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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58화 (158/342)

Chapter 158 - 약속.(2)

마왕이 세계수의 씨앗을 낳았다는 웃을 수 없는 진실은 둘째로 치더라도, 일단 어디에 심을지가 문제구나.

마음 같아서는 레이나의 고향에 심어주고 싶었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건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품에 안고 있을 수도 없어서 일단 아서에게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세계수의 씨앗을 낳았다고?"

"응."

믿을 수 있다는 듯한 반응은 아니었다.

나를 의심한다기보다는 내 품에 안긴 씨앗이 정말 세계수의 씨앗인지를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정확하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이 그러니 세계수의 씨앗이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디에 심을지 고민이여서 너한테 물어보려고."

혼자만이 만든 아기ㅡ 아기라고 하기에는 뭐했지만, 아무튼.

혼자 만든 것이 아닌 아서와 둘이 만든 세계수의 씨앗이었기에, 씨앗을 심는 위치를 그와 의논하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반쯤은 내가 결정하지 못한게 맞는 말이지만, 뭐어.

"그나저나 아리엘. 너, 냐한테 뭔가 말은 없는 거냥?"

"...아."

랴뇨리의 손가락이 내 볼을 꾹꾹 찔러댔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손톱이 튀어나와 있어서 따갑기는 엄청나게 따가웠다.

마치 내 뺨을 뚫어버릴 것만 같았달까.

"미, 미안..."

"미안하다면 다냥?"

"정말 미안..."

내가 입에 문 것은 당연하게도 랴뇨리의 꼬리였다.

물론 내가 씹어서 꼬리가 잘리거나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그 고통만큼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겠지.

신경질적으로 살랑이는 꼬리에 고개를 꾸벅 숙이자 머리 위에서 잔뜩 성이 난 듯한 콧소리가 흥흥 들려왔다.

"만약 아기 낳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면 얼굴에 손톱 자국 정도는 새겨줬을 거라냥. 알겠냥?"

"걱정해줘서 고마워, 랴뇨리."

"누, 누가 걱정을 했다는 거냥?! 걱정 같은거 한 적 없다냥!"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휙 돌린다.

누가 봐도 츤데레의 반응이구나.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새침대기 캐릭터들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제는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얼굴들이지만 기억 정도는 떠올려도 괜찮겠지.

과거의 세계에 향수를 느끼기에는 이미 이곳에서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쉽지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과거의 세계 자체를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튼, 몸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아리엘."

"...그러네. 전부 이 아이 덕분인 것 같지만서도."

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으려나.

정말 이 씨앗이 세계수라면 아기가 아니라 세계수 님이라고 불러야 하는게 아닐까?

세계수라는 건, 특히 세계수의 씨앗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종류의 무언가였기에 더더욱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린의 옆에 심는 건 어떨까."

"...린의, 옆에?"

아서의 말에 살짝 시선을 돌렸다.

린.

그 이름을 떠올리니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만약 그 아이가 다시 태어나게 되더라도 나는 평생 이 감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터였다.

...웃기지도 않지. 그런 짓을 한 건 다름 아닌 나인데.

"생각, 해볼게."

결국은 그렇게 어물거리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은 둘째로 치더라도, 차마 린이 묻혀있는 곳으로 향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찔렀을 때의 감각과 땅에 묻을 때의 그 비참함이 내 심장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무사히 낳아러 다행이다냥.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으니까..."

확실하게 죽는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았구나.

마지막에 느꼈던 그 따스한 감각이 아직까지도 심장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어서 빨리 심어서 싹을 틔워야 할 텐데.

품에 안긴 씨앗을 슥슥 쓰다듬고 있자니, 문이 열리고 고양이들이 들이닥쳤다.

"봄 향기!"

"아리엘이 봄을 낳았어!"

달라붙는다. 달라붙는다. 엉망으로 달라붙는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고양이 냄새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잠시라도 우울하게 두지를 않는구나, 이 아이들은.

벨의 부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들이기도 했으니까.

"죄송해요, 아리엘 씨. 원래는 이러시는 분들이 아닌데..."

"괜찮아."

언젠가 동영상으로 보았던 고양이 애교 영상을 실제로 당하고 있는 느낌이라 엄청나게 좋았다.

머리를 쓰다듬고, 턱을 긁어주고, 뺨을 비빈다.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려두고 골골거리던 아이가 내 목에 슬며시 꼬리를 감아왔다.

벨은 그런 둘을 보며 정말 미안하다는 듯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오히려 이 편이 나에게 있어서는 더 좋았다.

'정신 없이 행복한 편이, 슬픔을 잊기에는 더 좋겠지.'

