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0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14)
복수를 원한다면 눈앞의 마왕을 죽여버리는 수가 있겠지.
하지만 나는 눈앞의 마왕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누군가를 죽일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는게 맞는 말이겠지만.
차갑게 얼어버린 발을 슥슥 문지르는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더 멀쩡한 모습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자, 이거라도 신으세요."
"나는 괜찮다만."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니까 하는 소리에요. 자, 여기요."
여분의 장화는 마왕의 발보다 훨씬 커다랬지만, 끈을 꽉 조이니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여보이는 소녀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것이 분노나 증오 같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에 다시금 한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같은 동족에게 배신당했다고 했었지.
"혹시, 복수를 원하시는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다. 그들이 나를 배신한 건,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말하는 마왕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우울함이 잠들어 있었다.
...묘한 느낌.
같은 마족에게 마왕이 배신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음이 나올 법도 했는데, 기분이 좋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 또한 같은 인간에게 미움 받고, 배신 당해서 그런 걸까.
마왕에게 동질감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러면,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요? 아, 마족들이 저를 노리고 있으니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했었나요?"
"물론 그것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는 뭐랄까, 네 손에 죽고 싶어서였다."
"..."
"마왕을 처단하는 건, 용사가 되어야만 하니까."
마왕 또한 여신이 읊어준 미래를 믿는 걸까.
지금이라도 자신을 죽이지 않겠냐고 말해오는 마왕을 보니 오히려 더 죽이기가 싫어졌다.
설마 이걸 노리고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지도 모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왕씩이나 된 자가 저 정도로 자존감이 낮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평생 동안을 동족들을 위해, 동족들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마왕의 자리에 앉아있던 내가 결국 동족들에게 배신 당해 이런 꼴이 되었다."
"..."
"이제, 나에게 남은 이유는 용사ㅡ 너에게 처단되는 것 밖에 없어."
마왕이라는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마왕이었기에, 더 이상 마왕으로 살 수 없게 된 이상 본인에게 남은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랑 비슷하면서도 다르구나.
용사로써의 삶을 살던 내가 용사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지 못한 이유는 용사라는 꼬리표가 없는 나 따위는 별거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별거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더랬지.
만약 내가 에반젤린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지금의 마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설마 마왕이 이름일 리는 없잖아요."
"이름ㅡ 이름이라... 대부분 마왕이라고 불려서 그런지 이름 같은 건 의미가 없는 편이다만..."
"제 이름은 엘리라고 해요. 대부분 용사라고 불려서 그런지 이름 같은 건 의미가 없는 편이지만, 제 소중한 사람이 불러주던 이름이랍니다."
"...그런가."
마왕이 상처투성이가 된 손으로 제 뺨을 긁적였다.
언제나 무표정일 줄 알았는데, 저런 식으로 무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할 수도 있구나.
어쩌면 저번에 보았던 모습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며낸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마족들에게 이끌려, 마왕으로만 존재하는 무언가.
그것이 바로 마왕이라는 존재가 가진 가치의 전부였으니까.
"내 이름은ㅡ 그래. 아리엘이라고 한다."
"예쁜 이름이네요."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지. 정작 이름으로 불린 건 한 번 뿐이지만 말이야."
씁쓸한 목소리와 함께 마왕의 시선이 저 먼 곳을 향했다.
과거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단 한 번 불렸던 이름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걸까.
어머니라는 것이 존재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녀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도 어머니 비슷한 존재는 존재했었더랬다.
"저도 이름으로 다시 불리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 전까지는 언제나 용사라고 불렸었으니까."
"..."
"웃기게도, 그런 점에서는 닮았네요. 당신이나 저나."
태어날 때부터 마왕인 당신과 여신의 선택으로 용사가 된 나.
분명 대척점에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겪어온 일들이나 처지는 꽤나 비슷했더랬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하는 걸까.
동정심 때문에? 아니면 동질감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일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구나. 너희 인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어버렸어."
