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30화 (330/342)

Chapter 330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4)

"후아아아아아......"

눈앞에서 녹아내리는 소녀를 바라보며, 에반젤린이 미소지었다.

이렇게 탕 속에 몸을 담그는 건 처음이라고 했던가.

물론 북부에서도 자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처음인 소녀에 비해서는 꽤 자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처음이라. 다시 생각해도 기구한 삶이구나.

"어때, 괜찮지 않느냐?"

"...천국이에요오오..."

몸과 마음 전부 녹아내린 소녀는 누가 보아도 꽤나 귀여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게 처음 봤던 소녀의 모습이 맞단가.

곪고 터진 상처 투성이에, 반쯤 죽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던 소녀가 겨우 반신욕 하나에 이 정도로 다채로운 표정을 짓게 되다니.

이런 소녀를 그렇게 만든 건 대체 누구였을까.

"엘리."

"...네헤?"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계속 지내도 된다."

"..."

그런 소녀를ㅡ 엘리를 이대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건 그저 욕심일 뿐인 걸까.

엘리가 용사여서 붙잡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용사로 남기고 싶지 않아서 붙잡는 것이었지.

이 불쌍한 소녀 하나에게 운명을 걸 정도로 형편 없는 세계라면, 차라리 멸망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의 선택에 멋대로 휘말렸으니, 지금 만큼은 네 멋대로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그건."

완고한 거절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도 망설이는 것 같았고.

어째서 소녀에게 이토록 마음이 가냐고 묻는다면, 스스로가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에서 나오는 측은지심이 가장 클 것이었다.

물론 하찮은 동정 같은 건 아니었다.

아니, 동정이라고 한들 겨우 동정 따위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냥, 너라는 사람 자체가 마음에 드는구나."

"정말, 요? 제가 용사가 아니었어도요?"

"그래, 나는 네가 용사가 아니었다고 해도 마음에 들었을 터다. 애초에, 내가 지금까지 너를 용사로 대한 적이 있던가?"

"..."

엘리는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인을 용사 취급하던 사람들만 만나다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니 꽤 괴리감이 든 것 같달까.

반쯤 풀린 눈동자에는 무언가를 향한 짙은 갈망이 잠들어 있었다.

본인에게 꼬리표처럼 매달려 있던ㅡ 아니, 본인이 꼬리표처럼 매달려 있던 용사라는 명함을 떼어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리고 더 이상 용사이고 싶지 않다는, 그 강렬한 욕망까지.

"여기에, 있고 싶어요."

"그렇구나."

"여기서, 당신이랑ㅡ 에반젤린 씨랑 같이 있고 싶어요...!"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거라."

허락은 빠르고, 쉬웠고, 또한 간결했다.

그런 깔끔한 허락에 엘리의 표정이 멍청해진 것을 보고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귀엽구나, 정말.

북부에 있는 녀석들은 하나 같이 억세거나 단단한 녀석들 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저, 정말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요? 그, 제가 여기 있으면 마족들이 또 쳐들어올 거라고요?!"

"보지 못했느냐. 북부는 마족들의 침공에 무너질 정도로 연약한 곳이 아니다."

아무리 마족들이 강력하다고 한들, 북부는 우리들의 땅이었다.

이 땅 위에서라면 마족이 아니라 드래곤이 온다고 한들 충분히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그 증거로 북부의 전사들보다 마족들의 목이 더 많이 떨어지기도 했고.

근거 없는 자신감은 절대 아니었다.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언제나 당당할 뿐이었지.

"그나저나, 따갑지 않느냐? 상처 투성이인 몸 그대로 탕 안에 들어왔는데."

"...아픈 건, 익숙해서요. 지금은 이 따스함에 몸을 맡기고 싶달까... 아하하..."

어색하게 웃던 엘리가 제 입을 슬쩍 탕 안에 담갔다. 아무래도 본인이 방금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는 듯 싶었다.

딱히 실수라고 부를 법한 말은 하지 않았다만.

오히려 저 한 마디에 안쓰러움과 대견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

저 나이의 소녀가 아픈 건 익숙하다고 말하는 것에서 안쓰러움을, 그리고 저 정도의 고통을 참아내는 전사의 마음가짐에 감탄을.

"대단하구나. 고통을 참는 건 북부의 전사들도 쉬이 하지 못하는 일인데."

"..."

"그래도, 너무 아픈 건 참지 말거라. 아픈 걸 전부 참았다가는 나중에 큰 탈이 날 테니까."

결국은 또 손을 뻗어, 정수리를 쓰다듬게 되어버린다.

뭔가 쓰다듬는 맛이 있다고나 할까.

손이 머리에 닿으면 움찔거리면서도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게 상당히 귀여웠다.

