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04화 (304/342)

Chapter 304 - IF : 전부 다 낳은 뒤에 지구로 보내졌다면.(9)

신앙이라는 것은 어떻게 쌓을 수 있는 것이냐.

다른 이에게 존경 받을 때? 다른이의 감사를 받을 때?

아니, 바로 경외 받을 때였다.

그리고 그 경외를 가장 빠르게 얻는 방법은 바로 상대가 자신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고.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어. 아직은 한 줌조차 되지 않는 정도지만ㅡ'

양아치의 대가리가 있는 곳을 치고, 임지섭인가 뭔가 하는 녀석의 모가지를 비틀기 직전.

녀석에게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신성력을 느끼고는 잠시 행동을 멈추었더랬다.

자신들의 부하를 피떡으로 만들어 놓고 단신으로 자신을 찾아와, 목숨을 노리는 괴물.

아니, 어쩌면 신.

그런 존재를 눈앞에 두고, 그는 공포를ㅡ 경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여신님, 그, 혹시 필요하신 건 있으십니까?"

"...여신이라니, 그건 나를 칭하는 말이더냐?"

남자ㅡ 임지섭이 자신을 여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복도에 널브러진 제 부하들의 모습을 본 직후부터였다.

지금까지는 생각에 빠져있어서 물을 기회가 없었지만, 여유가 있는 지금은 물어볼 시간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런 내 질문에 흠칫 떨며 몸을 굳히는 상대였지만, 계속되는 시선에 더듬더듬 입을 열어내기 시작했다.

"그, 왜... 인터넷에서는 다들 아가씨를 여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호칭으로ㅡ"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 없다. 그냥, 그런 식으로 불리는 건 처음이라서 그랬을 뿐이지."

애초에 지금까지 내가 들어왔던 '여신'이라는 호칭은 나를 이르는 게 아니라 전부 엘을 이르는 말이었다.

내 쪽은 여신이 아니라 마왕이었고.

얼마 전까지는 나를 취하기 위해 칼든 장정들을 보내기까지 한 주제에, 이제는 아주 충실한 개가 되겠다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깃든 기이한 열망.

나를 취하겠다는 그런 저열한 욕망이 아닌, 순수하게 물든 광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광신.

안타깝게도, 눈앞의 인간은 정상처럼 보이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머리가 너무 돌아버린 나머지 한 바퀴를 빙 둘러 돌아버려서 정상인처럼 보일 정도라고 해야 할까.

"...이런 식으로 신앙으로 모으고 싶지는 않았는데."

정도, 라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밤거리를 나서 인간들을 도왔건만, 하루 아침에 그 전부가 물거품이 되게 생겼구나.

물론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신앙을 모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 이 정도의 신앙을 얻어버리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돌아가기로 약속 했으니까.

스스로가 선인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평랭 동안 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 되겠지.

지금까지의 경험과 고통이 나에게서 폭력과 살육을 멀어지게 해주었더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멀어졌다고 봐야하겠지만ㅡ

지금은, 다시 그것과 가까워질 때였다.

***

"언니, 최근에 이상한 사람들이 편의점 근처를 돌아다니더라구요."

"이상한 사람이라니, 어떤 사람 말이더냐?"

"음, 문신을 한 아저씨들인데, 옷은 무슨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더라니까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굳어지는 언니의 표정에 푸스스 읏어보였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제가 인사를 하니까 인사도 받아주시고 그러셨어요.

왜, 그런게 있잖아요. 문신을 한 사람은 다 무서운 사람이다ㅡ 같은 고정 관념이요!

재잘재잘, 평소에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마치 수다쟁이가 된 것처럼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단 단어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 한 글자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단 한순간이라도 더ㅡ'

"...아,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나요? 죄송해요!"

"아니, 괜찮다. 목소리만 듣고 있어도 기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을 잔뜩 해댄다.

이래서 언니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에잇,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그 푹신한 품에 파묻히니, 평균 이상ㅡ 아니, 커다란 것들 중에서도 커다란 흉부가 자연스럽게 짓눌렸다.

...이게 자연, 이라고.

이름에서부터 그렇지만, 역시 한국인의 DNA는 단 1줄도 섞여있지 않구나.

"언니, 최근 자주 웃으시는 것 같아서 좋네요.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웃으시면 좋을 텐데."

"그냥, 좋은 일이 있어서 말이지."

"...좋은 일이라면, 언니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신 건가요?"

"..."

어떻게 보자면 금기인 말이었다.

나에게도, 언니에게도.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언니의 상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치료될 수 있었지만, 내 상처 같은 경우에는 불가능하다는 게 그 차이점일까.

물론 내 상처가 더 아프다며 뻗댈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ㅡ

'언니가 떠나면, 제 상처가 더 심해질 것 같아요.'

목 끝까지 차오른 목소리를 집어삼킨다.

