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6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 - 후일담. (完)
엘리와 케이에게 점심을 먹여주고, 에밀리와 시간을 보내다가 어둑어둑 밤이 될 무렵.
등을 키지 않으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복도에 가만히 서서, 구름 뒤에 숨은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승맞게 뭐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케이를 엘리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 조금 크게 다가오는 듯 싶었다.
봐, 지금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아리엘,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달 구경?"
"...잠시 생각할게 있어서 말이다."
"그렇구나."
슬쩍 내 근처로 다가온 아서가, 고개를 돌려 마찬가지로 같이 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럴 때 감성에 젖지 않는다면 언제 젖는단 말인가.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만난 연인이 만월 아래에 다시 맺어진다.
이 정도로 감동적인 결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서."
"응, 아리엘."
"조금 추한 이야기지만, 엘리에게 질투를 해버리고 말았다. 케이는 내가 낳았던 아이일 텐데, 그 역할을 빼앗긴 것 같아서... 음, 조금 이해할 수 없는 투정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ㅡ"
"앞으로 낳을 아이는 전부 네 몫으로 하고 싶다, 맞지?"
"..."
이럴 때만 이해가 빨랐다.
바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걸 바로바로 알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어쩌면 지금까지 참아온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길 바라는 걸지도 몰랐지만, 내 죽음까지 겪었던 아서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줄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냥 상대가 아서라면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었지만서도.
"그러고 보니, 그거 알고 있느냐?"
"...응? 뭐가?"
"잠시만 이리 와보거라."
고개를 갸웃하는 아서를 향해 살랑살랑 손짓을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너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그게 괜히 기대가 되서, 더더욱 뜸들이는 부분도 있었다.
자, 그러니까 말이지?
"나, 아직 처녀야."
"?!?!!?"
터질듯이 붉어지는 아서의 얼굴에 쿡쿡 웃었다.
이렇게 웃고는 있지만, 분명 내 얼굴도 아서와 별반 다르지 않겠지.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반쯤 고장난 상태의 아서를 보며 은근슬쩍 더 달라붙었다.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아서?
"시간이 돌아갔으니까, 너도 나도 아직 미경험인 채잖아."
"어떻게 보자면 그럴지도..."
"언제나 후회하지 않았어? 우리들의 첫 경험이 아름다웠으면 어땠을까, 하고."
"..."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날일지도 몰랐다.
상처 뿐인 첫 경험의 순간을, 아름다움으로 채우기 위한 날.
그 대가가 내 죽음이라는 것이 조금 컸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 되었으니 좋은게 좋은거 아닐까.
봐, 간만에 이렇게나 부끄러워하는 아서의 모습도 보고 좋잖아?
"아서."
"..."
"방으로 가자."
슬쩍 아서의 옷소매를 붙잡고는 천천히 잡아당겼다.
따라와, 아서. 이제부터 할 일이 많다구, 알아?
직접 하는 유혹 같은 건 스스로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만큼은 멋대로 굴고 싶었다.
오늘은 아서와 나의 첫날밤이 될 테니까.
"너무 쑥맥처럼 구는거 아니야, 아서? 분명 처음 할 때는 격하고 무섭게 굴었으면서."
"...미안."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자."
침대 위에 마주 앉은 채로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런 내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아서의 모습에 그새 눈치가 사라졌다며 쯧쯧 혀를 차댔다.
"벗겨달라는 뜻이잖아, 아서."
"..."
"...아서?"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아니, 처음에는 분명 말이 별로 없었지만,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말이 많아졌더랬지.
아, 시간이 돌아가서 그것도 원래대로 돌아간 걸까?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며 키득키득 웃자, 아서가 머뭇머뭇 손을 뻗어왔다.
왜 그렇게 망설이는 거야, 아서. 너 답지 않게.
"미안, 아리엘. 그냥, 아직 뿔이 있는 너를 보니까 그때의 일이 계속 떠올라서 그랬어."
"...아직도 그때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차라리 내 머리 위에 뿔이 없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살짝 머리를 들이밀자, 아서가 반쯤 기겁하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이 정도로 놀라면 오히려 상처인데.
"자, 이제는 극복할 때도 됐지 않아?"
"..."
덜덜 떨리고 있는 아서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그대로 내 뿔 위에 얹었다.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네 손을 빌려 잘려나간 뿔이, 지금은 멀쩡하게 있어.
기억은 있지만 사건을 벌어지지 않은 것.
어떻게 생각하자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없었던 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더 이상은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서.
"지금의 너는, 나에게 그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아."
