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1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5)
성검보다 책을 더 많이 들고, 갑옷보다 얇은 드레스를 더 많이 입게 된 뒤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상처투성이던 몸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보며 사용인 씨가 감탄하는 걸 봤을 때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깨달았고.
쉴 새 없이 전투를 지속해서 상처가 사라지지 않았던 거구나.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용사님,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네, 요즘에는 피로감이 덜해서요."
"흐응, 어쩌면 몸이 거의 다 나아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처음 북부에 왔을 때는 거의 반나절을 잠만 잤었는데, 이제는 조금만 자도 몸이 쌩쌩할 지경이었다.
역시 사람은 쉬어야 하는구나.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와서 그런지 스스로가 얼마나 혹사하고 있는지 눈치채는게 너무 늦어버린 듯 싶었다.
...뭐, 지금이라도 쉬면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서도.
"살도 조금 붙은 것 같고."
"...앗."
"물론 좋은 의미로 한 말이었어요. 처음 봤을 때의 용사님은 엄청 말라서 불안해 보일 지경이셨으니까요."
"..."
그랬었나?
언제나 제대로 먹고 지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갈비뼈가 보이는 건 기본에, 팔 다리도 그다지 두껍지 못했더랬다.
딱 최소한의 근육만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만약 본인이 용사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골골거리면서 살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하실 예정이신가요? 여왕님 말씀으로는 슬슬 운동 같은 걸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던데."
"...운동은 조금."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조금 꺼려졌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움직인 것에 대한 반동이라고나 할까.
당장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편이 훨씬 즐거웠다.
교단에서 배운 글자들로 활자를 읽는다는 건 꽤 색다른 경험이었으니까.
내가 머물고 있는 장소의 역사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뭐, 어쩔 수 없죠. 강요는 할 수 없으니까. 애초에 용사님은 더 쪄야할 정도니까 말이에요!"
"네에..."
"그보다, 그 얇은 팔로 검은 어떻게 들어올리셨는지ㅡ"
하지만, 그런 모든 평화로운 풍경마저도 한 순간에 깨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왜 잊고 있었을까.
마족이라는 존재들이 얼마나 강력하고 끈질긴 존재들인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었지?
에반젤린이 나를 엘리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절대 용사가 아닌게 아닌데 어째서 성검을 들고 다니지 않았던가.
대체 왜.
"사용인, 씨ㅡ"
"아... 흑..."
사람의 몸뚱이가 두동강이 나는 광경은 언제 봐도 별로 유쾌한 물건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것이 상체와 하체로 나뉘어진 것이라면 마치 두 개의 시체를 보는 것 같아서 더 속이 안 좋았다고나 할까.
생기가 사라진 눈동자와 함께 퍼져나가는 힘 없는 단말마.
바닥에 흩뿌려지는 피를 보며 손을 뻗어봤지만, 눈앞의 광경이 바뀌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남은 건, 뜨거운 피와 새빨갛게 물든 시야 뿐.
"찾았다, 용사."
"...아."
"마왕님께서 너를 찾고 계신다. 조용히 따라온다면 이 이상으로 죽이지는 않지. 어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지 않나?"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어올려, 상대와 눈을 마주했다.
그 어떠한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무채색의 눈동자.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이라는 무감정의 극치.
사용인 씨를 죽인 건 그저 눈앞에 거슬리는 것을 치우기 위해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우습게도.
너희에게는, 겨우 그 정도의 목숨이구나.
"당신들은, 그런 족속들이었죠."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쓸어내렸다.
역시 이곳에 머물면 안 되는 거였어.
용사라는 직함이 내 목을 조이고 있는 이상, 마족들이 나를 노린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대체 왜 방심했던 거야.
대체 왜ㅡ
"따라오지 않겠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는 수밖에. 팔다리를 부러뜨린다면 쉽게 데려갈 수 있겠군."
"큭...?!"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였지만, 어떻게든 피해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마족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
이대로라면 죽어.
아니, 나를 끌고 간다고 한 걸 보면 죽이지는 않겠지.
'...사용인 씨.'
결국에는 이름도 듣지 못했더랬다.
본인이 말해주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내가 묻지 않아서 더더욱 말해주지 않았던 것도 있었겠지.
어쩌면 그녀는 내가 본인의 이름을 묻기 바랬던 걸지도 몰랐다.
언젠가 서로간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워지고, 내가 마음을 열어서 이름을 묻는 그 순간을 기대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도망치는 건가? 아아, 그래.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무기가 없이 나에게 맞서는 건 바보 같은 일일 테니까 말이야."
