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2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6)
소중한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
절대 잃기 싫어서 손에 꽉 쥐고 있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 없었기에, 죽는 것조차 두렵지 않았더랬다.
의미 없는 인생. 그 눈동자가 담는 것 또한 의미 없는 것 투성이.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건 언제나 용사라는 꼬리표가 주는 의무감이었다.
이것마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얼마 못 가 죽어버렸겠지.
"늦는구나. 분명 기다리겠다고 말했거늘."
"마왕님."
"...거짓, 말."
하지만 그런 존재에게 소중한 무언가가 생긴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소중한 무언가가 바로 눈 앞에서 망가졌다면?
그것도, 본인이 상대해야하는 숙적의 손에 말이다.
"거짓말이야!!!!"
"진실이다. 네 눈앞에 있는 것은 진실 그 자체다, 용사여."
마왕이라고 불린 여인의 손에는 에반젤린의 목덜미가 쥐여져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가느다란 숨을 토해내며, 팔다리가 이리저리 기괴하게 꺾여져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그녀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
그리고, 절대 있을 수 없는 광경.
"...여버릴거야."
"..."
"죽여버릴거야!!!!!"
손에 들린 성검이 여인의 목을 노리고 쏘아져 나갔지만, 그것이 그 가느다란 목을 잘라내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르기는 커녕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막혀버렸다.
...거짓말.
나를 쫒아온 마족도 버거운 상대였는데, 마왕은 그 이상이라고?
지금까지 죽여온 마족들이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수준이었다.
"죽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무언가를 죽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저 목소리와 시선에 잠들어 있는 건 분명 진실이었다.
아니, 아니야. 전부 거짓말이야.
마족이, 마왕이 무언가를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어온 이들은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눈앞에 있는 저 마족이 한 짓은 대체 뭐고?
스스로의 말이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건가?
"개소리, 하지마세요."
"..."
"당신 옆에 있는 마족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알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당신은, 에반젤린을 그런 꼴로 만들기 위해서 대체 몇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죠? 그런 주제에 뭐? 죽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하하하, 하고 마른 기침을 토해내다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금방이라도 펑ㅡ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눈앞의 것들을 전부 찢여죽이고 싶은 충동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 이성을 붙잡고 있는 희미한 끈이 아직 에반젤린과 이어져 있었기에, 차마 정신을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흐, 하..."
"...제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살려주실 건가요."
죽일 수 없다면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땅에 머리를 쳐박고 자비를 구걸하는 건 어렸을 때부터 자주 해왔던 일이니까.
당장의 분노보다는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애초에 자존심이나 자존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 분노를 내리누르고 모든 것을 버린다면 그녀의 목숨 정도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터뜨린 것 같았지만서도.
"간단하다. 그 검을 버리고, 도망쳐라. 그렇게 한다면 이 인간의 목숨은 살려주지."
"...정말, 그것 만으로 괜찮은 건가요?"
"그래.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그 정도 뿐이다."
성검을 버린다는 것은 용사가 아니게 된다는 것.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용사라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꼬리표나 마찬가지였다.
모두에게 미움 받는 용사로 남아있느니, 그냥 아무것도 아닌 엘리로 남고 말겠다.
땡그랑ㅡ
"이제, 그녀를 살려주세요."
"그래."
에반젤린의 목을 부여잡고 있던 손이 움직여, 피투성이가 된 등을 들어올렸다.
꼴에 배려라도 해주는 걸까.
속으로 헛웃음을 짓다가도, 내 앞으로 내밀어지는 에반젤린을 받아들고는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무기도 없는 이상 눈에 띄는 짓을 했다가는 곧바로 살해당하겠지.
마음대로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와 에반젤린의 목숨은 전적으로 눈앞의 마왕에게 달려있는 채였다.
...빌어먹게도.
"이제 가도 좋다.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거라."
그걸로 끝.
무덤덤하게 한 마디를 내뱉은 마왕이, 이제 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우리에게는 볼일이 없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런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벗아나는게 우선이었으니까.
