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5 - 단란한 가족.(2)
방에 돌아와서 보니 아서가 여신의 볼을 주욱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잡아당기고 있었다는게 맞겠지.
"흐, 흐으으으으..."
"이제 괜찮아. 응, 괜찮단다."
커다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의 볼을 호호 불어줬다.
그러게 왜 애를 울려.
시선을 돌려 아서를 째려보자, 그가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전력을 다해 등짝을 두들겼음에도, 아서는 딱히 아파보이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저 잔뜩 충격 받은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지.
"저 녀석이 먼저 시비 걸었어."
"애가 시비 걸었다고 진심으로 대응하는 어른이 어디 있다고. 아무리 여신이더라도 지금은 아이이지 않느냐."
"...기억이 돌아왔던데."
"기억이 있다고 해도 애는 애다."
아서에게 타박을 하면서도 품에 안긴 아이를 어르고 달래자 조금씩 울음이 멈췄다.
아무리 마족의 몸이라고는 해도 어린아이인데다 용사의 완력까지 생각하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아가. 이제 너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에게서 태어난 아기를 아가라고 부르는 건 아이의 기억이 돌아오기전까지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이 돌아온 상태.
그렇다고 여신이라고 부르기에는 그건 이름보다는 호칭에 가까운 모언가였다.
아이는 어떻게 불려도 상관 없다는 듯이 굴겠지만, 그런 건 내가 용납하지 못한다고나 할까.
"...딱히, 뭐라고 불려도, 상관 없어요."
"그렇다면 아리엘 2세라던지?"
"제가 왜 당신의 2세인 건데요?!"
"그렇다면, 엘은 어떻니?"
그 한 글자에 담긴 뜻이 얼마나 거대한지, 너는 알고 있을까.
언젠가 인간도 마족도 아닌 이상한 녀석이 만지작거리던 문헌에 있던 이름이었다.
신을 뜻하는 한 글자.
지상에 내려앉은 인간들을 굽어살피는, 저 하늘 위의 누군가.
"...이름을 지어준다는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계시는 건가요?"
여신이 이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고운 시선으로 보는 건 아닌 듯 싶었다.
언젠가 신은 완벽한 존재이기에 이름이 필요 없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
"모르지만, 지금의 너도 신은 아니니 이름 정도는 가지는 편이 좋을 거란다."
"굳이 그렇게 제가 처한 현실을 들이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미안하구나."
"......딱히 미안할 필요는 없어요."
천천히 뻗어진 손이, 내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면, 제 이름을 불러봐요.
당신이 지어준 그 이름으로, 저를 불러보세요.
"엘."
"당신의 이름 안에 제 이름이 들어있네요."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내 이름에 네 이름이 들어갈 정도로 네 이름이 소중한 글자라는 뜻이 아닐까?"
빙긋 웃으며 아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자,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내 품에 기대왔다.
봐, 이렇게 보니까 꽤나 닮지 않았니?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
마족임에도 찾아볼 수 없는 뿔.
"자, 아서. 이렇게 보니까 정말 완벽한 가족이지 않느냐?"
"그렇네."
"...조금 성의를 담아서 답해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영혼 없는 목소리로 답하는 아서에게 조금 핀잔을 주었다.
곧바로 친해지거나 화해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야 나중에 어떻게 되던지 할 테니까.
나와 똑 닮은 외형만 보고 아이를 사랑하기에는 아직 속에 응어리진 감정이 꽤 큰 모양이었다.
"자, 그러지 말고 이리 와보거라. 똑 닮았지 않느냐? 따지고 보면 내가 엘을 닮은 것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니 내 어렸을 적 모습 같아서 사랑스럽지 않나."
"...눈매가 더러워."
"저도 당신 같은 쓰레기 용사는 싫거든요?"
친해지라고 끌어당겼더니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눈싸움을 해댄다.
일단은 안 되겠네.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일단은 두 사람을 서로에게서 떼어냈다.
이러다가 또 아서가 아이를 울려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자자, 두 사람 다 싸우지 말고. 일단 아서, 잠시만 밖에 나가다오. 아이와 잠시 이야기 좀 나누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줘."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만ㅡ 일단, 알겠구나."
문 밖으로 나서는 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어디부터 고쳐가야할 관계인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아빠와 사이가 안 좋은 딸은 더러 있었지만 이건 또 어떨런지...
"아서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니?"
"그냥이라고 하면, 납득 할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에 '그냥'이 있기는 했지만, 아이의 표정에 떠오른 혐오는 그냥 튀어나올 법한 종류가 아니었다.
여러가지 이유와 감정이 뒤섞여 있는 무언가.
