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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29화 (129/342)

Chapter 129 - 떠나보내고, 받아들이다.(1)

화려하게 빛난다.

어두운 밤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밝히는 왕도를 바라보며 용사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황금의 도시.

한때 그렇게 불리었던 곳을 눈에 담자, 불쾌한 감각이 스물스물 솟아올랐다.

"곧 있으면, 끝을 볼 수 있어."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족 뿐만 아니라, 인간조차도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게 된 용사는 누군가가 막을 수 있을 법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부패한 귀족. 더러운 배신자. 역겨운 악마숭배자까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것들을 죽여오며 드디어 이곳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를 지나가려면 신분패를ㅡ"

"..."

"통과!"

이 경비병은 자신이 무얼 하러 왕도에 왔는지 알까.

겨우 금화 몇 닢에 길을 열어주다니, 결코 정상은 아니겠지.

어떤 곳에 있는 것보다 거대한 문을 통과해, 일직선으로 향한다.

왕성으로 향하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거대한 건물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

"멈춰라!"

한때는 이곳이 그렇게도 아름답게 보였더랬다.

마족의 침공에도 웃고 떠드는 사람들.

자애로운 국왕과 나라를 생각하는 충신들까지.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허상이었다면 어떨까.

"켈빈 경. 저도 못 알아보시다니, 너무한거 아닙니까?"

"..."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경계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흉악한 적을 바라보듯 노려볼 뿐이었지.

확인을 위해 왔지만, 더한 확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아서인지 배신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이 누구를 지키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나는, 언제나 국왕 폐하를 지킬 뿐이다."

남자의 기세가 달라졌다.

익숙한 감각에 눈을 부릅떴다.

인간이 아닌 마족의 투기는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켈빈 경, 설마 마족이 된 겁니까?"

"..."

머리 위에 자라난 뿔이 대답을 대신 해주었다.

인간이었던 자가 마족이 되었다.

단순한 사실 하나가 용사에게 혼란을 주었지만, 그의 행동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칼날이 뽑혀지고, 그대로 마주쳤다.

"..."

"..."

강렬한 파공음과 함께 사방으로 충격이 달렸다.

그것을 신호로, 주변에 있던 기사들 또한 하나 같이 검을 뽑아들었다.

이곳이 언젠가 보았던 마왕성보다 더 마왕성 같다면 거짓말일까.

헛웃음을 토해낸 용사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마왕을 향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가야겠어."

멍하니 중얼거린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가 가장 놀랐지만,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였다.

용사에게 가야 해.

이유 모를 충동이 신체를 물들였다.

"어머니."

"...린."

나를 막아서는 건, 다름 아닌 린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몽롱하게 물든 눈동자와 마주하자 순간 몸이 굳었다.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온기를 대체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이건 아이가 나에게 보내는 가장 상냥한 협박이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느냐고.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구나."

"그런가요."

반쯤 억지인 말에도 아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이 마치 아이에게 허락을 내리는 부모 같은 행동처럼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런 아이의 행동이 잔뜩 토라진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걸.

"다른 이들을 잘 부탁한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 걱정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내쪽이 걱정해야 할 입장이었지.

"할리벨 씨, 얼마 남지 않으셨어요."

"..."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써봤는데, 전부 소용이 없었어요."

아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처음부터 할리벨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에게 시달려온 몸뚱이는 이미 망가진지 오래.

마족이 아니었다면 진즉 죽었을 정도로 약물에 절여져 있었다나.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어쩌면 나를 붙잡아 두기 위한 거짓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떠나시는걸 말리려는게 아니에요."

지금 떠나면 어머니가 후회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그냥 도망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엘리가 처녀를 잃음으로 할리벨을 회복시킬 수 있는 수단이 전부 사라진 지금, 그녀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떠난다는 건, 그녀의 죽음을 보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일 터였다.

"..."

언젠가의 죽음을 기억 속에 담는다.

레이나.

네 심장을 찌르던 그 감각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했어.

그 숨이 멎어가는 것도, 마침내 숨이 끊어지는 것도.

비록 그녀를 다시 낳을 수는 있다고 해도, 그건 하나의 저주나 다름 없었다.

분명 할리벨 또한, 나의 또 다른 저주가 되겠지.

"헉, 흐으..."

"조심하세요."

머리가 어지러워서 현기증이 났다.

나는 할리벨의 죽음을 보고도 태연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또 다시 누군가를 죽여낼 수 있을까?

그녀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내 손으로 그녀를 죽이는 것 뿐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아가."

"네, 어머니."

"...비겁한 엄마라서 미안하구나."

자신을 죽이지 말아달라는 할리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할리벨을 죽이는 것보다 그녀를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만약 상대가 부모님이었어도 그렇게 했을까?

...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할리벨."

이름을 속삭인다.

내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환히 웃어보이던 그녀는, 이제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다.

"할리벨."

어쩌면 이 편이 더 다행일지도 몰랐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죽이는 것보다는,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죽이는게 더 나았으니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꺼내들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칼날이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찌르기만 하면 돼.'

저 심장을.

아직 미약하게 뛰고 있는 저 심장을, 찌르기만 하면 된다고.

마치 롤러코스터가 올라가듯,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떨어져 내리는 건 순식간이겠지.

그래, 눈을 딱 감고 있으면 될 뿐이야.

그렇게 한다면 분명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올거라고.

. . .

"..."

"헉, 흐으, 모, 못하겠어..."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바닥으로 곤두박칠쳤다.

더 이상은 싫어.

내가 왜 할리벨을 죽여야 하는 건데?

대체 왜?

깨닫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가가 절벽 아래로 등을 떠미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내 선택이 맞다고 해줘."

할리벨의 손을 움켜쥐었다.

언제나 나를 향하던 차가운 온기가 지금만큼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강하게 쉬면 꺼져버릴 것처럼 점멸하는 생명의 불꽃에, 나는 감히 숨을 내쉬지 못했다.

이대로 너를 떠나보내는게 옳은 선택일까?

떨어진 단검을 다시 집어들어, 네 심장을 찌르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까?

"...마왕님."

"할리벨."

할리벨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그녀의 입술은 전과 같이 굳게 닫혀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마지막의 마지막의 순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낸 환청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저 환청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몽마는 불멸인거, 알고 계세요?"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에요."

할리벨이 귓가에 속삭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에는 또 하나의 할리벨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가능해?

"마왕님의 동의만 있으면 돼요. 마왕님이 진정으로 제가 살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마왕님의 끔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답니다."

평생에 한 번만 가능한 저주.

하지만 이번 만큼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되겠지.

더 이상은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의 제안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다오."

"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떠날 리가 없잖아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제 된 걸까.

더 이상 심장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던 차가운 온기 또한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할리벨."

"..."

"거기, 있나?"

어쩐지 바보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모든게 내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면 어떨까.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할리벨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건데.

"...어머니."

"린. 아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났다.

린에게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모습은 이미 꼴사나워진지 오래였다.

그런 나를 향해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손바닥 위에는 흑색의 실을 엮어 만든 목걸이가 올려져 있었다.

"할리벨 씨가 전해달라고 했어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집어들었다.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흑색의 조각.

하트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는 그것을 보며 나는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아, 아아아아아......"

할리벨의 뿔을 깎아내 만들어진 목걸이를 품에 안고는 한참이고 오열했다.

미안해. 죽게 둬서, 미안해.

내가 약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미안해.

괜찮아요. 하고,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할리벨은 여전히 죽어있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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