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6 -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1)
아서가 취한 건 보지 못했지만, 설마 이런 주사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아리엘, 사랑해."
"그래, 나도 사랑한다."
"아리엘, 사랑해."
"...그래."
"아리엘ㅡ"
"......이제 그만 좀 해주지 않겠나?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다만."
나를 품에 안고는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서에 입술을 비죽였다.
저 술주정 속의 아리엘은 과연 누구일까.
소꿉친구인 아리엘? 아니면 나?
물론 내가 좋아, 소꿉친구가 좋아 같은 유치한 질문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뭐랄까, 계속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부끄러울 뿐이었지.
"이렇게 보니까 진짜 부부구먼."
"...우리는 진짜 부부였다만."
"마지막에 봤을 때는 원수였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
마지막으로 고르돌을 본 날의 우리는 원수ㅡ 혹은 상처 입은 피해자들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니까 이렇게 된 것도 참 신기하구나.
우리 이야기를 글로 써서 소설을 쓴다면 여러모로 욕을 잔뜩 먹을 것 같았다.
개연성이 부족하다느니, 용사 일행에게 왜 복수하지 않았느냐니 그런 느낌으로.
'하지만, 그렇게 복수 했다면 이 정도로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겠지.
행복을 원했기에 용서를 했고, 용서를 했기 때문에 사랑을 얻었다.
만약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터였다.
"끝났다는 체감을 용사와 마왕의 혼인에서 느낄 줄은 몰랐는데."
고르돌이 허허로이 웃어보였다.
그는 길고 길었던 마족들과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에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여신이 죽은 다음에는 허탈함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고르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분명 모르고 있겠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여신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을.
그러면, 내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나 유하게 나를 대해주는 건가?
그건 또 놀라웠다.
"고르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말해보게."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 말인데ㅡ"
솔직히 말하면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도 좋았다.
굳이 이런 말까지 해서 그를 혼란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훗날을 위해서였다.
먼 미래에 마족과 인간들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 주범이 마왕이냐 여신이냐는 큰 차이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많이 만들어 두는 편이 좋겠지.
"...그렇군. 어쩐지 이상하기는 했어."
"이상함을 느꼈단 말인가?"
"여신이 처음 강림 했을 때 말일세, 무언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거든."
그건 분명 여신의 축복ㅡ 세뇌일 것이 분명했다.
그 무렵의 용사 일행들은 무언가 하나 같이 나사가 빠져 있었으니까 말이지.
"강림하기 위해서는 마왕의 피를 묻혀야 하는 것도 요상했지. 여신이 마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아귀가 맞는군."
"...믿어주는 건가? 마왕이 하는 말을?"
"믿어야지. 아서가 그렇게 좋아 죽으려고 하는데."
고르돌이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려두고는 무어라 무어라 웅얼거리는 아서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
술에 취하면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고, 만약 여전히 나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꼭 달라붙지도 않을 터였다.
설마 이렇게 취해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나저나, 용사가 술에 취하기도 하는군."
"아서 녀석도 인간일세. 술을 잔뜩 마시면 취하지."
"...너는 취하지 않은 것 아닌가?"
"물론 나는 드워프니까! 술에 한해서는 용사보다도 더 용사 같은게 드워프라는 종족일세, 하하!"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술을 향해 뻗어지는 손을 꼭 붙잡았다.
과음은 안 된다고 했지?
그런 의미를 담아서 손등을 톡톡 두드리니 더 마시고 싶다는 듯한 칭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러게 안 된데도 그러네?
손을 꾹 잡아 멈춰 세우니 정수리를 턱으로 꾹꾹 눌러댄다.
"아, 아팟?!"
"아리엘..."
"과, 과음은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 와중에도 힘조절을 하는게 우습기는 했지만서도.
뭔가 지압을 당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뿔이 잘린 다음부터 머리 쪽이 조금 더 예민해지기도 했고.
"고르돌, 혹시 도와주지 않겠나?"
"흠, 기꺼이 도와주지. 내가 뭘 하면 되겠나?"
"아서 좀 침대로 데려가 주거라."
어서 재우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 같았다.
나보다 덩치도 힘도 훨씬 강한 아이를 돌보라니, 그럴 수는 없지.
나에게서 아서를 강제로 떼어놓는 고르돌에게 작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고맙구나, 도와줘서.
"아리에에엘..."
"그래, 나 여기 있으니 그만 좀 칭얼거리거라. 어린애도 아니고 왜 자꾸 그러는 게냐?"
"...상냥하게 말해줘."
"..."
상냥하게 말해달라니, 여기서 더 어떻게?
침대에 누운 아서를 향해 슬쩍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니 술 냄새가 훅, 하고 풍겨왔다.
...엄청 독한 술 냄새.
