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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173화 (173/342)

Chapter 173 - 다시 그곳으로.(1)

"이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 같네요, 용사님."

"...그렇네."

숨을 내쉬는 것에 따라 새하얀 색의 입김이 풀풀 피어올랐다.

가장 처음의 여정에서도 엘리와 함께 했었더랬지.

지금은 교단의 성복을 벗어던지고 평범한 모험가의 옷을 입은 채였지만, 머리 위에 얹어진 베일 만큼은 그대로인 채였다.

"이기고 돌아오죠. 그리고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걸로. 알겠죠?"

커다란 짐가방을 등에 진 것이 꽤 아슬아슬했지만, 엘리의 얼굴에는 오직 평온함만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 드디어 출발이구나.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뒤에, 왕도로 향하기 위한 준비가 전부 끝났다.

남은 건 적들의 전선을 뚫고 지나가는 것 뿐.

"바로니스의 목을 치러 가는 건가?"

"에반젤린 여왕."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전선을 돌파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하지. 아무래도 셋으로는 꽤 힘들 테니 말이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은색 머리카락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전면전을 펼친다는 건 그만큼 희생이 발생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분명 그녀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결단이었을 터였다.

"너무 미안해 하지 말거라. 북부의 전사들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끼지 않으니까."

검을 뽑아든 여왕의 곁으로 몇몇의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여섯, 그 뒤에는 수십 수백의 전사들이 벌겋게 눈을 빛내며 제각각 무기를 뽑아들고 있었다.

북부에 승리를.

여왕님에게 영광을.

나지막하게 흩어지는 목소리를 타고, 그들의 투지가 하늘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마냥 너희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적의 목을 물어뜯기 위한 전투이지."

"...여왕."

"출전한다. 지금 당장."

거대한 북에서 심장 소리가 울려퍼지고, 전사들의 함성이 사방을 채웠다.

갑자기 퍼져나가는 전투의 격류에 상대의 진형이 어수선해졌다.

온갖 병장기와 사람들이 막사에서 튀어나와 대열을 갖추고, 넓은 벌판이 순식간에 강철의 향기로 물들었다.

"출발하거라. 전투가 심화된 뒤 출발하면 눈 먼 칼을 맞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여왕."

"감사할 필요는 없다. 이건 전부 승리를 위한 포석이니까. 그러니 반드시 해내도록, 아스테리아 경."

전사들의 가장 앞에 선 여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몸을 돌렸다.

"출발하자."

작은 읊조림과 함께 두 사람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여정을 끝내기 위해, 다시 왕도로 떠날 시간이었다.

***

인간 만큼 제 동족을 많이 죽이는 종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간들은 제 동족들이 다른 종족에게 죽는 것을 보며 격렬한 분노를 느끼지.

그렇기에 적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국가로는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인간들은 분명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나가 된 인간들은 더욱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게 되겠지.

"어쩌면, 저 하늘에 있는 여신에게까지ㅡ"

"국왕 폐하."

움켜쥐었던 손을 짓누르며 시선을 돌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기사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빅토르 보르곤체프.

교단의 하수인.

"그래, 북부에서 먼저 전면전을 걸어왔다지?"

"뭐, 목표가 제 발로 저희 쪽으로 와준다면 좋은 일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그래."

길게 뻗어진 손가락이 옥좌의 손잡이를 톡톡 두들겨댔다.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그 크기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단의 인간이 어째서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인가.

그 누구보다 앞서 마족들을 척결해온 광신도 집단이 대체 왜?

처음에는 그저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마왕을 붙잡아 죽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교단의 오랜 숙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잘 모르겠군.'

저 머리통을 박살내는 것 쯤이야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알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인간들이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인내라는 건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손님들을 위한 준비를 해야겠군."

마왕과 용사가 왕도에 도착한다면, 분명 교단의 지하에 있는 마족에게로 향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제 목부터 노려올지도 몰랐지만, 그의 감이 가장 첫 목표는 교단이 될 것이라 외치고 있었다.

마왕을 사냥하는 마족이라.

우습구나, 우스워.

동족이 되어버린 적에게 그 앞길을 가로막힌다니.

"교단에서도 최대한 준비를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여신님께서도 분명 당신들을 받아들이실 테니까요. 그것이 비록 마족으로 영락한 모습이라고 해도 말이죠."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로군."

비꼬는 듯한 말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알 수 없는 놈.

