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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35화 (235/342)

Chapter 235 - 나의 아이들.(3)

"혹시,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니?"

"..."

오랜만에 아이를 만난 다음 처음으로 한 물음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다시 만난 가족에게 내 얼굴을 기억하느냐고 묻는 듯 아주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정작 변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ㅡ 정확히는 아이의 몸집만 조금 더 커진 것이 전부였다.

"알고 있어요."

"...그렇구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구원 받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이다.

잊혀지지 않았구나.

나라는 존재는 이 자그마한 아이의 머릿속에 들어있어도 되는 존재로구나.

심장이 저릿해짐을 느끼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이거면 충분해.'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었다.

마키나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기에, 겨우 이 정도의 만남마저도 나에게 기쁨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자그마한 몸을 품에 한가득 끌어안고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가족들이 있으니까.

나 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가족.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 같은 사람."

"...!"

하지만 그 한 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분명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다리를 움직이려는 찰나였는데, 아이의 말에 순간 못이라도 박힌 듯 걸음이 멈춰버렸다.

그러니까, 방금 뭐라고?

"예전에 했던 것처럼 안아주세요."

"...그래."

"헤헤, 따뜻하다."

머뭇거리면서도 아이를 꼭 끌어안자, 아이가 해맑게 웃어보였다.

따뜻하다니.

분명 내 몸은 드워프가 느끼기에는 차가울 터였을 텐데도, 아이는 내 몸이 따뜻하다고 말해주었다.

착한 아이구나.

어른을 배려해줄 정도라니.

"제 이름은 마키나에요, 두 번째 엄마."

"나는, 나는 아리엘이라고 한단다. 마키나."

그때는 하지 못했던 통성명이었다.

단순히 이름을 교환했을 뿐인데도 어찌나 기쁘던지, 절로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 순간을 얼마나 워해왔던가.

내가 낳은 아이들이 나를 이토록 평범하게 받아주기를, 얼마나 많이 원해왔던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힘 없이 벌려진 입술 사이에서 자그마한 오열이 터져나왔다.

"마키나, 마키나, 내 아가..."

"괜찮아요, 괜찮아... 무서운 건 아무것도 없어요. 뚝, 뚜욱..."

자그마한 손길의 감촉을 느끼며 한참이고 울었다.

분명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도, 부끄러움도 모른채 마치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이래서야 어느쪽이 아이고 어느쪽이 어른인지.

그 사실을 떠올리니 이번에는 웃음이 나왔다.

머릿속의 나사 몇 개가 힘 없이 풀려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고르돌의 딸이네?"

"레이나."

"엄청 오랜만에 보네, 그리워라~"

머리 위에서 툭, 하고 떨어진 레이나가 아이의 볼을 조심스럽게 찔렀다.

아이는 갑자기 나타난 레이나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게 그런 식으로 툭 떨어지듯이 나타나지 말래도.

무어라 레이나를 타박하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정님이다..."

"고마워요, 꼬마 공주님."

요정이라는 말이 듣기 좋았는지,레이나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 움직임에 맞춰서 세계수의 가지가 흔들렸는데, 아무래도 레이나의 기분을 읽어내고는 즐겁게 춤을 추는 듯 싶었다.

그나저나, 세계수도 엄청나게 커졌구나.

내 뱃속에서 태어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지금은 팔로 껴안아도 한 번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전부 모인 셈이구나."

"...그렇네, 응."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한숨을 토해내듯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전부 모이는 건 어떨까.

거절할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는 확실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모으지도 않았을 테니까.

***

"...흠."

"...으음."

"..."

분위기가 어색했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잘만 떠들고 웃던 사람들이 전부 합쳐서 모아놓으니 하나 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잘못된 선택이었으려나.

괜히 후회가 되어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니, 아서가 슬쩍 내 손을 잡아왔다.

"오랜만입니다, 고르돌 씨."

"그렇군. 아주 오랜만이야, 아서. 못 본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구먼."

"다 아리엘 덕분이죠, 뭐."

고르돌은 아서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나에게 살갑게 구는 것도, 혹은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별로 달갑지 않은 듯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떨떠름하다고 말해야 할까.

못 본 사이에 사람이 너무 많이 바뀌어 버린 것이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레이나와 에밀리는... 젊어졌군."

"어려졌지."

"...그거나 그거나."

