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취향 한 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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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취향 한 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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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취향 한 번 참
2022.08.10.
새벽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세경은 퀭한 눈으로 거울을 쳐다보았다.
“이거, 어떡하지?”
세경은 손끝으로 붉어진 피부를 꾹 눌렀다. 목과 어깨가 이어진 곳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있었다.
진태조가 밤새 물고 빨아댄 흔적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도대체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자신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는데.
“어쩌지…….”
지금쯤, 그는 일어났을까?
진 대표가 새벽에 있었던 일로 제게 전화를 걸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오죽하면 협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 알람 소리에 식겁해 잠에서 깨어났을까.
띠리리리-.
순간 적막한 룸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마른침을 삼킨 세경은 긴장한 얼굴로 발신인을 확인했다.
다행히 전화를 건 이는 세경의 매니저인 제훈이었다.
10분 뒤 도착할 거란 말에 세경은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 룸을 나섰다. 호텔 정문으로 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젖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차가 오는가 싶어 세경이 차도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윤세경.”
익숙한 목소리에 세경이 몸을 움찔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짙은 남색 슈트를 입은 태조의 모습이 보였다.
“아, 대표님…….”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흡사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어도 아침부터 그를 볼 줄은 몰랐는데.
패닉이 된 머릿속이 뱅글뱅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가 새벽에 있었던 일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죄송합니다. 그 일은 사고였어요. 아니면, 제가 분위기에 취했나 봅니다……?
온갖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와중, 문득 오래 전 송 실장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 대표에게 반해 고백했던 여배우들이 수두룩하다고 했지. 그 사람들이 다 어떻게 됐다고 했더라…….
‘고백한 여배우들? 보면 몰라. 다 나갔지. 일부는 계약 기간도 다 못 채우고 떠났을걸?’
계약 기간도 못 채우고…….
세경의 머리 위로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혹시 태조가 그 일로 제 마음을 알아채면 어쩌나. 왜 자신과 잔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제가 대표님을 좋아해서요? 그러다 태조가 저를 외면하기라도 하면…….
그럼 고백한 의미도 없이 두 번 다시 그의 얼굴도 보지 못할 텐데.
“…….”
세경은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태조를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차라리 태조가 묻기 전에, 제가 먼저 선수를 치는 건 어떨까?
어젯밤 일은 실수였다고, 제가 대표님을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대표님도 술에 취했고 자신도 좀 취했던 거 같다고.
한순간의 충동적인 행동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세경이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세경 씨가 왜 여기 있어?”
“……네?”
세경이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그와 뜨겁게 몸을 섞었는데.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조는 이곳에 있는 세경이 낯설다는 눈빛이었다.
“왜 아침부터 호텔에 있냐고. 기자들이 보면 오해하게.”
“어, 그게…….”
예상치 못한 반응에 세경이 말을 버벅거렸다.
뭐지? 혹시 새벽에 있었던 일을 없던 걸로 하고 싶어 하는 건가?
그녀는 슬쩍 태조의 표정을 살폈다.
간밤의 일을 모른 척하거나, 저를 떠보려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저 얼굴을 보니 그는 자신과 있었던 일 자체를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 이틀 전부터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요.”
“이틀 전부터?”
되묻는 그의 말에 세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구는 밤새 그 일로 잠도 이루지 못했건만. 정작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라,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집 리모델링 중이거든요. 이전에 살던 집은 전세가 만기 됐고.”
“아아, 그래서 호텔에 장기 투숙 중이다?”
“네.”
“왜 어머니 집으로 가지 않……. 아, 제주도에 계시지.”
뒤늦게 기억이 난 듯, 태조가 말을 바꿨다. 세경은 다소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뇨. 저희 어머니가 제주도에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거든요.”
“가족에 대한 건 계약서 쓸 때 나눈 이야기잖아.”
“그렇긴 해도, 대표님이 다 기억하시는 게 흔한 일은 아니죠.”
세경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19살, 처음 계약해 7년간 묶여 있던 이전 매니지먼트의 대표는 세경을 통해 돈을 벌 궁리만 했지, 그녀의 가족이 어디에 사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7년간 소속사에서 그 흔한 명절 선물 한번 받아보지 못한 터라, 재작년 처음 소속사를 옮기고 추석 선물로 한우를 보내줬을 때 엄마는 이런 걸 받아도 되냐 제게 물었을 정도였다.
“작년에 어머니가 한우 받고 좋아하셨어요.”
“그래? 그럼 올해 또 보내야겠네.”
“근데 대표님은 왜 여기 계세요?”
“강 상무 기다려. 내 차는 다른 데 있거든.”
세경은 흘끗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강 상무가 가져온 건지, 태조가 입고 있는 옷은 어제와 달랐다.
하긴 그 옷을 다시 입을 수는 없겠지.
괜히 어젯밤, 아니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개를 돌린 세경이 손바닥을 파닥거리며 열을 식히자, 그녀를 보고 있던 태조가 손을 뻗어왔다.
“여기.”
태조의 손이 밴드로 가려진 세경의 목에 닿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란 세경이 빛의 속도로 멀어지며 제 목을 가렸다.
“아, 갑자기 만져서 놀란 건가? 미안. 어디 다친 건가 싶어서.”
그저 걱정이 됐던 것뿐인데. 세경이 저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터라, 태조가 머쓱한 얼굴로 사과했다.
“사, 살짝 긁힌 거예요.”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그에게 보일까, 세경은 상처를 가린 목덜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
“…….”
어색해진 분위기에 침묵마저 불편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세경은 혹시 몰라 챙겨온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대표님, 이거…….”