자신을 찌른 이가 강경파의 인물이었고, 강경파에 속한 마족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죽여 없앨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런 것들은 어떠한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마족들이 인간들을 학살해도, 인간들이 마족들을 막아내도,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니 말이다.
'...지키고 싶은,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전부 사라진 세상 따위ㅡ'
ㅡ차라리, 멸망 해버리라지.
그런 생각이 표정에서 묻어나왔는지, 마왕은 꽤나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용사라는 작자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놀란 걸까.
그런 의미를 담아서 바라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면 쭈뼛쭈뼛 말을 얼버무려댔다.
...싱겁기는.
"이제 저는 용사가 아니에요. 그런 직함 따위, 때려치운지 오래니까."
"부럽구나. 최소한 자기 의지로 때려치운 것이니 말이다. 내 쪽은 강제로 끌어내려졌는데...."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강제로 앉혀진 자리라는 것 만큼은 둘 다 똑같았지만, 최소한 내 쪽은 자기 의지로 그 자리를 걷어찰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셈인 거지? 나를 죽이지도 않고, 동족들을 막지도 않는다면 대체ㅡ"
"이곳을 지키면서 살아야죠. 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둥글게 솟아오른 무덤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답했다.
에반젤린 씨, 수녀님.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니 괜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내가 그 마족을 따라갔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두 사람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빌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네가 따라갔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터다. 애초에 그런 녀석들이니까."
"...별로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네요."
"...미안하구나. 이런 데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거리를 벌리는 마왕에 한숨을 폭 내쉬며 손을 잡아당겼다.
그렇지 않아도 덜덜 떨고 있는 주제에 대체 어딜 가려는 걸까, 이 마왕은.
내 손이 본인의 손목을 붙잡았다는 것에 꽤나 놀랐는지, 황금빛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놀란 건 오히려 이쪽인데 말이죠.
"상태가 이런데도 겨우 이런 차림으로 있던 거였어요?"
"이미 신발까지 받았는데, 또 뭘 바라기에는 양심이 없지 않느냐. 심지어 이쪽은 마왕인데."
"마왕이 아니라 '전' 마왕이겠죠."
소녀의 몸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니, 그냥 얼음을 만지는 편이 더 따뜻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수준이었달까.
가만히 놓아두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서 결국 그 위에 내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얹어주고야 말았다.
내 체온이 남아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추위를 막아낼 수 있겠지.
"설마 얼어죽거나 그러고 싶은 건 아니죠? 언제는 제 손에 죽는게 남아있는 유일한 이유라면서요."
"...그렇지."
"그러면 따라와요. 제 손에 죽기 전까지는 절대 죽으면 안 되니까."
마왕의 손을 붙잡고 일으키려다가도, 그녀의 발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그대로 안아올렸다.
이런 내 행동에 조금 발버둥을 치기는 했지만, 약해질대로 약해진 마왕의 힘으로는 제대로 된 저항 따위가 가능할 리 없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고집만 강해서는.
혀를 차면서도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자, 점점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게 되는 건 처음이란 말이다..."
"귀중한 첫 경험을 하게 되었네요."
"...읏."
누군가에게 안겨서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는지, 마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그저 추위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게 맞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처음 봤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인데.
어쩌면 그저 마왕을 닮은 아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녀의 표정은 언젠가 보았던 마왕의 것보다 훨씬 더 풍부했다.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냐. 나는 네 소중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 원수일 뿐인데..."
"딱히 이유는 없어요. 지금 당장은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는데, 언젠가는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살려두는 거죠. 마왕이 용사의 손에 죽는게 아니라 얼어죽게 둘 수는 없잖아요?"
"...그렇구나. 한심하게 얼어죽을 수는 없지."
겨우 그 정도의 말에도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 조금이지만 마왕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왕에게 삶의 이유를 주는 용사라니, 완전히 용사 실격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