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2 - 미끼.(4)
"뭐?! 안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미코가 내 옷자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못마땅하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혀를 쯧쯧 차는데,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을 혼내는 모양새라 상당히 앙증맞았다.
뭐, 내가 보기에만 이렇게 보일 뿐이고 미코 입장에서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겠지만서도.
"너는 바보인가?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인 마족 아이 때문에 사지로 기어들어가겠다고? 미친 게냐?!"
"미코."
"봐라. 겨우 회복하던 몸뚱이도 화 한 번 낸 걸로 다시 망가지지 않았느냐!"
미코가 잔뜩 성을 내자, 머리 위에 솟아오른 두 귀가 퐁퐁 흔들려댔다.
엄청 화났구나.
설마 이 정도로 나를 생각해 줄 줄은 몰랐는데, 꽤 감동 해버리고 말았다.
"너는 어머니야. 동시에 산모이기도 하고! 아이가 빨리 자란다고 해서, 아이를 낳은 뒤의 몸이 빨리 회복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
"안정을 취해야 할 시기에 돌아다니는 것도 불안했는데, 뭐? 이제는 또 어디를 가?!"
...뭔가 진심에 진심을 더한 것 같은데.
처음에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나 같이 맞는 말들 뿐이라 반박할 수 없는 건 둘째로 쳐도, 걱정에 걱정을 더한 분노였기에 차마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ㅡ 흐갹?!"
"우으우으우으므..."
"뭐, 뭐하는 게냣?!"
미코의 잔소리로 인해 정신이 무너지기 직전, 조용히 나타난 아이 하나가 미코의 탐스러운 황금빛 꼬리를 꽉 깨물었다.
역시 고양이 수인은 조용하구나.
새삼 감탄하면서도, 왁왁 소리를 지르는 미코에 피식피식 웃었다.
정말 아플 텐데도 손찌검을 하지 않는 것이 참 미코다웠다.
"나는 아리엘이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
"아리엘은 행복해져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 아이를 구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는 거잖아?"
아이가 말했다.
그 말대로, 왕도까지 함께 했던 마족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동안 죄책감으로 인해 절대 행복해지지 못하겠지.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 혼자만의 행복이 문제아 아니라, 붙잡힌 아이의 행복 또한 원하고 있었기에 하게 된 선택이었으니까.
"...대신, 조건이 있다."
제 꼬리를 꼭 껴안은 미코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건이라니, 무슨 조건?
순간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지만, 미코의 시선이 내 왼손 약지로 약하는 것을 본 뒤에는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네 짝ㅡ 용사를 데려가거라. 그리고, 단 한시도 녀석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허락해주지."
"알겠어."
"...끝까지 가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어, 미코.
나라는 인간은 이미 그렇게 이루어지고 말았으니까.
내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다면 아이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테지.
어쩌면 전부 잊고 평소와 같이 행동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나는 절대 내가 아니었다.
"내가 처녀를 잃지 않았더라면,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의 미코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괜찮아."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는 게냐."
아이의 말에 미코가 잔뜩 불퉁거렸다.
아무래도 작아진 제 몸뚱이가 원망스러운 듯 싶었다.
그래도 뭐, 작아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이가 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작은 편이 더 좋으니까, 응.
"아앙ㅡ"
"꺅?! 아, 아무튼! 그 녀석 곁에서 떨어질 생각 말거라! 알겠느냐?!"
"알겠어, 미코. 걱정해줘서 고마워."
미코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으니, 화를 내며 붉어졌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이건 부끄러움 때문에 빨개지려는 거려나.
쿡쿡 웃으며 입을 가리니, 어린 아이처럼 입술을 비숙 내밀어댔다.
"...그래서, 출발은 언제쯤 할 생각이지? 최소한의 채비는 하고 가야하지 않겠느냐."
"최대한 빨리 출발하려고는 하고 있어."
준비 같은 건 엘리가 미리 하고 있으니 곧 있으면 바로 출발할 수 있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여러가지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바보 천치 같으니."
"...미안."
코를 울리며 고개를 돌리는 미코의 모습에 자그맣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최대한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줘.
***
"용사님, 손님들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들?"
에반젤린 여왕이라면 전선에 자주 나타나는 편이었으니, 어쩌면 그녀와 그녀를 모시는 자들일지도 몰랐다.
