도 마족에 맞서 싸우는 존재가 있고, 마족의 편에 서 인간들을 배신하는 존재가 있었다.
만약 눈앞의 마족이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그래서 인간을 죽였다면?
"이름이 어떻게 되지?"
마족에게 이름을 물은 건 처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리엘이 처음이었지만, 그녀를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름을 물은 것에는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단지 그 뿐인 이야기였다.
"...엘리."
"..."
지독한 우연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와는 하나도 닮지 않은 마족이었지만, 이름 하나만은 같았다.
우습구나.
정말, 우스워.
"그 목걸이는 주인이 내린 명령을 끝까지 따르게 만든다고 했었지."
"...!!"
이 결정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외에는 떠오르지가 않았다.
몸을 움찔거리는 마족의 모습이 조금이지만 애처롭게 보였다.
내가 본인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앞으로 너는 인간 둘을 살린 뒤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거야."
어줍잖은 배려가 아니었다.
마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내리는 이기적인 자비가 아니었다.
분명 그녀에게는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 될 터였다.
그토록 증오하고, 동시에 자신이 죽였던 인간을 제 손으로 살려야 하는 형벌.
"차라리, 차라리 죽여라! 역겨운 인간 녀석들을 내 손으로 살릴 바에는 차라리ㅡ"
"그런 것 치고는 인간의 손에 구해지지 않았나?"
인간들도, 마족들도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인간이란 하나의 개체가 아니었다.
무수한 개체가 모여 이루고 있는 군집이었지.
마족이 이 세계에 나타나기 전에는 세상이 평화로웠는가?
절대 아니었다.
마족이 없었을 무렵에도 전쟁은 일어났고, 사람이 죽었다.
마족이라는 적에 대항에 하나로 뭉쳤을 뿐이지, 결국 그들이 아니었어도 세상은 혼란했을 터였다.
"네가 인간 둘의 목숨을 구한 뒤에 갈 곳은 여기야."
지도에 찍혀진 검은색 점을 가리킨다.
숲 한 가운데에 그려진 문양을 본 마족이 표정을 찡그렸다.
내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애초에 이해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목적이 뭐냐, 인간. 너 같은 인간이 나를 살려둘 리가 없잖아."
"목적, 목적이라..."
용사의 눈이 검게 빛났다.
진득한 복수심으로 채워진 그의 눈동자는,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베어낼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목적이라고 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복수."
나를 이렇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복수.
***
악몽은 지성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질병이었다.
괴로운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꿈을 택했는데 그곳에서조차 고통 받다니,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할리벨."
희게 물든 손을 붙잡았다.
방금 전까지 눈을 뜨고 있던게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그녀는 두 눈을 굳게 감고 있었다.
나를 살리려고 하지 않아도 좋았는데.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대체, 왜."
'제 목숨이 위험해도, 저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마왕님께서 힘든 건, 싫으니까.'
귓가에서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양,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러려고 했어.
정말 네가 죽음에 가까워진다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서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했다고.
"그러면 내가, 이대로 너를 죽게 두란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할리벨을 본 건 게임 속 스크립트에서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그녀를 생각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그래.
내가 처음으로 구한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구한 목숨이었으니까.
"할리벨..."
어쩌면 미련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소유욕 때문일지도 모르지.
새하얀 목덜미에 매달린 초커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목구멍에 걸리는 슬픔이 곧 있으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끼익ㅡ
"..."
"..."
소리가 들려왔다.
낡고 녹슬어 삐걱거리는 경첩이, 침묵으로 가득찬 방 안을 덧칠했다.
왔구나.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아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슬픔.
이 절망.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들게 한 여신에 대한 증오까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는 투명한 색이 아닌 붉은 색이었다.
"나를, 죽이러 왔니?"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가 망설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아, 정말이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차라리 기억을 되찾지 않았다면 좋았을까.
아니, 그러면 다시 되살아 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기억이 다르다면, 사람 자체가 다른 것이었으니까.
"...으흑."
뾰족한 무언가가 살을 꿰뚫고 들어왔다.
용사의 성검에 베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뜨겁고, 아팠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무한히 슬퍼할 뿐이었지.
"미안, 하구나."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전했다.
내 동족들을 대신한 사죄였다.
천천히 몸을 돌리니 칼자루를 놓은 아이가 몸을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무서웠을까.
나를 찌를 때, 망설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아이가 떨고 있다는 것이었다.
"으, 으흑..."
아이를 품에 안으니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움이나, 슬픔으로 인한 눈물이 아니었다.
그 울음 소리는 복수에 성공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내, 내가 해냈어. 드디어, 드디어 동료들의 복수를 해냈다고..."
"..."
"그런데, 그런데 왜... 그런데 왜......"
아, 하고 탄식이 터져나왔다.
아이가 내비치던 감정이 반전했다.
고개를 들어올린 자그마한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이가 보일 표정이 아니었다.
이런 얼굴 따위, 원하지 않았다.
"아가, 미안하구나... 미안, 해..."
눈을 감으니 뜨거운 것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칼날에 찔린 등보다도, 심장이 더 아팠다.
아아,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
찌른 이도, 찔린 이도 깔끔하게 끝날 수 없는 복수라니.
"마왕이잖아. 죽여야 하잖아. 내 원수인데. 칼자루를 놓치지 말라고 한 건 나였는데, 왜, 왜?"
"..."
무릎을 꿇었다.
등 뒤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미친듯이 중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이대로 잠들면 깨어날 수 있을까.'
흐려지는 시야 끝으로 할리벨의 얼굴이 보였다.
이건 벌이구나.
너를 죽이려고 한, 나에 대한 지독한 형벌.
하지만 이대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어.
너를 죽임으로 되살릴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죽는 것을 원했다.
그렇기에 아이의 칼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아리엘 씨!!!"
그래.
차라리 여기에서 죽는다면 그나마 나았는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엘리의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희미한 불빛으로 물든 천장에 여신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제가, 도망치게 놓아둘 줄 알았나요?'
속삭임이 들려왔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정도로 절망스러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