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9 - 다시 그곳으로.(7)
"...아리엘."
"..."
"아리엘?"
스스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닥에 자빠져서는 추한 모습으로 허리를 흔들며 절정하는 꼴을 보이다니.
그것도, 아서 앞에서.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못, 본 거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알겠으니까, 진정해."
내가 절정하는 모습을 보며 몇 번이고 정액을 싸낸 아서의 얼굴은 뭐랄까ㅡ 반쯤 해탈한 현자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더라도 태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거겠지.
정작 내쪽은 전혀 태연하지 못하고 있는데.
"으, 냄새가 배겠어..."
달큰한 애액의 냄새와, 진한 수컷의 향기가 사방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래서야 근처에 누가 오기만 해도 곧바로 들켜버릴 터였다.
'뒤처리를 해야 하는데...'
희미하게 보이는 체액 자국들에 절로 막막해졌다.
근처에 강이라도 있으려나.
이런 추운 날씨에 몸을 씻는다는 건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 없겠지만, 찝찝함과 동시에 풍겨오는 수컷 냄새에 머리가 광광 울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숨을 쉴 때마가 그 냄새가 올라와서 아랫배 쪽이 쿵쿵 울리기도 했고.
"다시 한 번 말라지만, 앞으로 입은 절대 금지야, 절대."
"..."
뭘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안 되는 건 안 된다니까?
...
아무튼, 닦아내기는 했어도 찝찝함 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로 '아, 씻고 싶다~' 같은 생각을 잔뜩 해댔다.
"아서, 혹시 근처에 강 같은거 본 적 있어?"
"강? 본 적은 있지만ㅡ"
"당장 가자. 더 이상은 찝찝해서 못 참겠어."
재빠른 움직임으로 가방에서 새 옷을 꺼내들었다.
설마 아서의 성처리 때문에 옷을 갈아입게 될 줄은 몰랐는데.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리자, 아서 또한 마찬가지로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리엘. 정말 괜찮겠어? 날씨다 이렇게 추운데..."
"...강 근처에 불을 피울까?"
빨리 씻고 나와서 바로 말리는 그런 느낌으로.
표정이 펴지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나쁜 의견은 아닌 듯 싶었다.
아니면 일단 수온을 먼저 확인 한 다음 생각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생각보다 넓네. 엄청 깊어보이지는 않지만."
바닥이 보이는 걸 보면 적당히 들어가서 씻을 깊이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죽거나 하지는 않겠지.'
뭔가 기준이 죽고 살고로 맞춰진 느낌이었지만, 살아만 있으면 전부 어떻게든 되니까 상관 없지 않을까.
강가 근처에 쭈그려 앉아서는, 투명한 물길 안을 마구 노려보기 시작했다.
손부터 넣을까.
아니, 일단은 얼마나 차가운지부터 확인하는게 낫겠지.
"읏, 차갓?!"
겨우 손가락만 담갔다가 뺐는데, 무슨 냉동고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차가웠다.
아직 해가 떠있는데도 이 정도의 한기라니.
만약 해가 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그냥 얼굴만ㅡ"
아니, 그 정도로 만족하기엔 너무 찝찝하잖아.
울상을 지으며 꽝꽝 얼어버린 손을 조물조물 문질렀다.
씻고 싶은데, 씻을 수가 없어.
분명 몸을 씻는 것보다 몸이 얼어버리는 편이 훨씬 빠르겠지.
'모르겠다.'
이런 건 자고로 망설이면 지는 거라고 했다.
영하 30도의 추위에도 보일러 없이 샤워를 했던 경험이 있는 나다.
겨우 이 정도 시련 따위에 굴복할 이유가 없었다.
"흐, 흐으... 흐엣치!!"
패기롭게 옷을 벗어내기는 했지만, 추워도 너무 추웠다.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만약 바람이 불었다면 분명 심장 마비로 비명 횡사 했겠지.
몸을 웅크리고는 바들바들 떨며 천천히 강가를 향해 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짓 따위 하지 말 걸.
아서의 욕구 불만을 해소하겠다고 괜히 까불다가 이런 변을 당하게 되다니.
"하나, 둘ㅡ"
첨벙ㅡ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담그기를 잠시, 뻣뻣하게 얼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대로 머리까지 푹 집어넣었다.
얼음장 같은 한기가 내 얼굴을 때리고, 그렇게 5초 정도 있다가 바로 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주, 죽을 뻔 했어.
심장 마비로 죽을 뻔 했다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달달 떨며 그대로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았다.
"...왜, 으, 왜, 그러느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나를 미친 사람 보듯이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아니,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너는 그런 눈로 보면 안 되는 거잖아!
괜히 짜증이 나서 아서의 옆구리를 꾹 눌렀다.
