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9 - 당신과 나의 비밀스러운 토론회.(1)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건가요, 당신!"
"...아?"
언젠가는 기억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ㅡ
어라.
그런데 그게 지금?
"진짜?"
"우윽, 무, 뭐하는 짓인가요, 당신!!"
손을 뻗어, 아이의 뺨을 주욱 잡아당겼다.
아파하는거 보니까 진짜인 것 같은데.
원래의 아이라면 아픔 같은 건 모른다는 듯 얌전히 있었을 테니까.
...큰일이네.
준비조차 해놓지 않아서 당황하지를 못했다.
원래는 잔뜩 당황하려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기억을 되찾았구나."
"일부러 정신을 살려놓지 않고 최소한만 활동 했으니까요. 아니, 그것보다!"
"응?"
아이ㅡ 여신이 내 옷자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여신. 여신이라고 한다면 마족들의 시조라서 그런지 힘이 좋았다.
조금만 더 강하게 잡아당기면 옷이 찢어지겠는걸.
나를 향해 증오를 마구 쏟아내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무섭지가 않았다.
뭐랄까, 귀엽다고나 할까?
"아직도 그렇게 내가 밉니?"
"...그래요. 증오스러워서 미칠 것 같아요."
"...그렇구나."
아이의 투정처럼 보이는 이 모습 뒤에는 진한 분노가 스며들어 있겠지.
손을 뻗어 낸다고 한들 분명 매정하게 쳐내질 터였다.
뻗지 않는 편이 좋아.
저 자그마한 모습 안에 어떤 가시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 처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라고?
내 마음속의 목소리가 마구 속삭여댔다.
'진정하자, 아리엘. 너는 마왕이지만 동시에 마왕이 아니야. 여신에 대한 증오심을 버려. 지금은 그저, 아이일 뿐이니까.'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아이를 안아올렸다.
발버둥을 치며 저항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덩치 차이를 이용해 억지로 안는데 성공했달까.
잔뜩 저항하다가 제 풀에 지쳐 숨을 몰아쉬는 여신을 보며 쓰게 웃었다.
차라리 시간이 더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 텐데.
"이제 전부 다 끝났어. 봐, 네 머리 위에 뿔이 없지 않느냐."
"..."
"그리고 내 머리 위에도 뿔이 없고. 이건, 네가 앞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뜻과 같지."
그런 것이었다.
죽기 전의 여신이 자신의 부활과 복수를 위해 이런 일을 했다면, 지금은 완전한 부활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여신은 그저 마족일 뿐, 더 이상 신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아서 선에서 쓰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너를 놀리려고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야. 그냥, 더 이상 싸우기에는 서로 이득 볼 것이 없다는 이야기란다."
"...저를 그렇게나 힘들게 만든 존재를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한 가지 알려줄까?"
하고 싶은 말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큼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 향하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물론 말을 그만두지는 않겠지만서도.
"나는 엘리도, 고르돌도, 에밀리도, 아서도, 그리고 너도 미워했었지. 그런데 전부 용서했다. 그 이유를 알겠나?"
"그걸 이해할 수 없어서 이렇게 나온거랍니다, 바보 같은 마왕님."
"이유라고 한다면 미워하는 것보다 더 크게 사랑을 줬기 때문이란다."
"..."
미워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을 주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해자를 평생 죽일 놈으로 남겨두는 것보다는, 용서하고 친구나 가족으로 두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심지어 그들이 마냥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사연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 물론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겠지.
그렇지만,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가 아닐까?
'뭐, 어떻게 보자면 전부 궤변에 불과하지만서도...'
그나저나, 이런 말똥말똥한 눈을 올려다 봐지는 입장이 될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그 대상이 여신이기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보니 조금이지만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모르겠어요. 진심으로."
"모를 수 있어. 그저, 천천히 알아가면 될 뿐이지."
상대가 멍하게 있는 틈을 타서 은근슬쩍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뭔가 평소에 쓰다듬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다고나 할까.
이런 모습의 여신을 보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내가 여신을 쓰다듬었다! 같은 느낌으로.
"...아무튼, 정확한 답은 천천히 알아가도록 하겠어요."
"...여신?"
"..."
"..."
아이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얼마 전의 상태로 돌아왔다.
여신과는 정 반대로 나에게 꼭 달라붙어오는 아이의 온기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완벽하게 회복된게 아니었구나.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도,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동안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겠지만ㅡ
뭐, 어떻게든 되겠지.