만약 에반젤린 여왕이 맞다면 분명 젼선의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겠지.
확실히, 마족이 된 인간이라는 건 절대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에반젤린 여왕ㅡ"
"아서."
"...아리엘?"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손님은 에반젤린 여왕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황금빛에 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고 싶었어, 아서."
"이런 위험한 곳까지는 대체 왜ㅡ"
"네 도움이 필요해."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희게 물들었지만, 빠른 속도로 정신을 되찾았다.
순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꿈을 꾸고 있다고 하기에는 상대의 향기가 너무도 생생했기에 감히 현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도움이라니, 무슨 도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도울게."
태연하게 내뱉으랴고 한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어쩌면 그녀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리엘이 나에게 어떤 부탁을 할지를.
천천히 벌어지는 한 쌍의 입술을 응시하며, 아서가 마른침을 삼켰다.
다급하지만 또박또박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속에 담긴 뜻을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듣고 있는게 맞다면ㅡ
"왕도로, 가고 싶다고?"
"응."
주먹을 꾹 쥐었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반사적으로 안된다고 외칠 뻔 한 것을 참아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
절대 안 돼.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문장들을 억누르고는, 천천히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왕도로 가는 길에 중간에서 만난 아이가 나를 살리려다가 교단에 붙잡혔어. 구하러 가야해."
"...내가 다녀올 테니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될까? 네가 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야."
위험에 처하는 건 자신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아리엘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따위는 없겠지.
그래, 이 간절한 눈빛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분명 쉽게 설득해낼 수 있었을 텐데.
"가야 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아리엘..."
"이번에야말로,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끝, 끝이라...
그 끝이라는 건 마족과 인간 사이에 얽혀있는 악연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여신과 얽여있는 것들을 말하는 걸까.
무엇 하나 어서 끊어내야 할 것들이었기에, 순간 끌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ㅡ
"안 돼."
"..."
"네가 위험해지는 꼴은 내가 못 봐. 여신과도, 바로니스 국왕과도 언젠가는 반드시 끝을 볼 테니까, 나는 네가 안전한 곳에서 조금만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아리엘을 가장 아프게 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가 고통 받게 할 수 없었다.
용사이기 전에, 죄인이었고, 죄인이기 전에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 누가 사랑하는 이를 사지로 보내고 싶어하겠는가.
아무리 곁에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지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없었다.
"너를 나무라는게 아니야, 아리엘. 그냥, 그냥 내가 너를 완벽하게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네가 다치지 않게 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그래."
"...아서."
언제나 그랬다.
지켜려고 했던 건 대부분 제 손을 떠나갈 뿐이었으니까.
아리엘, 부모님과 친구ㅡ 그리고 희생된 다른 모든 이들까지 전부.
어떻게 보자면 두려움이었다.
그건, 자신이 사랑을 준 존재를 다시 한 번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강렬한 공포일 터였다.
"그렇다면, 네가 아니라 나를 믿어."
"..."
"나는 네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 누구보다 너를 제일 믿고 있으니까ㅡ 그런 너를 믿고 있는 나를 믿어줘, 아서."
서늘한 온기가 맞닿았다.
인간보다 차갑지만, 동시에 뜨거운 체온이 아서의 손을 붙잡아 왔다.
그 부드러움과 강인함에 숨이 거칠어져, 차마 거절의 말을 토해낼 수가 없었다.
사랑하게 된 자는 언제나 패배하게 될 것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아리엘을 사랑한 그 순간부터 자신은 그녀에게서 영원히 이길 수 없게 되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너를 믿을게 아리엘. 그리고,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어."
"...고마워, 아서."
까치발과 함께, 상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조금 건조하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을 통해 전해져, 그의 머릿속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향.
사랑하는 사람의 온도.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
그리고, 사랑이 담긴 숨결까지.
"사랑해, 아리엘. 이 세상 무엇보다."
"...나도."
황금빛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를 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겪어왔던가.
이 앞에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다고 해도, 둘이라면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뭐야, 그게. 오글거려."
언젠가 보았던 장면을 따라하자 새하얀 얼굴에 풋풋한 웃음이 스며들었다.
그런 아리엘의 모습을 보며, 아서는 다시 한 번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저 웃음을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