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7 - 약속.(1)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 언제나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이번이 특히 더 다르다고나 할까.
분명 겨울에 가까워졌는데도 내 주변만 따뜻하다던지, 가끔씩 바깥에 나가면 꽃이 피어있다던지 그런 것들.
"...원래 이 시기에 꽃이 폈나?"
이 세계의 상식을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추운 날씨에 민들레가 핀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북부치고 묘하게 이 주변만 따뜻하기도 하고.
"냐아, 냐아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봄 향기다냐..."
추운 것에 약한 랴뇨리는 언젠가부터 내 곁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무슨 봄 향기가 난다나 뭐라나.
물론 내가 느끼기에도 이상하리만큼 따뜻했기에 딱히 딴지를 걸 수는 없었다.
'뭐, 좋은게 좋은거려나.'
나도 추운 건 절대 사절이라는 입장이었으니까.
원래도 싫었는데, 기본적인 체온이 낮아지니 훨씬 더 싫어하게 되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고양이, 여우를 번갈아가며 품에 안고 다녔는데 말이지...
"읏?!"
"조심해라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걸, 랴뇨리가 붙잡아줬다.
극한까지 부풀어오른 배는 발 밑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어,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벌써 몇번이나 넘어질 뻔 했지만, 고양이귀의 기사님이 내 옆을 잘 지켜주고 있어서 다치거나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제는 조금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 중얼거림대로, 뱃속의 아기는 크기만 불릴 뿐이었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종족이길래 이렇게나 커지는 걸까.
최소한 인간이나 수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확실했다.
'설마 오크나 오우거 같은 종족은 아니겠지...'
그런 아이들조차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지만서도, 뭐랄까.
이 정도면 낳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는걸.
"진짜,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겠다냐. 아프지는 않은 거냥?"
"...당연히 아프지. 이렇게나 커졌는데."
내가 마족이 아니었다면, 하물며 아서에게서 내 뿔을 돌려받지 않았더라면 내장에 가해지는 압박 때문에 이미 죽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꽤나 고통스러웠지만, 너무 눌려있어서 그런가 오히려 잘 못 느끼게 되어버렸으니까.
허리의 신경을 완전히 누르지는 않았는지, 부축을 받으면 대충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자, 이제 슬슬 들어가자냐. 아서 녀석, 요즘 네가 밖을 돌아다니면 어찌나 눈치를 주던지 무섭단 말이다냥..."
"그래. 랴뇨리가 혼나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
"이익,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냐! 나는 벨이 아니니까냥!"
꼬리로 내 등허리를 투닥거리며 잔뜩 성을 낸다.
알지. 당연히 알지.
랴뇨리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 쯤은 당연히 알고 있지.
그래도 뭐랄까, 귀여워 하는 건 그 대상이 꼭 어린아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지...
심지어 나, 고양이 좋아하니까.
"아무튼, 아기도 있으니 몸조리 잘 하라냥. 네기 잘못되면 욕 먹는 건 나니까ㅡ"
"...윽?!"
"말하자마자?!"
바닥에 쓰러지려는 것을 랴뇨리가 붙잡아줘서 그나마 천천히 내려앉을 수 있었다.
원래도 아프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다르다고나 할까.
실시간으로 들이닥치는 고통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렇게 커다란 아기가 정말 태어날 수 있을까.'
뱃속에 품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낳는 것이 문제였다.
이 정도면 그냥 배를 갈라서 꺼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흐윽?!?!!"
"냥?!"
눈을 꾹 감았다.
방금 전에 내가 느낀 감각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뭐야, 이게.
"흐, 아아아아아악..."
거짓말. 거짓말, 이지?
배를 찢어내는 듯힌 고통에 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건, 이건 못 버텨.
죽을 거야. 반드시, 죽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ㅡ
"아, 아아아아아아아!!!!?!!?!!!!"
고통에게서 도망치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죽음과 가까운 통증으로 인해 전신에 아드레날린이 뿜어지고,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이 두 배가 되어버린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침을 질질 흘리고, 눈을 마구잡이로 뒤집어 까고, 사지를 경련하며 마구 뒤튼다.
내 몸뚱이는 나의 것이었지만, 지금 만큼은 고통과 공포의 차지가 되었다.
"지, 진정! 진정하라냥!"
"아그, 아, 갸아아아아아아악!!!!!!!!"
"아리엘!!"
비명이라는 가벼운 말로 포장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죽음에 가까워진 존재만이 낼 수 있는 절규와도 같았다.
'죽, 죽어... 진짜, 진짜 죽어, 버려... 흐악...'
"배, 배를 갈라야 한다냥! 이러다가는 아기도 너도 둘 다 죽어버린다냥!!"
어떻게? 어떻게 배를 가르는데?
그리고, 배를 가르는 것 때문에 아기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할 건데?
싫어.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아기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그게, 엄마라는 거니까.
"으, 으흑, 흐..."
"고집 부리기는... 그러면, 내 손이라도 잡느라, 냐앙?! 소, 손을 잡으라고 손을! 야!!"