하지만 과연, 그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태연한 표정으로 있을 수 있을까.

"당신에게도 여신님의 축복이 깃들기를 바라겠습니다, 바로니스 국왕 폐하."

문이 닫히고, 다시 한 번 홀 안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여신님, 여신님이라... 참 웃기지도 않는 단어로군.

천장을 가득 채운 기괴한 그림들을 올려다보며, 바로니스 국왕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는 상관 없었다.

그저, 저 하늘 위에 있는 것을 떨어뜨릴 뿐.

***

"...흐엣치! 흐으..."

"아리엘 씨, 이거라도 더 입으세요."

"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처음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밖을 돌아다니니 추워 죽을 것만 같았다.

분명 껴입고 또 껴입었는데도 왜 이렇게 추울까.

원래부터 체온이 낮은 것과 동시에 몸이 약해져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여기서 더 입으면 굴러다녀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계속 추운 채로 있으면 감기 걸린다구요? 아리엘 씨는 몸이 너무 약해서, 감기에 걸리면 엄청나게 앓을거에요."

그것도 그렇네.

내가 떠나자고 한 여정에서 내가 아파버리면 그만큼 폐가 되는 일도 없을 테니까.

배낭에서 주섬주섬 망토를 꺼내든 엘리가 손에 들린 것을 그대로 내 위로 덮어냈다.

...옷 무게가 너무 무거워.

코를 훌쩍이며 망토를 붙잡자, 옆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

"아니, 그냥. 귀여워서."

"..."

내 뺨을 콕 찌르는 손가락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춥지도 않나봐.

분명 가벼운 무장 정도만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나와는 다르게 하나도 안 추워보였다.

저게 전부 근육의 힘이려나.

언젠가는 꼭 운동을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몸을 뒤덮는 옷가지들에 잔뜩 뒤뚱거렸다.

"쉿, 잠깐만."

그렇게 잠시 뒤.

나무 뒤로 몸을 숨기는 아서에, 나와 엘리 또한 근처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인기척이 이쪽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들킨 걸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길인 걸까.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니, 엘리가 긴장하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뭔가 적은 아닌 것 같아요. 자, 보세요."

"...그렇네."

빼꼼 고개를 내밀자, 두꺼운 망토를 두른 사람 몇몇이 주욱 이어진 길을 하염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우리가 지나왔던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을 보면, 북부로 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체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건데? 그냥 왕도에 있으면 안 됐던 거야?! 마차도 없고 진짜, 짜증나게 이게 뭐냐고!!"

"쉬잇! 조용히 해! 근처에 왕국군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우리가 왕국 사람인데 대체 왜 왕국군한테 도망쳐야 하는 건데?!"

앙칼진 목소리가 숲 안을 가득 채웠다.

조용히 시키려면 일단 입을 막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물론 이 근처에는 왕국군이 없지만서도 말이지.

"너도 봤잖아. 기사들의 머리에 뿔이 난 걸! 왕도에 난 소문이 맞았다니까? 용사님이 배신한게 아니라, 국왕 폐하가 타락하신 거라고! 아버지도 그걸 알고 우리를 북부로 피신시킨거고!"

"잘못 봤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진짜로 용사가 왕국을 배신한 거면 어떻게 할 건데? 결국 마왕의 목도 가져오지 못한데다, 심지어는 마왕이랑 같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잖아?"

확실히 같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ㅡ"

빠직.

"읏, 으아?!"

"아리엘 씨?!"

뭐랄까, 불의의 사고라고 할지...

슬슬 멀어졌다고 생각되어서 걸음을 옮기려고 했는데, 발을 헛디뎌서 균형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균형을 잃어버린 몸은 겹치고 겹쳐진 옷들 때문에 다시 균형을 잡지 못했고, 그대로 미끄러지는 안타까운 결과가 되었다.

"흣, 흐아, 꺄읏?!"

사람들의 발에 채이는 공의 심정이 이런 느낌일까.

몸이 마치 탱탱볼처럼 통통 굴러서는, 결국 아래쪽의 길바닥에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옷을 두껍게 입어서 다행이야.

맨 몸으로 떨어졌다면 분명 몇 군데 부러졌을 테니까.

"누, 누구냐!! 설마 습격자?!"

"...습격자는 아니다만."

이리저리 굴러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날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입은 옷이 너무 두꺼워서 그런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쪽팔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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