잊으려 하는게 과연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려니 또 울적해지는 스스로가 싫어서 그냥 마구잡이로 손을 뻗었다.

내 손길에 딸려오는 벨을 씨앗과 함께 꼭 껴안으니 하나만 남은 귀가 마구 쫑긋거려댔다.

"벨도 참, 아직 어린애다냐~ 겨우 안아주는 걸로 좋아하다니냥!"

"그, 그런 거 아니야아..."

랴뇨리가 벨을 놀리고, 벨은 얼굴을 붉히고.

수인 마을에서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둘은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역시 친구가 좋기는 좋구나.

물론 딱히 부럽지는 않았지만.

"아리엘 씨."

"엘리."

옆에는 아서, 주위에는 고양이들을 두른 채로 있으니 엘리가 방에 찾아왔다.

최근들어 북부의 의사들에게 의술이나 약을 제조하는 법을 배우고 다녀서 그런지 얼굴 보기가 조금 힘들기는 했더랬다.

분명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그건 아기인가요? 뭔가, 음..."

"이상하지?"

"아뇨! 이상한게 아니라 뭐랄까, 신기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베일이 이리저리 펄럭였다.

그와 동시에 보이는 자그마한 뿔에 뭔가 기분이 묘해지기는 했지만, 엘리는 어디까지나 엘리였으니 크게 신경쓰지는 않기로 했다.

"세계수의 씨앗이야."

"세계수의 씨앗이요?!"

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계수.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이야기로는 그 누구보다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세 글자가 주는 무거움 정도는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레이나 씨의 말은 농담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마왕이 세계수를 낳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게 한참 전인 것 같은데, 그 말이 진실로 이루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달까.

"그래도, 무사히 낳아서 다행이네요."

언제나 아기를 낳을 때마다 고통스러워 하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를 않았다.

아기를 낳은 뒤 초췌해진 얼굴까지도.

여태까지에 비하면 지금의 아리엘은 엄청나게 멀쩡한 상태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씨앗이라면 땅에 심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지."

"제가 알고 있는 장소가 하나 있어요."

저택 안이나 근처에서만 지내는 아리엘과 달리, 엘리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여러 곳을 다닌 만큼 저 정도 크기의 씨앗을 심는 장소 쯤이야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여기에요, 아리엘 씨."

넓은 평야에는 꽃 하나 피어있지 않았다.

혹독한 북부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세게 자라난 풀들만이 지척에 깔려 있을 뿐이었지.

무언가가 자라기에는 애매했지만, 장소가 넓었기에 오히려 세계수를 심기에는 적당했달까.

"...그런데, 땅을 팔 수가 있을까?"

딱딱하게 얼어버린 땅을 파헤치는 건 꽤나 고된 일이 될 터였다.

아니, 어쩌면 며칠에 걸쳐 고생하게 될지도 모르지.

발을 움직여 바닥을 툭툭 두드리니 생각 이상의 딱딱함에 발바닥이 얼얼했다.

"아리엘 씨는 쉬고 계세요. 땅은 제가 팔 테니까."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미안한데..."

"산모시니까 쉬고 계세요, 네? 무리하시다가 탈 나면 저, 엉엉 울거라고요?"

울면 안 되지.

응, 엘리가 울게 둘 수는 없으니까.

언제 챙겨온지는 몰라도 손에 삽을 들고 있는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땅을 잘 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기가 해보겠다고 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으응..."

가만히 서 있는 것도 힘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엉덩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품 안에 안고 있는 씨앗을 슬슬 쓰다듬으며, 만약 이 씨앗이 싹을 틔웠을 때의 일을 상상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엄청나게 커다랗게 자라나면 어떤 느낌일까.

"아니, 애초에 자라려면 엄청나게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싹을 틔우는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세계수라는 이름에 걸맞을 정도가 될 때까지 자라라면 최소한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은 넘게 걸릴 터였다.

과연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

아니, 분명 살아있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자, 다 팠어요, 아리엘 씨!"

"수고했어, 엘리."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시원하게 미소짓는 엘리에 빙긋 웃었다.

원래도 체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저렇게 변하니 훨씬 더 좋아졌구나.

분명 단단하게 얼어있던 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삽 한 자루로 씨앗이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를 만들 줄이야...

"...딱 맞네."

정확하게 세계수의 씨앗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조금 더 깊은 곳에 심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엘리를 더 부려먹기는 싫었기에 일단 흙을 덮어냈다.

'세계수의 씨앗을 낳아서, 그걸 땅에 심고 기르다니...'

심지어 마왕인데도.

마왕이 세계수의 씨앗을 낳아서 기른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전개였다.

...물론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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