이걸 왜 제게 주냐는 듯, 태조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도로와 접한 곳에서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세경이 손을 흔들자, 검은색 밴이 그녀의 앞에 멈추었다.
태조에게 인사를 한 세경이 차에 올랐다. 그러자 조수석 창문이 열리며 운전대를 잡은 제훈이 소리쳤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그래.”
대충 인사를 받은 태조가 손에 든 음료를 흔들며 세경과 눈을 맞췄다.
“수고해. 이건 잘 마실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세경이 차 문을 닫았다.
세경을 태운 밴이 멀어지자,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우현의 차가 태조의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 탄 태조가 안전벨트를 잡아당기자, 고개를 쭉 뺀 우현이 태조의 손에 들린 음료를 힐끗거렸다.
“그건 뭐냐.”
“그러게.”
무심히 대꾸한 태조가 세경이 준 음료를 내려다보았다.
가방에서 꺼내 주기에 이게 뭔가 싶었는데…….
혹시 이런 걸 좋아하나?
“취향 한번 참.”
그녀가 난데없이 그의 손에 쥐여 준 건.
숙취 해소에 좋다는 ‘견디셔, 헛개차’ 였다.
***
기억하지 못했어.
세경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새벽녘, 태조와 몸을 섞고 나서 혹시나 그가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가정을 하긴 했었다.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으니까.
태조가 맨정신이었다면, 제 손에 입술을 대긴커녕 먼저 잡는 일은 없었을 테니.
하지만, 어쩌면 그가 그 일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태조가 그 일로 제 마음을 알아채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걸 보면.
그리고 아침에 마주친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제게 말을 건넸을 때.
세경은 그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서운함을 느꼈다.
밤새 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게 누구였는데. 나만 좋았나, 대표님도 좋다고 안 놓아줬으면서.
다시 떠올리니 그에게 물린 목덜미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세경은 열이 오르는 목을 매만지며 운전하는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다.
“제훈아.”
“네, 누나.”
“너 술 마시고 필름 끊긴 적 있어?”
“필름이요? 끊긴 적 많죠. 대학 신입생 때, 제가 한창 술에 미쳐 있었거든요. 분명 마지막 기억은 맥줏집이었는데, 눈 뜨니까 자취방이고 동아리 방이었어요. 제가 두 발로 걸어온 건지, 네발로 기어 온 건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더라니까요.”
룸미러로 눈을 마주친 제훈이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럼 필름 끊긴 건 나중에 기억이 나긴 해?”
“기억이 나는 것도 있고, 안 나는 것도 있어요. 근데 그게 다 긴가민가해요. 나중에 뭐 이랬던 거 같다 하면, 그때 같이 있던 녀석이 너 그랬다고 확인해 주고 나서야, 아, 내가 또 한 번 내 인생의 흑역사를 만들었구나, 하는 거죠.”
“그렇구나.”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태조도 시간이 지나면 오늘 일을 떠올리게 될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누나 필름 끊겼어요?”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정지 신호에 걸렸던 차가 다시 출발했다. 세경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태조와 나눴던 대화를 되새겨 보았다.
그는 자신과 밤을 보낸 것은 물론 어제 그의 방에 들어간 것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석주가 자신을 만났다는 걸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굳이 그 일을 밝힐 게 아니라면 아예 덮어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우선 석주의 입부터 막아둬야 했다.
[선배,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세경은 연락처를 뒤져 석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오래 걸리지 않아 금방 돌아왔다.
[어. 괜찮으셔. 넌 밤새 별일 없었지? 진 대표가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를 해서.]
세경은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별일’과 ‘이상한 소리’. 저 두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소리는 뭔데요?]
[아니, 자기가 여자랑 같이 들어왔냐고 묻잖아. 아, 물론 너랑 같이 들어가긴 했지만. 암튼, 내가 아침부터 입원 수속을 밟느라 정신이 없어서 네 얘기는 안 했거든.]
석주가 보낸 메시지에서 뭔가 곤란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태조가 여자와 같이 들어갔냐 물었던 말에 다른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장 나중에 나온 게 저였으니, 세경은 태조가 왜 그런 걸 물어봤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셔츠는 벗겨져 있고, 그 위엔 배스 가운을 덮어 놓고 나왔으니……. 잠에서 깬 그가 수상쩍게 여길 만도 했다.
[안 그래도, 아침에 호텔 정문에서 대표님하고 마주쳤어요. 새벽에 저하고 마주친 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더라고요.]
[그렇겠지. 술에 취해 정신없었으니. 걔가 뭘 기억하겠어.]
[네.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 저랑 호텔에서 마주친 거 대표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시면 안 될까요?]
보내는 즉시 돌아오던 답이 잠시 뜸을 들였다.
[왜?]
짧은 질문이었지만, 세경은 답을 망설였다. 석주가 무언갈 눈치채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대표님이 기억하지 못하는 거 같아, 저도 모른 척했거든요. 저야 상관없지만,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남한테 보이는 게 대표님은 싫으실 수도 있고. 선배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니, 괜히 오해 사는 것도 싫어서요.]
[에이. 술 취한 놈 좀 챙겨준 것뿐인데, 오해는 무슨. 알았어, 네가 원한다면 말 안 할게. 근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지? 그 녀석이 혹시 술 취해서 실수라도 한 건 아닌가 해서.]
재차 확인하는 물음엔 걱정이 가득했다. 세경은 키패드를 누르며 쓰게 웃었다.
[네. 실수한 거 없으세요.]
실수는 제가 했죠.
뒷말을 삼킨 세경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