몰라. 모르겠어.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듯 마구 팔을 휘두른다.
그러다가 손 끝에 걸쳐진 부드러운 무언가를 그대로 잡아채, 꼭 쥐었다.
뭔지는 몰라도 뭐라도 잡으니 조금 안심 되는 것 같기도 하네.
...여전히 죽을 노릇이었지만.
"으, 으으, 아아아아악..."
"냐아아아앙..."
부드럽게 나온다는 느낌보다는 억지로 밀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이러다가는 정말, 배가 전부 다 망가질지도 몰라...
내장을 붙잡고는 끄집어내는 듯한 감각에 팔다리가 오싹오싹거렸다.
'지, 진짜 죽는, 다... 윽, 흑...?!'
나오지 않으려는게 아니었다.
분명 전력을 다해 나오려고 하는데도, 그 크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것일 뿐.
설마 거인족이나 그런 종족인 건 아니겠지.
거인족의 아기는 어지간한 인간 성인 크기라는 설정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니, 성인 크기였으면 이미 배가 찢어지고도 남았을 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여간 답답한게 아니었다.
"랴, 랴뇨리..."
"...흣, 왜, 왜 부르냥?!"
"호, 혹시 깨물어도, 될까?"
"뭣?! 뭐를?! 잡고 있는 걸로는 부족한 거냥?! 아니, 그보다 그걸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는ㅡ 흐갸아아아아앗?!?!?!!!!"
미안, 사과는 나중에 할 테니까.
비명을 지르는 힘조차 몸 안으로 구겨넣기 위해 손에 잡혀 있던 것을 입으로 힘껏 깨물었다.
미안, 미안 랴뇨리.
그래도 손에 잡히는게 이것 밖에 없는 걸 어떻게 해!
"흐으으, 흐으으읍!!!!"
이 몸이 내 몸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만약 그렇다면 이런 끔찍한 감각을 느끼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뭐랄까, 운다기보다는 울부짖는다는게 맞겠지.
목이 전부 쉬어버릴 때까지 비명을 지르고, 지르고, 또 질러대니 어느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하으, 하, 으......"
"냐, 냐아아......"
뭔가 나왔나?
안 나왔나?
아직도 뱃속에 있나?
머리가 어질어질한 걸 넘어서, 망가진 텔레비전 마냥 깜빡거렸다.
어라, 나 지금 기절한 건가.
아니면 깨어있는 건가... 으.
"주, 죽을 뻔 했다냐... 랄까, 괜찮냥?!"
"으, 으으, 으..."
어쩌면 둘 다 맞을지도 모르겠다.
기절했다가, 깼다가.
임계치를 넘는 고통에 정신을 놓고, 점점 줄어드는 고통에 다시 깨어나는ㅡ
그런 반복의 연속에 멀미가 엄청나게 났다.
"그, 보다, 아기, 는?"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내 몸 상태 따위가 아니었다.
내 뱃속에서 나온 아기였지.
더듬더듬 입을 여니 조금 끔찍한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냥, 아기가 무사한지만 알고 싶을 뿐.
"...아리엘."
"......뭔가, 문제라도, 생겼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서, 아기를 볼 수가 없었다.
떨떠름한 목소리의 라뇨리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설마, 정말 잘못된 거야?
거짓말, 이지?
"이거 보라냥."
"...에."
하지만 눈에 보인 건 내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다.
아기ㅡ 라기보다는 애초에 생명체인지도 의문이 갈 정도의 괴물체.
진갈색의 동그란 물체를 보며 순간 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시 봐도 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딱딱해."
"아무래도 알은 아닌 것 같다냥."
내 품에 커다란 구체를 안겨준 랴뇨리가 귀를 쫑긋거렸다.
만약 이게 알이라고 한다면 안에 들어있는 아기의 심장 소리가 들렸겠지.
표정이 잔뜩 찡그려져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세계수도 낳을 수 있나?'
"...설마."
불현듯, 잊고 있던 목소리 하나가 떠올랐다.
자연과 가장 닮아있던 존재ㅡ 내 손으로 죽인 가장 첫 번째 생명.
언젠가 반드시 되살리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레이나.
그 세 글자를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눈이 동그렇게 떠졌다.
"...세계수."
"냥?"
"세계수의 씨앗, 인거 같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랴뇨리에게, 바람이 불어왔다.
기묘할 정도로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바람이 주변의 한기를 녹여내고, 그대로 내 품 안으로 스며들었다.
몸 전체가 맴도는 깨끗한 생명력.
의심하려고 해도,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세계수의 씨앗이라니, 말이 되는 거냥. 진짜로..."
내가 품에 안고 있는 건, 세계수의 씨앗이었다.
망연자실한 랴뇨리의 뒤로 문득 약속 하나가 떠올랐다.
레이나. 그녀와 했던 약속.
언젠가 내가 세계수를 낳게 된다면 세계수를 피워올리겠다고 한 약속이었다.
"...레이나."
네가 살아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