아서가 여신에게 무언가를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제 아이를 홀린 녀석과 똑 닮아서 싫어요."
"...어머니를?"
"네. 그 녀석만 아니었다면ㅡ"
"내가 태어나지 않았겠지."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렇겠지.
원래 자신의 자식을 채가는ㅡ 심지어 딸을 채가는 녀석이라면 상대가 누구라도 좋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와 어머니의 취향은 비슷하다는게 될까.
싱긋 웃으며 중얼거리자, 진심으로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당신은 저런 겉만 번지르르한 놈에게 넘어가지 말라구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아하하...."
어색하게 웃자, 내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리고는 튀어나오는 한 마디.
"이혼하세요."
"이혼이라니..."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우습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당신 쪽이 훨씬 아깝거든요? 마왕이면서 마왕의 딸이자, 마신의 손녀인데 무엇이 좋다고 저런 쭉정이를 만나요?"
순간적으로, 아이의 모습이 깐깐한 시어머니 같은 느낌으로 변했다면 기분 탓일까.
길거리의 양아치 같이 쨍하게 물든 금색 머리카락이며 자신을 대할 때의 태도하며 전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는 아이에 쓰게 웃었다.
길거리의 양아치보다는 어딘가의 귀족이 가질 법한 금발이기는 한데.
전장에서 구를 때나 푸석푸석 했지, 지금은 꽤나 관리를 해서 자주 윤기가 넘치는 깨끗한 금발이 되었더랬다.
물론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거나 그거나 전부 같아보일 테지만.
"사랑에는 이유가 필요 없는 법이란다."
"..."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마왕이 하기에는 완전 꽝인 말이었어요, 방금."
"뭐, 지금은 마왕이 아니니 딱히 상관 없지 않겠느냐."
마왕이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마족들이 거의 없는 이상 마왕이라고 불리기에도 애매했다.
딱히 불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애초에 인간들에게 두려움과 증오의 의미로 많이 불리던 호칭이었기에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게 내 속마음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마족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다고 했었지...'
잔존 세력이나 그런게 아니라, 대륙 곳곳에 살아남은 마족들이 내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드는 것에 불과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예상에 팔려갔던 이들이었지만.
"엘. 잠시 만나러 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같이 가겠느냐?"
"또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닐지 모르니까, 같이 가드리죠."
딱히 사고를 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뭔가 자식이 무슨 일을 하는지 감시하려고 하는 부모 같은 대사였다.
뭐, 거절하지 않아준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한 일이었지만서도.
품에 안긴 아이를 들어올려 바닥에 내려놓자, 내 손을 슬쩍 붙잡아온다.
"그, 그러니까 이건! 그으, 으......"
"다행이구나. 이 정도로 친해질 수 있어서."
의식이 없던 때에 쌓아온 유대가 이런 효과를 발휘하게 될 줄이야.
물론 아이가 마음을 열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순식간에 얼굴을 붉힌 엘의 뺨을 살짝 쓰다듬은 다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에반젤린에게 말하는 편이 좋겠지.
애초에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기는 하지만서도.
"오랜만이구나, 아리엘."
"그렇구나."
분명 내 방과 에반젤린의 방은 꽤나 가까웠는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그건 내가 늦게 일어나고 에반젤린이 일찍 일어나는 편인 것을 감안해도 꽤나 만나지 못한다고나 할까.
최근의 에반젤린은 상당히 바쁘니까.
환경이 변하고 있는 북부의 대지를 확인하랴, 마족과 인간들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밑작업을 한다던지, 혹여나 모를 침입에 대비한 군사들의 관리까지.
휘하에 유능한 전사들이 잔뜩 있기는 했지만, 에반젤린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더욱 유능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피곤하거나 그러지는 않나?"
"딱히. 최근 들어서 고양이니 여우니 마음에 드는 것들이 꽤 생겨서 말이다."
고양이와 여우라면 분명 그 아이들이겠지.
미코가 에반젤린의 장단에 맞춰준다는게 조금 놀랍기는 했지만, 에반젤린이 딱히 미코의 신경을 거스를 것 같지도 않아서 두 사람의 어느 정도 이해되기는 했다.
이렇게 보여도 에반젤린은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응.
"그나저나, 네가 나를 찾아온 건 분명 다른 마족들 때문이겠지?"
"그래."
"그거라면 딱히 내 허락을 맡을 필요는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아, 그래. 그들이 어디에서 지내는지 모를 수도 있으니 장소 정도는 알려주마."
이러면 이야기가 빨랐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드디어 살아남은 동족들을 만나러 갈 때가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