정수리부터 발 끝까지.

저와 비슷한 크기가 되어버린 에밀리와 레이나를 훑어내린 고르돌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울리지 않는 걸 봤다는 듯한 느낌이랄까, 방금 본 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내기 위한 행동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혼인을 올렸다지?"

"그렇습니다."

"기념으로 축하주라고 한 잔 하지. 고향으로 돌아가서 빚어낸 술을 가져왔거든."

역시 드워프.

품 안에서 술병을 꺼내드는 모습에 에밀리가 질린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함께 다닐 때도 이런 경우가 꽤 있던 모양이구나.

"자네는 마시기 싫으면 마시지 말게."

"...딱히 그런 건 아니거든?"

에밀리가 손에 들린 책을 탁, 하는 소리가 나게 덮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니,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슬쩍 다가와서는 그대로 품에 몸을 묻었다.

그와 동시에 고르돌의 얼굴이 정말 못 볼 것을 봤다는 듯한 얼굴로 바뀌었지만서도.

"평소에도 저러나? 그렇다면 조금 소름이 돋을 것 같은데. 아니, 이미 돋았군. 빌어먹을."

"사람은 원래 변하는 법이야, 망할 수염쟁이."

"털도 자라지 않은 애새끼 보다는 낫지 그래. 껄껄."

순식간에 시비가 붙었다.

솔직히 두 사람의 사이가 그렇게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이래서야 원수 이상 지인 미만의 관계나 다름 없잖아.

이렇게 된 이상 분위기를 돋굴 만한 사람이ㅡ

"그나저나, 엘리. 원래부터 마족은 아니었지 않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답니다."

언제 따라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술잔을 홀짝인 엘리가 태연하게 답했다.

엘리, 너에게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무어라 설명이라도 해줘야 하는게 아닐까.

물론 엘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최근 자신의 교육 관련해서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었지.

그래서 그런지 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뭐야, 고르돌이 있네?"

"...케이?"

그러다가 난입한 목소리가 또 하나.

케이의 등장에 고르돌의 눈이 엄청나게 커다래졌다.

확실히, 그의 기억 속에서의 케이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을 테니까 말이지.

나와 케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것이 마치 케이도 내가 낳은 것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이래서야 마왕이 아니라 성모 같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답니다."

"...왜 트집을 잡는지 알 것 같구나."

태연하게 그런 소리를 하는 엘리에 작게 딴지를 걸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성모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단 말이야?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설명이라도 해보라는 듯한 의미를 담아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런 접촉마저도 좋은지, 대답은 하지 않은채 빙긋 웃기만 했지만서도.

"성모 아리엘이라... 어감은 좋네."

"케이, 너까지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그러면 아리엘에게서 성자가 태어나는 거야? 아니면 성녀?"

"그만하래도..."

아무래도 케이는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더 보고 싶은 것 같았다.

겨우 그 정도로는 성에도 차지 않는다는 걸까.

손을 뻗어서 저 잔망스러운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내 손은 이미 레이나와 에밀리에게 꼭 붙잡힌 채였다.

...너희도 케이 편인 거니?

"아무튼, 이렇게 모인 것도 오랜만이니 다들 한 잔 씩 하지."

"나는 싫어. 어린애 몸뚱이는 일찍 취해서."

"나도 거절하지. 엘프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절대 음주를 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에밀리와, 원래 말투로 돌아온 레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신체가 성인이 아니니 마시지 않겠다는게 그 이유였다.

물론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사람 하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었지만서도.

"케이."

"아아, 한 잔만! 고르돌 씨 특제 술은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구? 심지어 마지막으로 마신게 죽기 전이었단 말이야!"

제 죽음을 태연하게 입에 올리는 것부터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몸으로 술을 마시는 건 조금 아니지 않아?

별 대답 없이 뚫어져라 바라보니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안 마시겠다며 꼬리를 내렸다.

그래, 진작부터 그랬어야지.

그렇다면 남은 건 엘리랑 아서 뿐인가.

엘리는 이미 마시고 있었으니 아서 한 명 분 정도면 되겠지.

"자, 마시거라."

"...고맙기는 한데, 괜찮겠어?"

"? 당연히 괜찮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느냐?"

뭔가 내 허락을 구하려는 듯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부터 나한테 잡혀 살았다고.

술 마시는 것까지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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