"...다들! 다들 도망치세요! 마족이 침입했어요!"
복도를 내달리며, 시야에 보이는 사용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도망쳐요. 도망치세요, 제발. 여기 계속 있으면 전부 죽어요.
몇몇 사용인들이 품 안에서 무기를 빼들기는 했지만,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맞서 싸운다는 마음가짐은 좋았지만, 지금은 일단 도망칠 때였다.
사람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모습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제발, 제발 도망치세요!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제발ㅡ"
"다른 인간들을 신경 쓸 틈이 있던가?"
"큭...?!"
마족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휘둘러져, 그대로 내가 있던 자리를 내리쳤다.
슬쩍 돌아가는 시야 끄트머리에 벌벌 떨고 있는 사용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을 보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나만 쫒아온다면 좋을 텐데.
마족은 마치 인간과 같아서 눈앞의 목표만을 맹목적으로 쫒지 않았다.
목표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한다.
그것이 인질을 잡는 일이거나, 인질을 죽이는 일이라도.
"그만ㅡ"
"하찮다. 하찮기 그지 없어. 인간들의 목숨이란, 이토록 하찮기 그지없는데..."
"그만ㅡ!!!!"
"어째서, 동족들이 너희들의 욕심에 살해 당했어야만 했지?"
"...무슨ㅡ"
세 번의 휘두름에 세 명의 사람들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니, 이걸 찢어졌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도살장의 고깃덩어리들보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사람들의 파편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어떠한 자비도 없는 학살자의 손길.
그런 이가 동족들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감히.
"당신 같은 괴물이,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들은 그 어떤 마족도 죽이지 않은 사람들인데! 차라리 죽이려면 저를 죽여야지, 어째서 무고한 이들을 죽인 거죠?!"
"너희들이 무고한 동족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용서는 짧지만 복수는 길지. 우리들에게 남은 건 시간과 끝 없는 인내심이니, 용서보다는 복수를 택하는 것이 옳을 터다. 용서는, 하찮은 단명종이나 할 법한 선택이니 말이야."
"..."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존재가 미쳤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는 그 어떤 마족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내 방으로 가야만 해.
내 방으로 가서, 성검을 쥐지 않으면ㅡ
'죄송, 해요. 당신들을 두고 도망치는 저를,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몇 번이고 사과의 말을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채찍질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단말마와 비명이 뒷덜미를 잡아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주욱 이어진 어두컴컴한 복도가 악마의 목구멍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내 다리를 붙잡는 죄악감이 더 이상 도망치지 말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흑,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토해내며, 침대 옆에 놓여져 있는 성검을 들어올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걸까.
내가 성검을 들고 있지 않은 것만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목숨이ㅡ
"우욱... 윽..."
울컥, 하고 올라온 구역질에 몸을 웅크렸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토해내고 싶었지만, 이 검은 감정을 토해낸 뒤에는 감히 살아있지 못할 것만 같았다.
죽으면 안 돼. 여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
너는 아직 해야할 일이 있잖아, 엘리.
그들은 죽인 존재ㅡ 혹은 존재들에게 복수해야 하잖아?
스릉ㅡ
"하아..."
"드디어 도망치는 걸 멈춘 건가?"
몸을 돌리자, 나를 쫒아온 마족이 손에 들고 있는 검을 간결한 움직임으로 털어냈다.
새하얀 칼날 위를 붉게 물들인 피가 방울져 바닥을 칠하고, 이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칼날이 창백한 빛깔의 띄며 나를 겨누었다.
노리는 곳은 팔, 혹은 다리.
여전히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구나.
...빌어먹게도.
"하앗...!!"
"흠ㅡ"
칼날이 마주하는 살벌한 소리가 몇 번이고 허공을 때렸다.
이쪽은 급소란 급소는 전부, 저쪽은 팔과 다리.
어느쪽이 훨씬 더 막기 쉬운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죽이기 위한 검과 제압하기 위한 검은 그 난도나 위력에서부터 차이가 있었으니까.
"이렇게까지 발악하다니. 다른 녀석들이 더 죽어도 상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무슨 뜻이죠?"
"아아, 그러니까, 그래. 이런 뜻이다."
잠시 동안의 소강 상태.
작은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정적의 틈을 파고들며, 마족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이곳에 침입한 마족이 나 하나 뿐이라고 생각한 건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