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충동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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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충동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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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충동의 밤
2022.08.06.
“왜 그러세요? 혹시 급한 일이라도 생기신 거예요?”
“응. 어머니가 지금 병원 응급실에 가셨다고 해서.”
“그럼 빨리 가보세요. 여긴 제가 정리하고 갈게요.”
“아, 그래도 될까? 따로 뭐 할 건 없고. 그냥 저 녀석 신발만 벗기고 내려가 줘. 응?”
세경이 알겠다고 하자, 석주가 다급히 룸을 나섰다.
쿵, 문을 닫은 세경은 발소리를 죽인 채 침대로 다가갔다.
잠이 든 태조의 몸이 규칙적으로 들썩거렸다.
답답한 듯 목을 조인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고, 속이 쓰린 건지 아니면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반듯했던 미간은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잠든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경은 조용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긴 속눈썹과 오뚝하게 뻗은 콧날. 날렵한 턱선과 매끄러운 입술을 보자 괜히 가슴이 술렁거렸다.
태조가 깨어 있을 땐, 이렇게 오래도록 그를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 제 마음이 그에게 들킬까 두려운 탓이었다. 제가 품은 애정을 알아챈 그가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까 싶어서.
“…….”
고요한 새벽. 잠이 든 태조와 룸에 단둘이 남아 그런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고개를 흔든 세경은 머릿속에 피어나는 야릇한 생각을 지우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석주가 시킨 대로 그의 신발을 벗기고, 답답해 보이는 넥타이도 풀어 협탁에 얌전히 접어놓았다.
또 뭘 해두는 게 좋을까?
조금이라도 편히 자게 해주고픈 마음에, 세경은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과 지갑까지 꺼내 넥타이 옆에 모아 두었다.
“으음…….”
그때 뭔가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인 태조가 목을 울렸다.
갈증이 나는지 물을 찾자, 세경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그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물 가지고 왔는데.”
자신의 말을 들었을까. 감겨 있던 태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하지만 여전히 술이 덜 깬 듯 반쯤 감긴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대표님.”
세경이 재차 불렀지만, 그는 손만 허공에 휘적거릴 뿐 좀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그는 세경이 주는 생수병을 누운 상태로 따려 들었다.
저러다 다 쏟지.
일이 커지기 전, 세경은 태조의 손에서 물병을 빼앗아 갔다. 그러자 잠결에 한쪽 눈을 찡그린 그가 세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
태조의 입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좀 정신을 차린 걸까?
세경은 그의 상태를 살필 겸 태조의 곁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저 세경이에요. 정신 차리셨으면 잠깐 일어나 보세요. 그렇게 계시면 물 다 쏟아져요.”
“…….”
“저기요, 대표님?”
다시 주무시는 건가?
태조의 팔을 콕콕, 찔러본 세경이 이번엔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러자 얌전히 침대에 있던 태조의 손이 휙, 튀어 올라 세경의 손을 잡아챘다.
“……!”
깜짝 놀란 세경이 몸을 흠칫거렸다. 눈앞에서 뭐가 왔다 갔다 하는 게 거슬렸는지 태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대표님. 일어나셔야…….”
“……어나. 그러니까…….”
발음이 뭉개져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세경은 귀를 쫑긋 세운 채 태조에게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잠이 드는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자, 마른입을 달싹거린 태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봤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다시 쓰러질 듯 휘청거렸지만.
“앗.”
태조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자 세경이 다급하게 그의 몸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굳어버린 것도 잠시. 그녀는 베개를 모아 둔 침대 헤드 쪽으로 태조의 몸을 밀어냈다.
“괜찮으세요?”
세경이 태조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느릿한 손길로 연거푸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 왜 여기…….”
태조가 반쯤 감긴 눈으로 세경을 쳐다보았다. 석주에게 업혀 와서 그런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저와 마주친 건 기억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요 앞에서 마주쳤어요. 석주 선배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셨고요.”