마치 상처입은 강아지를 길들이는 것 같은 느낌.

"북부에 온 걸 환영한다, 엘리."

"...네!"

이렇게 환히 미소 짓는걸 보면, 절대 놓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북부의 여왕이라는 자가 이렇게나 한순간에 홀려버리다니.

하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기분 좋게 웃어버릴 뿐이었지.

***

목욕이 끝난 뒤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린 다음 옷을 입으려는 순간.

어디에선가 나타난 사용인 씨가 그런 누더기 같은 옷은 더 이상 입지 말라고 외치며 내 옷을 어디론가 가져가 버렸다.

어라, 그러면 저는 뭘 입으면 되는 건가요?

몸을 닦은 수건을 두르고는 잠시 서있자, 사라졌던 사용인 씨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님 크기에 맞춰서 가져왔어요!"

"...이건."

처음 보는 양식의 옷이었다.

일단 일체형 드레스 같기는 했지만 훨씬 더 하늘하늘하고 가벼워 보인다고나 할까.

평소에 전혀 보지 못했던 옷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사용인 씨가 우후후 웃으며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가 입는 건 도와드릴게요! 그러니까 안심하시라구요? 아프지 않으니까요!"

"그, 옷은 제가 알아서 입어도ㅡ"

"괜찮아요! 여왕님의 손님을 귀찮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우흐흐...!! 아, 그보다 일단 수건부터 치워주세요."

...웃음 소리가 불안한데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집어삼키며 사용인 씨가 시키는대로 수건을 치우자, 사용인 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역시 흉한 몸이겠지.

상처투성이에 흉터도 많으니까.

이렇게 되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여신님께서 주신 회복 능력 덕분일 터였다.

덕분에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까.

"엄청 전사다운 몸이네요. 북부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엄청난 몸을 가진 사람은 없는데!"

"에, 에...?"

"아아, 저보다 더 가녀리신 것 같은데 이런 영광스러운 몸이라니~ 저, 진심으로 용사님을 존경하게 되어버린다구요?"

북부 사람들의 심미안은 조금ㅡ 아니, 상당히 이상했다.

이런 흉측한 몸을 보고도 저렇게나 감탄하다니.

하지만 흉하다고 욕을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빈말로 그러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진심에 진심을 더한 것 같아서 조금 부담되기는 했지만서도.

"역시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네요. 엄청 잘 어울리세요! 마치 용사님을 위해 만들어진 이브닝 드레스 같은 느낌이랄까요~?"

"자,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전혀요! 이 옷을 소화할 수 있는 건 용사님 뿐이세요! 만약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네, 네에..."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마족들 이상으로 박력이 넘치는 사용인 씨의 기세에 눌려 살짝 쭈그러들었다.

북부 엄청나.

"으음, 일단은 여기까지가 마무리인데... 용사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손님방으로 돌아가셔서 주무실 준비를 하던지, 아니면 여왕님의 침소로 가셔서 잠시 대화의 시간을 가지시던지."

손가락 두 개를 쭉 뻗으며 말하는 사용인 씨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장 무난한 답은 손님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뭔가 지금 바로 자고 싶지는 않았달까.

아니, 그냥 혼자 있기가 싫었다.

사람의 따스함을 알기 전에는 혼자 있는게 더 편했겠지만, 에반젤린과 사용인 씨에게서 사람의 따스함을 알아버려서 그런지 별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에반젤린 씨에게 갈래요."

"좋은 선택이에요! 여왕님도 엄청 기뻐하실 거라구요?"

나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걸로 에반젤린이 기뻐한다고? 정말?

사용인 씨에 손에 이끌려 주욱 이어진 복도를 걸으니, 다른 방보다 조금 더 커다란 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에반젤린이 머무는 침실이구나.

괜히 침실이라고 하니까 더 긴장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랬다.

똑똑ㅡ

"여왕님, 용사님을 모시고 왔어요."

"들어오거라."

"자, 그러면 여왕님과 잔뜩 친해지고 오시라구요?"

"...노력할게요."

주먹을 꼭 쥐며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사용인 씨를 뒤로 하고, 그대로 에반젤린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다지 꾸미지 않은 무채색의 풍경.

그럼에도 아늑하다고 느끼는 건 분명 그녀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내왔기 때문이겠지.

"잘 어울리는구나. 따로 시켜서 입힌 보람이 있어."

"...감사합니다."

"무얼, 내가 즐거우려고 입힌 옷인데."

꾸벅 고개를 숙이자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에반젤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쁘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예뻐.

제 옆자리를 토닥이는 에반젤린의 손길을 따라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나는, 이 북부의 여왕님께 완전히 홀려버린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