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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62화 (162/342)

Chapter 162 - 사랑과 평화.(3)

서로의 알몸은 자주 본 적 있지만, 이렇게 같은 탕 안에 들어온 건 또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니 진짜 엄청나게 근육질이구나.'

수련을 열심히 한 것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전장에 있었으니 몸이 좋지 않을래야 안 좋을 수가 없겠지.

남자의 몸에 이 정도로 감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 번 만져봐도 돼?"

"응? 원하는 대로."

시원스러운 허락에 슬금슬금 다가가 손을 뻗었다.

단단해.

그것도 엄청나게 단단해.

이게 사람의 몸이 맞는 걸까.

강철이 아니라?

"우와..."

"...으음."

"대단해..."

마음 같아서는 3대 몇까지 치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곳에 그런 개념이 있을 리가 만무했기에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이런 몸뚱이를 가졌으면서 하반신에 달린 물건마저 흉악하다니, 정말 세상은 불공평한게 아닐까.

"아서, 몸 엄청 좋네."

"용사니까."

"너는 너 잘난 걸 언제나 '용사니까.' 같은 말로 얼버무리는 경향이 있어."

이번에는 팔뚝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잘 짜여진 섬유질 같은 근육이 내 손 안에서 마구 펄떡였다.

...죽이네, 진짜로.

한때 아서 앞에서 죽이네 뭐네 소리쳤던 과거가 떠올라서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 정도면 한 대만 맞아도 죽었겠는데, 정말로.'

어쨌든, 만족할 만큼 만지다가 다시 슬쩍 떨어졌다.

뭔가 아쉬워 하는 것 같은 표정인데 기분 탓이려나.

"...아서도, 만질래?"

"응?"

"나도 만졌으니까, 으응... 특별히 허락해 줄게."

사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었다.

관계를 나눌 때마다 내 몸은 언제나 아서의 것이 되었으니까.

어째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를 더 소중히 다루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려나.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마구잡이로 범해졌었는데.

"히얏..."

"아리엘은 부드럽네."

"그,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딱히 피부에 신경 쓴 적도 없었고,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내 팔뚝을 만지작거리는 아서에 슬쩍 얼굴을 붉혔다.

손이 꾹꾹 누를 때마다 짓눌리는 피부에 새삼 이 몸뚱이가 얼마나 말랑말랑한지 체감했다.

'쓸데없이 큰 가슴도 그렇고...'

딱 남자를 유혹하기 좋은 몸뚱이었다.

꼬리랑 날개가 달렸다면 서큐버스로 착각할 정도로.

하긴, 명색이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인 만큼 다 낳을 때까지는 절다 질리지 않을 몸뚱이를 가지고 있어야겠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서도.

"...저기, 언제까지 만질 거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너무 부드러워서 무의식적으로 계속 만지고 있었어."

"아, 아니... 딱히 기분 나쁘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그냥 기분이 조금 묘해져서 그랬을 뿐이었다.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다른 사람에게 진득할 정도로 몸을 만져지는 건 처음이라서, 으응.

야한 기분이라기보다는 조금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부드럽다고 감탄하는 걸 보니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리엘."

"...응? 으응?"

"키스해도 돼?"

뭐라는 거야, 갑자기.

달짝지근한 눈빛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분명 섹스를 할 때는 상관 없었는데 이렇게 맨 정신으로 들으니까 뭐랄까, 뭐랄까!

'...오글거려.'

그래도 뭐, 싫다는 건 아니었다.

연인과의 키스를 기분 나빠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슬쩍 다가온 아서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진짜?"

"더 하는 건 무리니까, 알겠어?"

뭔가 시무룩해진거 같기는 했지만, 정말 무리였기 때문에 최대한 무시했다.

더 하고 싶으면 그 좆 크기를 줄여서 오던지.

그게 아니면 내가 체력을 길러야 했지만, 그리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나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응?"

"...음."

다시 생각하니 뭔가 괘씸해서 잔뜩 불퉁거렸다.

분명 내가 없었으면 혼자서 처리하고 있었겠지.

혀를 쯧쯧 차며 살짝 다가서, 아서의 다리 사이에 몸을 파묻었다.

"아리엘?"

"등 아파서 그러는 거니까, 조금만 참아."

이쪽도 딱딱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욕탕의 돌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 놈의 몸뚱이는 대체 얼마나 약한 거야.

딱딱한 바닥에 얼마나 앉아 있었다고 벌써 엉덩이가 얼얼했다.

"흐아, 좋다아..."

"...좋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전신을 적시는 따뜻함에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뭔가 지금까지의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피로라고 한다면 아서에게 잔뜩 괴롭혀진 것 밖에 없기는 하지만, 으응.

"이렇게 된게, 실감이 안 나네."