***
나에게 있어서 마왕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처음은 자신에게 복수를 했다는 것.
그 뒤의 것은 그런 짓을 저지른 나를 용서한 것.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완전한 용서.
그리고 쏟아지는 사랑까지.
'대체, 왜?'
뛰지 않는다고 생각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어댔다.
분명 의식을 반쯤 끊어놓은 상태라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야 할 텐데도.
아니, 몸에 대한 것을 느끼는게 아니야.
영혼이.공명하고 있는 거였어.
'...쓸모 없는 몸뚱이 같으니라고.'
겨우 마왕이 주는 온기 따위를 진짜라고 착각해서 안심하는 꼴이라니.
속이 터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만약 영혼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이런 떨림 따위 절대로 느끼지 않았겠지.
증오하는 상대에게 호감 같은 걸 가질 리가 없었으니까.
'그만, 그만 좀 두근거려!'
아주 조금 의식의 농도를 짙게 하자 나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영혼이 삐걱거렸지만, 이상한 감정에 매몰되는 것보다는 조금 더 고통스러운 편이 더 나았다.
"...으응."
이 정도면 움직, 이려나.
아직 제대로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간만에 얻어낸 몸이라서 그런지 아주 약간 정도는 기분이 좋았다.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작게 목소리도 내본다.
자신에게 있어서 유년기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이렇게 작은 몸을 해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읏."
그러고 보니 저 마족,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지.
아무런 의식이 없는 척 가만히 앉아있으니 마족의 커다란 몸뚱이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엄청 크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혼자 계시느라 외롭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습니까?"
"..."
"그러셨군요. 바로 마왕님게 데려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안아드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저항할 뻔 했다.
이거 놔! 이 더러운 마족 따위가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거야?!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한 말을 꾹 집어삼키며 그대로 몸을 맡겼다.
어차피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거, 이런 식으로라도 움직이는 편이 낫겠지.
"메이아 씨, 아리엘 씨에게 가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 그러면 같이 가요. 태교에 좋은 물건을 찾은 것 같아서요."
감히 내가 선택한 성녀가 머리 위에 뿔을 달고는 마족에게 싱긋 웃어보이는 꼴이라니.
원래라면 신의 혼을 담기 위한 매개체로 사용되었어야 했는데, 제 손으로 처녀성을 버려내고는 그저 평범한 무언가가 되어버렸더랬다.
...신성력이 얼마나 강대한 힘인데, 그걸 버려?
심지어 태교에 좋은 물건을 대체 왜 찾는데?
"그나저나, 그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나요? 저번에 아리엘 씨에게 '마마'라고 불렀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뭐, 아가씨께서는 워낙 말씀이 없으시니까요."
"아가씨라... 확실히 아리엘 씨랑 똑같이 생겼으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ㅡ"
누가 누구를 닮았다고 말하는 걸까, 이 바보 같은 성녀는.
닮았다는 말을 듣는게 기분 나쁜 건 둘째로 치더라도, 어느 쪽이 상대방을 닮았는지를 따지자면 당연히 마왕 쪽이 나를 닮은게 당연했다.
애초에 살아온 기간으로 따진다면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ㅡ역시, 여신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괴롭히고 싶기도 하네요."
"..."
에잇,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뺨이 주욱 늘어났다.
아프지 않게 힘 조절을 한 덕분에 놀라지는 않을 수 있었지만, 아프지 않다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다는 뜻이 되지는 않았다.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고역이네.
뺨을 잡아당기는 손가락을 콱 깨물어주고 싶었다.
히죽히죽 웃는 표정도 짜증났고.
똑똑ㅡ
"아리엘 씨, 들어가도 될까요? 메이아 씨랑 꼬마 여신님도 같이 왔어요."
"들어오려무나."
꼬마 여신님이라는 말에 한번 더 기분 나빠진 상태로 방 안에 들어섰다.
불룩 불러온 배를 아주 사랑스럽다는 것처럼 쓰다듬는 모습이 참 역겹달까...
심지어 얼마 전에 내 인격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런 얼굴이라니,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경계 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 이리 오려무나."
"..."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받아드는데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달까, 아니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달까.
...설마, 아니지?
"아가."
"..."
"...또 보는구나."
속삭이듯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들켰구나.
그것도, 처음 보자마자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