근육 때문에 아무런 타격도 없어서 더 짜증나.
"추워 할거면서 왜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어간 거야, 아리엘."
"...그냥 빨리 씻고 싶었다."
내 몸 위로 망토를 덮어주는 아서에 불퉁거리며 답했다.
늦게 씻으면 춥고, 그렇다고 씻지 않기에는 너무 찝찝했으니까.
모닥불을 향해 손을 뻗어 차갑게 얼어버린 몸을 녹여냈다.
"...어서 너도 씻고 오거라, 어서."
훠이훠이, 하며 마치 쫒아내듯이 손을 휘적였다.
나만 추위에 떨 수는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아무리 근육투성이 몸뚱이라도 저 정도 한기를 머금은 물에 들어간다면 분명 나처럼 될 터였다.
...그래, 분명 그랬는데ㅡ
"...아서."
"응, 아리엘."
"...혹시나 해서 묻는 거다만, 그게 무어냐?"
배낭에서 무슨 포대기 같은 걸 꺼내는데, 그 안에 물을 채우더니 그대로 모닥불을 향해 터벅터벅 돌아왔다.
그러고는 그 포대를 모닥불 주변의 무슨 철제 골자 같은 곳 위에 올려두고는 무언가 푸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뭔가 잔뜩 동정 받는 듯한 기분인데.
"...그런게 있으면 먼저 알려줘야ㅡ 흐엣치!!!"
"자, 더 덮고 있어."
"킁, 크흥... 훌쩍."
무어라 타박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아서의 몸이 너무 따뜻해서 일단은 참기로 했다.
원래라면 짜증이라도 잔뜩 내려고 했는데 특별히 봐주는 거야, 알아?
"자, 이리 와. 불에 데이지 않게 조심하고."
"...으응."
슬금슬금 움직여 앞에 앉으니, 아서가 내 몸 위로 따뜻한 물을 흘려보냈다.
...따뜻해.
차갑게 굳어 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리고, 기분 좋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설마 야외에서 이런 식으로 몸을 씻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나저나, 나만 벗고 있는 건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내가 갑작스럽게 옷을 벗기는 했지만, 지금도 안 벗고 있는 건 조금 뭐랄까... 부끄럽다고나 할까.
내 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괜히 투정을 부렸다.
나도 벗었으니까, 너도 벗어.
오히려 내가 옷을 입어야 하는 편이 맞았지만, 보여졌으니 봐야겠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 하나로 아서를 마구 닦달해댔다.
"춥지?"
"...춥네."
아무리 용사의 몸뚱이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은 사람이었는지 그 듬직한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자."
팔을 활짝 벌리고는, 잔뜩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원래 추울 때는 살과 살을 맞대는 거야, 알겠어?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그 모습이 어찌나 숫총각처럼 보이던지.
아직 씻지 않아서 땀 냄새와 함께 밤꽃 향기가 조금 났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이런 평화로움을 매일마다 만끽할 수 있겠지?"
"...그래."
괜히 감상에 젖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행복해지고 싶어.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상처 받지 않으며 살아가고 싶어.
쿵쿵 울려대는 심장이 차츰 그 속도를 빠르게 했다.
"내 곁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거짓이 아닌 진심을 전했다.
아서의 팔을 꼭 껴안자,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마치 찰흙처럼 뭉개졌다.
"나도, 내 옆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마왕과 용사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니, 사람들이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겠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마왕과 용사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사이가 되어버릴 줄은.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많은 일들이 있었더랬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을 만끽하며 마음속을 온기로 가득 채워냈다.
"요, 용사님?"
그러던 와중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나.
나체로 꼭 붙어 앉은 우리를 보며 얼굴을 가리고 있는 루나의 모습에,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손가락 틈 사이로 다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요즘 애들은 조숙하다더니...
"여기. 일단 조금이라도 가려, 아서."
"...너는?"
"나는 이거 있잖아."
슬쩍 옆에 치워둔 망토를 다시 들어올려 몸을 가렸다.
그나저나, 이건 대체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까.
뭐어, 굳이 변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서도.
"루나."
"네, 네엣... 아리엘 씨! 저, 그게, 그... 야외에서 그런 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인 남녀가 침대 위도 아니고 바깥에서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 건 여러모로 예의에 어긋나는ㅡ"
"루나?"
"지,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여기는 야영지에서 그다지 먼 곳도 아니고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찾아왔다가 보게 되면 두 분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
"물론 저는 비밀로 해드릴 수 있지만ㅡ 아, 그렇다고 이걸 빌미로 용사님과 포옹 한다던지 하는 사심을 채울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좋아요! 저는 임자가 있는 분을 탐할 만큼 염치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안 되겠어.
이 아이, 전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