알코올이 얼마나 들어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셔봤던 그 어떤 술보다 더 독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서."
"...응."
"이제 자야지, 응?"
"......응."
"하아, 애도 아니고..."
아서는 술이 들어가면 정신 연령이 어려지는 스타일이구나.
원래도 별로 정신 연령이 높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서도.
주로 메이아를 상대할 때.
아무튼, 침대 위에 누운 아서 옆으로 슬쩍 몸을 뉘였다.
완전히 누운 건 아니고 반쯤 기대는 느낌으로.
"왜, 몸이라도 토닥여 줄까?"
"응..."
"이제는 응 밖에 말하지 못하게 되어버렸구나."
손을 뻗어, 아서의 배 부분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몸집만 큰 우리 아가.
술 많이 마셨으니까 이제 그만 자야지, 응?
"아서."
"..."
"언제까지나 함께했으면 좋겠구나."
눈을 꼭 감고 잠든 아서의 입술에 마주 입을 맞췄다.
이 행복이 쭉 이어지길.
이 사랑이 변함 없기를.
독한 술 향기가 코를 찔렀지만, 아서의 체향이 더 강렬했기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네가 술에 취한다면, 나는 너의 사랑에 취할 거야.
'...따뜻해.'
마족에게 있어서 인간의 체온은, 자그마한 태양과도 같았다.
***
"...아서."
"응, 아리엘."
"우리, 분명 관계를 가지지 않았었나?"
메이아 몰래ㅡ 들키기는 했지만서도.
아무튼, 분명 그 밤에 관계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불러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지?
대체 왜?
설마 꿈이었나 싶어서 아서에게 물어보니 관계를 맺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걸까.'
생각지도 않던 상황에 심장이 쾅쾅 뛰었다.
설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걸까.
최근에 일곱 쌍둥이를 낳아서?
아니면 몸 관리를 잘못 했나?
그것도 아니라면ㅡ
"진정, 진정해 아리엘!"
"허억, 흐아, 흐으윽..."
내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숨을 안 쉬고 있었구나.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서에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직 뭐라고 밝혀진 건 없어.
일단은, 일단은 진정하는 거야.
"엘리에게 가보자. 가서 일단 진료부터 받은 다음 생각해, 응?"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나를 부축하는 아서의 손길에 따라 엘리가 있을 진료소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목에서 온갖 생각이 잔뜩 들었지만, 옆에서 달래주는 목소리 덕분에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지금까지 이상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이상 없을 거야.
"아리엘 씨? 왜 그런 표정으로..."
"아기, 아기가...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 같아."
"...이쪽에 앉아주세요."
괜히 진찰을 받기가 싫었다.
혹시라도 이상이 있다고 나온다면 내 잘못이 되어버리니까.
웃옷을 걷어달라는 요청에 옷을 들어올리고는 숨을 참았다.
차가운 청진기의 감촉과 함께 엘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의사 같구나.'
부디 이상이 없기를 바라며 몇 초.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이지만 조마조마해졌다.
"딱히 이상은 없어요."
"...이상이 없다고? 그게 청진기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나?"
"네, 왜냐하면 배 속에 아기가 있거든요."
...아기가 있다고?
하지만 배가 불러오지는 않았는데.
"아리엘 씨께서는 임신을 하면 하루 만에 배가 불러오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관계를 가지고 하루만에 만삭이 되지는 않는다구요?"
"그건, 그렇지."
"성장이 평범한 아기들에 비해 길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평범한 경우라고 생각 해보죠."
엘리가 웃으며 말했다.
배에 아기가 자라고 있으니 몸 관리를 잘 하라는 이야기는 덤으로 해줬고.
되도록이면 세계수와 함께 있으라는 충고 아닌 충도 또한 들었다.
...이상이 없구나.
정말 다행이야.
"괜히 걱정 끼쳐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리엘 씨의 일이라면 해야 하는 걱정이니까요. 너무 폐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된다구요?"
"...고맙구나."
"네, 그 한 마디면 충분히 보답이 된답니다."
지금 만큼은 그녀가 커다란 태양처럼 보였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반했을지도 모르겠는걸.
싱긋 웃으며 미소로 화답하자, 내 등 뒤에 서 있던 아서가 슬그머니 어깨를 끌어당겼다.
"...설마 엘리에게도 질투를 하는 건가?"
"원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일 수록 조심하야 하는 법이야, 아리엘."
그렇다고 엘리를?
정말 못 말린다고 생각하면서도, 등 뒤에 있는 아서와 시선을 나누고 있는 엘리를 바라봤다.
...딱히 조심해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이상한 짓을 하기는 했어도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성녀에서 치료사로 전향한지도 오래였고.
"그러면 아리엘 씨, 또 볼 일 있으면 찾아와 주세요."
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