"사랑을 나누자, 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증오로부터 시작된 상처 뿐인 이야기가 아니라, 마왕과 용사가 한눈에 반한 로맨틱한 이야기로 만드는 거야."
서로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쪽ㅡ 하고 입술이 맞닿았다.
기억나 아서? 그때도 이렇게 보름달이 뜬 밤이었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심장이 쿡쿡 쑤셔왔다.
하지만 괜찮아. 그건,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됐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그러니까 아서ㅡ
"ㅡ아이 만들기, 하자?"
그래, 아마도 그 말이 기점이었을 터였다.
마치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깨져나갈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던 손길에 약간의 과감함이 추가된 것은.
서로간에 관계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행동은 익숙했지만 느끼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기억이 있으면 전부 다 만사 해결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참 멀고도 멀었구나 싶었다.
"그래도, 키스는 그대로라서 다행이지?"
"응, 너무 행복해."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서로의 타액을 탐한다.
몸의 감도라던지, 몸을 붙이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맞춰지는 심장의 박동 같은 건 아직 꽤 어긋나있었지만, 키스 하나 만큼은 과거의 것과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더 달콤할지도 모르겠네.
위기를 겪은 뒤의 사랑은 그 어떤 과실보다 달콤한 법이었으니까.
"첫날이니까, 살살하는거 잊지 마?"
"...그래."
기억이 몸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없을까.
평소보다 훨씬 두근거리는 심장을 보면 영향을 받는 것 같은데 말이야.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나신 위에 닿는 손길이 뜨거운 걸 보면 그건 아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익숙함이라는 건 기억에서 나오는 법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
"...읏."
"미안, 너무 세게 쥐었나?"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랬을 뿐이야."
그의 손길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는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내 몸이 다른 이의 손길에 익숙하지 않아서 나오는 놀람이었을 뿐.
천천히 전희를 시작하는 아서의 움직임에 맞춰서 몸의 긴장을 풀어냈다.
자,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그러니까 진정해줘, 내 몸아. 별 일 아니니까, 천천히 받아들ㅡ
"아..."
"...아리엘?"
"아서..."
심장이 뛰는 박동. 경직된 몸. 천천히 퍼져나가는 온기까지.
긴장해서, 아직 첫 경험의 기억이 남아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현상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들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었다.
"나, 너무 기뻐서... 그래서,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건가봐."
그것을 깨닫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왔다.
애초부터 극복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 거야.
상처 뿐인 우리들의 첫 경험은, 이미 그보다 더한 행복으로 인해 지워진지 오래였었어.
대체,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긴장하고 있었던 걸까.
단 한번도 아서를 경험한 적 없는 이 몸뚱이조차 이토록 사랑을 원하고 있는데.
"너도 그렇지, 아서?"
"...그런 것, 같아."
"그럴 줄 알았어."
내 머리 위에 있는 뿔을 보며 그가 떨고, 심장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이유 또한 나와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과거의 고통 따위를 되새길 시간에 현재의 행복을 음미하는 것.
앞으로 나눌 사랑에 쓸 시간조차 부족한 마당인데, 겨우 후회 따위 시간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어. 처음부터 이렇게 했었어야 하는 건데.
"흐읏..."
"...아파?"
"...아파."
파과의 순간은 내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분명 전희를 완벽하게 마치고, 충분히 젖어든 상태에서 삽입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건 역시 아서의 물건이 평균의 것보다 훨씬 거대하기 때문이겠지.
만약 내가 마족이 아니었더라면 관계를 나눌때 여러모로 곤란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고통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래.
"아픈 것 이상으로 행복해서, 울어버릴 것 같아..."
"..."
아서가 내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뜨거운 무언가가 심장에서부터 울컥울컥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아, 안 되는데... 첫 경험에서만큼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대체 왜ㅡ
"울어도 돼, 아리엘."
"...아서."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니까, 그때와는 다르잖아. 그렇지?"
"..."
...그래, 그렇지. 이건 고통과 절망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니까, 그때와는 다르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참아왔던 눈물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라, 나 이렇게까지 참고 있었나?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 몰라는, 데...
"미안, 해... 너를 두고 죽어서, 미안해..."
"...너를 지키기 못해서 미안해."
"고통스러웠을, 텐데. 내가 없어서 그 누구보다 아팠을 텐데..."
"...아팠던 건 너도 마찬가지였겠지."
"내가 없어서, 외로웠었어?"
"외롭고, 고통스러웠었어."
"...지금은?"
"..."
"..."
"행복해."
응, 그거면 됐어.
그게 우리들의 전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