이런 말 조차 상대에게 족가 될 것 같아서 감히 할 수가 없었다.

언니, 언니가 고향으로 돌아가면 저는 어떻게 하나요.

이미 언니에게 물들어버린 저의 일상은, 과연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언니."

"말하거라."

"만약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신다면, 저도 데리고 가주실 수 있나요?"

"..."

간절함을 담은 질문에, 언니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건 기분 나빠서 구겨진 얼굴이 아닌 걱정에서 나온 얼굴.

정확히 말하자면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언니가 나에게 너무 매달리지 않고 있어서.

만약에라도 나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게 된다면ㅡ

'ㅡ상상만 해도 싫네, 응.'

나와는 다르게 언니에게는 돌아가야 할 가족이 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이었다.

언니의 가족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언니와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보고 싶다.

"...좋다."

"와아, 정말요?! 고마워요!"

"읏, 잠깐, 그렇게 막 달려들지 말거라! 다칠 뻔 하지 않았느냐!"

다칠 뻔 한 사람은 분명 나겠지.

이런 친절함이 언니의 가장 사랑스러운 점이었다.

가끔씩 자신은 어떻게 되던지 상관 없다는 듯 굴기는 하셨지만, 왜인지 몰라도 아리엘 언니가 다칠 것 같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근육 하나 없어보이는 말랑말랑한 몸인데도 말이지...

"대신 하린, 한 가지만 약속 해다오."

"어떤 약속이요?"

"그때가 된다면,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일단ㅡ 지금은 말을 해줄 때가 아니니까."

"...알겠어요. 언니야말로 무르기 없기라구요?"

그렇게 우리는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아리엘 언니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온다면,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기로.

그리고, 전부 들어주기로.

***

"콜록, 콜록콜록!!"

"자, 여기 따뜻한 물이라도 마시거라."

"콜록, 큼, 고마워요..."

여름 감기는 개도 걸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아, 물론 혜린이 개라는 뜻은 절대, 절대로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별로 차게 자는 것 같지도 않은데 감기에 걸린 게 신기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몸이 약했던 때가 있었으니 말이지...'

그냥 약한 것도 아니고, 세계수 근처에서 지내지 않으면 피를 토할 정도로 약했더랬다.

그것도 그냥 피를 쏟으면 다행, 검게 죽은 피는 일상일 정도로.

물론 지금에 와서는 평범한 인간들 이상으로 강인한 정도까지 회복되었지만 말이다.

너무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말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되겠느냐? 감기가 빨리 나으려면 약을 달여 마시는 편이 가장 빠를 텐데."

"괜찮아요. 항생제를 먹으면 면역력이 약해진다는 말도 있고."

괜찮은 것 치고는 안색이 좋지 않은데.

손을 뻗어 이마에 손을 대봤지만, 딱히 열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열이 나지 않으니까 별로 심한 감기는 아닌 것 같은데...

'입술도 뭔가 파랗고.'

어쩌면 배탈이 난 걸지도 몰랐다.

배탈이 나면 오한이 들 때고 있다고 하니까.

이마에 닿았던 손을 천천히 내려 슬쩍 혜린의 배를 덮었다.

그런 내 행동에 흠칫 놀라는 혜린이었지만, 천천히 배를 쓰다듬자 이내 몸에 힘을 풀고는 한껏 들어지기 시작했다.

"으응, 갑자기 배는 왜 쓰다듬으시는 건데요? 살이 없어서 딱히 말랑거리지도 않을 텐데."

"혹시 배탈이라도 난 건가 싶어서 말이다."

"...푸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랄까, 대신 언니 배도 만지게 해주세요."

"? 마음대로 하거라."

내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둔 혜린이, 창백한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배를 만지는 게 그렇게나 좋은 건가.

혹시라도 내가 놀랄까 조심조심 만져오는 손길이 간지러워 키득키득 웃었다.

뭔가 엄청 신기한 걸 만지고 있다는 표정이구나.

"...어떻게 여기에서 아기가 여섯이나 나왔지?"

"여자의 몸은 원래 신비로운 법이지. 인연이 닿는다면,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그럴 수 있을까요."

조금은 덧 없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마치 늦가을 직전에 볼 수 있는 마지막 잎새처럼ㅡ

혹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이.

너무도, 덧 없는ㅡ

"언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남자던 여자던 전부 오징어 아니면 고구마로 보인단 말이에요! 으으, 이제 언니 아니면 시집 못 가! 아니, 안 가요!"

"푸흐흐... 그러면 어쩔 수 없구나. 만약 정 짝을 찾지 못하겠다면, 내가 그 자리를 채워주마."

"에, 진짜요?! 와아, 기뻐라ㅡ"

그렇게나 좋은 건가.

마치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웃는 혜린을 보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정말이지, 혜린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