“…….”
제 말을 듣고 있는 건지, 태조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저를 알아봤으니, 정신은 좀 차린 거겠지. 세경은 뚜껑을 딴 생수병을 태조에게 건넸다.
“여기, 물 드세요.”
세경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태조가 손을 움찔거렸다.
그의 손에 생수병을 쥐여 주자, 태조는 불안한 손길로 물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
세경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태조를 지켜보았다. 들썩거리는 목울대를 타고 흘러내린 물이 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물은 입안으로 들어가는 게 반, 턱을 타고 흐르는 게 반이었다.
아, 저걸 어쩌나.
이대론 옷이고 침구가 다 젖을 것 같아, 세경은 욕실에서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그사이 물을 다 마신 태조는 반쯤 남은 물병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목을 조이는 셔츠 단추를 잡아 뜯듯 풀어내고 있었다.
“제가…… 해드려요?”
세경의 말에 굼뜨게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단추조차 풀지 못한 게 답답했던지, 태조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허락에 침을 꿀꺽 삼킨 세경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태조의 셔츠에 닿는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객기였을까.
뒤늦게 제가 무슨 말을 한 건가 싶었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세경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그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냈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물에 젖은 피부가 드러났다. 고개를 돌린 세경은 욕실에서 가지고 온 수건을 태조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젖은 곳을 좀 닦았으면 해서……. 엇!”
훅, 당겨진 힘에 세경의 몸이 휘청거렸다. 수건을 가져가라고 했더니, 태조는 아예 세경의 손까지 가져가버렸다.
위잉-.
고요해진 방에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더 크게 들렸다.
세경은 숨도 쉬지 못한 채 태조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잡힌 손이 태조의 얼굴과 가슴 위를 오가고 있었다.
물기를 다 닦아낸 그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차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
저 눈에 온전히 자신만 담기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경의 몸이 홀린 듯 태조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녀가 더듬거리는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건드리자, 태조가 세경의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아…….”
찌릿한 통증에 놀란 세경이 몸을 주춤거렸다. 그러자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이 다시금 훅, 당겨졌다.
멀어진 거리가 무색하게 두 사람의 간격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대표님, 저는…….”
세경이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할짝거리자, 그녀를 응시하던 태조의 눈가가 가늘게 꿈틀거렸다.
그의 입술이 굽어진 세경의 손가락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을 때.
눈을 감은 세경이 태조의 목을 끌어안았다.
***
손바닥에 닿는 살갗이 부드러웠다.
가느다란 팔은 넝쿨처럼 그의 목을 휘감았고, 두 입술이 부딪칠 때마다 머리를 헤집는 손길에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태조는 자신을 끌어안은 여자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고,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한 입술이 태조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는 흐릿해진 시선으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작고 앙증맞은 입술이 그에게 뭐라 속삭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겸 여자의 허리를 더 끌어당겼다.
여자의 턱 끝과 입술 위로 태조의 입술이 옮겨졌다. 그리고 탐스러운 입술을 다시금 머금던 순간…….
띠띠띠띠!
“……이런 씨.”
나직한 욕설과 함께 눈이 확 떠졌다.
요란한 알람을 박자 삼아 끔찍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후려치고 있었다.
그는 지끈대는 이마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사방에서 딱따구리가 제 머리를 쪼아대는 것 같았다.
“여긴…….”
태조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풍경을 보자 집이 아닌 호텔이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문제는 제가 어떻게 여길 온 건지 모르겠다는 거지만.
그리고…….
“…….”
고개를 내린 그는 벗겨진 옷과 이불 대신 덮고 있는 가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을 돌아봤지만, 침대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핸드폰 알람을 끄고 지갑을 열어보았다.
돈과 카드는 그대로였다. 그 와중에 넥타이는 곱게 개켜져 있었고 언제 꺼내 먹었는지 생수병은 반쯤 비어 있었다.
“미치겠네.”