물 속에 잠겨있던 손을 꺼내, 쭉 뻗어보였다.

왼손 약지를 감싸고 있는 반지에 멍하니 시선을 보내니, 훨씬 커다란 손이 그 위에 겹쳐지듯 올려졌다.

진짜,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후회해?"

"아니."

"후회할 거야?"

"절대로 후회 안 해."

"좋아."

얼핏 들으면 단호하기까지 한 대답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을 텐데.

달뜬 숨을 토해내며 아서의 품에 더더욱 머리를 파묻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뱃속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점점 그 크기를 부풀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서."

"응, 아리엘."

"아기가 생긴 것 같아."

아랫배를 문지르며 빙긋 미소지었다.

입가에 부딪혀 오는 부드러움에 목소리를 참지 못하고 꺄르르 웃어버렸다.

***

세계수의 씨앗 때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 걸까,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좋았다.

둥글게 부풀은 배를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번에는 어떤 아기가 태어날까.

예측을 할 수 없으니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새싹은 그대로네요."

"...쉽게 자라지는 않네."

잎사귀가 조금 커진 것 같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손가락으로 새싹을 톡톡 두드리니 생기 있게 통통 튀어대는게 확실히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응, 세계수가 그저 커다란 나무일 리가 없잖아.

"몸은 조금 어떠세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시고요?"

"괜찮아. 지금까지 임신했던 것 중에서 가장 몸 상태가 좋은걸."

앞으로도 계속 이런다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아픈 건 조금 꺼려지니까.

아기를 낳는 일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안타깝기는 했지만, 아픈 건 아픈거였다.

"다른 아이들은?"

"벨네는 마을로 나들이 나갔고, 라일라 씨는 뒷뜰에서 수련을 하고 있어요. 에밀리는 뭐, 린의 무덤에 있고요."

"...그렇구나."

그럭저럭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왕국군은 북부의 국경을 두들겨 대고 있겠지만, 그것이 대해서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에반젤린 여왕의 말에 최대한 신경쓰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전쟁 같은 것에 골머리를 썩히다가는 아기가 떨어질 수도 있다나.

"이번에는 레이나 씨일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닌 것 같아... 레이나라면 세계수를 두고 이렇게 천천히 나올 리가 없으니까."

물론 이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지만, 뭐랄까.

레이나였다면 이미 진즉 태어나서 세계수를 돌보고 있지 않을까ㅡ 싶기도 하고.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서도.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사랑으로 맞이할 테니까.

"확실히, 레이나 씨라면 지금쯤 귀를 파닥거리며 새싹에 말을 걸고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렇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반응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웃음 속에 들어있는 조금의 서글픔만 아니었다면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분명 상황은 더 나아졌지만,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들이 몇몇 있었다.

린, 레이나, 그리고 여신.

어느 것이 먼저 해결될지 아니면 영영 해결되지 않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되도록이면 행복한 방령으로 마무리 되기를 원할 뿐이었다.

"이렇게 둘만 있는 것도 오래간만이네요."

"그렇네..."

엘리도 엘리 나름대로 바쁘니까 어쩔 수 없겠지.

저 멀리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근처의 따스함에 가로막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내가 추운 걸 싫어하는 것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나 막아줄까.

사실 세계수는 엄청난 효자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하며 배를 슥슥 쓰다듬었다.

"여자아이일까요, 남자아이일까요?"

"...잘 모르겠네. 건강하게만 태어나줬으면 좋겠는데. 사심을 조금 담으면 안 아프게 태어나주면 더 좋겠지만."

그런 내 말에 엘리가 푸스스 미소지었다.

역시 아프지 않는 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을까.

확실히,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면 진한 쾌락에만 빠져서 마구잡이로 섹스만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될 수는 없지.'

자존심, 이라기에는 이미 암컷이 되어버렸다는 자각이 있었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치심일 터였다.

물론 지금도 아서의 좆에 꿰이면 마구 헐떡거리기는 하지만, 핥거나 가슴으로 비비거나ㅡ 아무튼, 그런 짓은 하지 않으니까 오케이 아닐까.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 이미 문제가 있는 건가?

"그나저나, 의술을 배우는 건 잘 되고 있어?"

"뭐어, 마을 사람들도 친절해서 그럭저럭 할만 한 것 같아요."

잔 상처가 난 손이 그녀의 노력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열심히 하고 있구나.

오로지 성녀라는 직책에 제 존재를 전부 걸어놓고 있던 여인이 언제 이 정도로 발전했을까.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기특하다고 말하기에는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응, 뭐어...

좋은게 좋은거지.

그러니까 우울한 생각은 그만 하도록 하자.

"모두 아리엘 씨 덕분이에요."

"...응?"

나는, 딱히 한게 없는데.

엘리의 말에 괜히 민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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