"죄송해요, 에반젤린 씨. 싸우지 않고 도망쳐서 죄송해요..."
"..."
에반젤린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하지 못했다는게 맞는 말이겠지만.
내가 내동댕이친 성검을 바라보는 마왕을 스쳐지나가며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아무도 없는 곳으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ㅡ
누군가가 용사였던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욕하기 전에ㅡ
도망쳐, 엘리.
***
용사가 없는 세계란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물론, 세상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용사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마족의 수는 정해져 있었기에, 그 정도 숫자의 마족을 다른 인간들이 견뎌내야 한다고 해도 당장은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용사의 존재 이유가 그저 마족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임이 아닌 것을 과연 다른 인간들은 알까.
"용사는, 용사는 어디로 간 거야!"
"용사님,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용사가 의무를 버리고 도망쳤다! 용사가 도망쳤다고!!"
용사의 존재 이유는 그저 마족들을 상대하기 위함이 아닌, '마족들의 수장인 마왕을 처단하기 위함'에 있었다.
그 어떤 인간들이 죽어나가들 대체할 수 없는 존재.
하늘 위에서 모든 것들을 굽어살피는 여신이 선택한 유일하고도, 가장 특별한 존재가 바로 용사였다.
하물며 그녀가 얼마나 특별한지는 그녀가 용사 뿐만 아니라 성녀라는 직함까지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해낼 수 있었다.
죽지만 않았다면, 어떻게든 목숨만은 살려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추앙 받아야 할 그녀가, 죽은 이들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갖은 모욕을 당할 이유는 없었다.
"대륙의 명운도, 여기까지인가요..."
두 손을 모으고, 달이 떠오른 하늘을 바라봤지만 별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수한 미래들이 전부 거세당했다는 것처럼, 검은 도화지 위에 있는 건 오직 붉은색의 달 하나 뿐이었다.
여신이시여, 정말 저희들을 버리시나이까.
멍하니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용사님, 당신이 사라진 뒤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을 모욕하고, 당신을 때리고, 당신의 무능과 나약함을 부르짖던 이들이 이제는 당신만을 찾고 있어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별들이 흐려져도 언제나 보이던 단 하나의 샛별은 이미 그 빛을 잃고 사라진지 오래였다.
설마 돌아가신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어. 만약 용사님이 돌아가셨다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커다란 별똥별 하나가 떨어져 내렸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분명 어디선가에 살아계신다는 뜻ㅡ"
부스럭ㅡ
"ㅡ일 텐데, 말이죠..."
옆쪽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작게 숨을 토해냈다.
방금 전에 들린 소리는 이곳을 침입한 불한당이었을까, 아니면 근처를 지나가는 동물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ㅡ
"...도와주세요."
"...아."
"도와주세요, 제발."
수풀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마치 잔뜩 상처 입은 소동물과도 같아서,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도움이 필요해 보이니 말이죠."
"감사,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체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찾아오신 걸까.
용사님께서 품에 안고 있는 피투성이의 여인의 상태는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아슬아슬 했지만, 신성력을 쏟아부었는지 목숨 만큼은 부지하고 있었다.
"이리로 오세요. 바람이 차답니다."
자그마한 오두막이었지만, 세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자아, 그러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치료를 하는 건 가능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라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 분명했다.
...내가 과연 용사님을 설득하는게 가능할까.
함께 교단에 있었다는 정으로 호소한다면,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을까?
"설마 저를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용사님께 있어서 저는 안 좋은 기억으로 끝일 줄 알았거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교단에서 파문을 당한 건, 그녀에게 다른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성녀가 아니어도, 용사가 아니어도 엘리라는 인간이 뻗어나갈 수 있는 가지는 무궁무진 했으니까.
물론 그 생각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설득은 해보겠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용사님."
"그때처럼, 엘리라고 불러주세요."
"네, 엘리."
일단은, 이 사람을 살리는게 우선이었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