호텔 방을 둘러본 그는 천천히 어제 일을 상기해보았다.
어제 미국에서 온 플랫폼 대표, 데런 베이즈와 식사 후 술자리를 가졌고 양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다 주량을 좀. 아니 많이 넘기긴 했었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문석주가 저를 데리고 나온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들은 누군가 잘라버린 것처럼 중간중간 끊어져 있었다.
“그럼 여긴 문석주가 데리고 온 건가.”
태조는 밤새 들어온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녘 석주에게서 너무 취해 호텔 방에 던져놨다는 짤막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근데 내 꼴은 왜 이런 건데.”
인상을 쓴 태조는 답지 않게 정돈된 주변을 훑어보았다.
생긴 건 곰 같은 게 어울리지 않게 신발이며 넥타이는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다 싶었다.
문제는 흐트러진 옷차림과 이불처럼 덮은 가운, 그리고 제 옷에 묻은 이 얼룩덜룩한 것들인데.
슬리퍼를 찾아 신은 그는 룸 안을 둘러보았다.
책상 아래 있는 휴지통을 발로 툭 건드리자, 빈 통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안이 빈 걸 보니 문제는 없었던 거 같고.
그는 거울 속에 비친 거칠거칠한 제 모습을 보곤 핸드폰을 들었다.
강 상무라 적힌 연락처를 누르자, 반대편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아침부터 왜?
“내 집에서 옷 좀 가져다줘. 속옷도 같이.”
- 뭐? 속옷까지?
핸드폰 너머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어디냐, 하는 말에 태조는 호텔명과 룸 넘버를 알려주었다.
“아, 올 때 물도 하나 사 오고.”
- 너 돈 없냐?
직접 사 먹으란 말을 남기고 전화가 뚝 끊어졌다.
픽 웃은 태조가 핸드폰을 침대에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한번 쓴 듯 구겨진 수건과 휴지 뭉치가 든 쓰레기통을 차례로 훑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달큼한 잔향.
“…….”
왠지 모를 싸한 기분에, 태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
“내가 네 비서냐?”
문을 열자, 눈앞에서 쇼핑백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태조는 우현이 가져온 쇼핑백을 낚아채곤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은?”
“안 먹었어.”
퉁명스럽게 대답한 태조가 가운을 벗었다.
남들은 다비드 같은 조각상이라 찬양해도, 같은 거 달린 놈의 몸 따위 봐봤자 눈만 썩는다. 우현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어제 술 엄청 먹었다며. 해장 안 해도 돼? 아님 지금 룸서비스 시킬까?”
“됐어. 아침 먹고 싶으면 나가서 먹고.”
금세 셔츠까지 갈아입은 태조가 단추를 잠갔다.
우현은 룸서비스 메뉴판을 뒤적거리다가 어딘지 모르게 불쾌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저기압인데?”
“그냥, 뭔가 찝찝한 느낌이라.”
넥타이를 조인 태조가 협탁으로 시선을 던졌다. 곱게 접힌 넥타이 위엔 반짝이는 귀걸이 한쪽이 놓여 있었다.
씻고 나와 이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혹시 몰라 석주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어제 여자랑 같이 호텔 방에 들어왔냐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이라곤, ‘미친, 아직 술 덜 깼냐?’는 타박뿐이었다.
하긴, 그 곰이 정신도 못 차리는 저를 침대에 던져두었다는데, 여자는 무슨. 호텔 청소가 덜 되었던 거겠지.
이러나저러나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가자.”
어제 입은 옷들을 쇼핑백에 쑤셔 넣은 태조가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버릴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귀걸이까지 함께 챙겨 룸을 나섰다.
“차 빼 와.”
우현에게 쇼핑백을 건넨 태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비서도 모자라 이제는 기사 취급까지 하냐며 투덜댄 우현은 지하 3층 버튼을 눌렀다.
태조는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걸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키를 반납하고, 로비로 내려온 그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눈을 좁혔다.
“윤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