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뭘 잃어버렸다고 할 건가? (5/100)


05. 뭘 잃어버렸다고 할 건가?
2022.08.17.



 
세경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을 하자, 주희가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장비를 정리하고 있던 스태프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두 사람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혼자 돋보이려고 혼자 나대고.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면 마음에 차지 않아 하잖아, 너.”

아, 그러니까 지금 오늘 촬영이 자기 위주가 아닌 게 짜증이 난 건가?

세경은 민망하게 뜬 제 손을 한번 흔들더니 손끝에 후, 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각자도생이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여기 우리 일터잖아. 내가 네 보모도 아닌데. 일일이 챙겨줘야 할 필요가 있어?”

“뭐?”

세경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주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제 모습이 질질 짜는 거였으니, 지금까지도 저를 만만히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누, 누가 너한테 챙겨달라고 했어? 나는 배려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거야. 같이 출연했는데 너만 그렇게 돋보이면, 나는…….”

묻히겠지. 어쩌면 예능엔 어울리지 않는다며 섭외가 안 올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건 주희의 사정이지, 제 사정은 아니었다.


“너도 여전하네.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세경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주희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넌 여전히 모든 걸 네 기준으로 보잖아. 오늘 촬영한 예능. 원래 우리 영화 홍보를 위해 잡힌 거였어. 너는 오늘 나오지 못한 은교 씨 대신 나온 거고.”

“…….”

“그러니 네가 돋보이지 못해서 억울해하지 말란 소리야. 내 탓으로 돌리지도 말고. 예전엔 우리가 같은 팀이어서, 나 혼자만 돋보이는 게 미안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잖아?”

“뭐, 너 무슨…….”

저를 떼쟁이 아이 취급하자, 주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무어라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주먹을 쥔 손만 부들부들 떨어댔다.


“미안하게 됐네. 나는…… 그저 같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던 건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입술을 꾹 깨문 주희가 억울한 얼굴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리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스태프가 세경을 힐끗거렸다. 선빵을 날린 건 저쪽인데, 어째 욕을 먹는 건 제 쪽인 거 같았다.


“누가 보면 네가 먼저 시비 건 줄 알겠다.”

세경에게 매달린 기정이 도망치는 주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연기를 발로 배운 건 아닌지,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면 퍽 억울해 보일 법도 했다.


“누나, 괜찮아요?”

상황이 종료되자 세트 바깥쪽에 있던 제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중간에 끼어들어 말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 세경의 시선을 받고 멀찍이서 지켜보고만 있던 차였다.


“괜찮아. 머리채 잡고 싸운 것도 아니고.”

별일 아니라는 듯, 세경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기정과 인사를 나눈 그녀는 스태프들에게 수고했던 말을 남기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누나 호텔로 바로 가요?”

“아니. 나 중간에 약속이 있어서. 이쪽으로 가 줄 수 있을까?”

세경이 약속 장소를 검색해 보여주자, 제훈이 곧장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어 넣었다.

차가 출발하자 세경은 의자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퇴근 시간에 걸려, 도로는 차가 뿜어내는 후미등의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욱신거리는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새벽부터 혹사당한 몸이 뒤늦게 아려오자, 새삼 태조와 밤을 보낸 게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가 참 길구나.”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한숨 섞인 목소리에 제훈이 뒤를 돌아봤지만, 세경은 이미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

탁탁.

태조가 거친 손길로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하루 종일 찝찝함이 가시지 않아 일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태조는 티비를 켜고 소파에 앉았다. 케이블에선 세경이 예전에 출연했던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는 화면을 응시하면서도 머릿속으론 간밤의 일을 떠올리려 애썼다.

석주는 호텔 방에 본인 말고 들어온 사람이 없다고 했다. 카드키는 두 개 다 룸에 있었으니 외부에서 문을 딴 게 아닌 이상 누군가 그 안에 들어올 리도 없었다.

의심스러운 건 침대 헤드 쪽에서 발견한 귀걸이와 긴 머리카락. 그리고 누군가 욕실을 사용한 것 같은 흔적과 잔향이었다.


“거기에 방향제가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던 태조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충 훑어봤던 터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매니티는 다 새것이라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없었으니, 그 향기일 리는 없을 텐데.


“그리고 귀걸이는…….”

태조가 미간을 찡그렸다. 청소가 미진한 건 그렇다 쳐도, 그게 제일 문제였다.

오죽하면 호텔에 전화를 걸어 CCTV를 볼 수 있나 확인까지 해봤을까.

하지만 호텔 측은 개인정보보호법을 이유로 CCTV 공개를 거부했다. 혹시라도 범죄가 의심되는 상황이라면 경찰을 대동해 CCTV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지만…….

도대체 뭘 잃어버렸다고 할 건가?

내 기억? 그게 아니면…….


 
슬쩍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본 태조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피곤한 듯 거친 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누가 들어온 것도 아니면……. 그 상황에서 나 혼자 해결한 거라고?”

한창 풀지 않았으니, 확실히 욕구불만일 수도 있었다. 요즘 또 투자자들을 만나느라 스트레스가 꽤 쌓이지 않았던가.

타이밍 나쁘게도 그때는 만취한 상태라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 있기도 했고.

하지만 풀 땐 풀더라도 제정신일 때 풀어야지. 기억이 끊어졌을 때 풀어서 이렇게 찜찜해질 건 뭐란 말인가.


“그래도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긴 하지.”

귀걸이는 전 투숙객의 물건이라 치고, 문석주가 제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전제하에.

게다가 자신과 밤을 보내고 나서 굳이 아침에 사라질 필요가 있나?


“없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면.

태조가 톡톡,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나름의 답을 내리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아직도 묘한 의심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번호 하나를 찾았다.

티비에 나오는 세경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태조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침에 꾼 꿈이나, 오후에 잠깐 떠오른 장면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 어, 왜?

“너, 새벽에 나 혼자 호텔 방에 데려다준 거 확실해?”

우선 문석주에게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딸랑.

가게 문을 열자, 머리 위에서 귀여운 종소리가 울렸다.

세경은 시간을 확인하고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약속을 잡은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끔찍한 서울의 도로 정체 상황에 발목이 잡힌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홀 직원이 다가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세경이 세 명이라고 하자, 직원은 빈자리를 가리키며 원하는 곳에 앉으라고 했다.


“주문은 지금 하시겠어요?”

“아뇨. 일행이 오면 할게요.”

직원은 부족한 식기를 세팅해 놓고, 마지막 오더 타임을 알려주었다.

어디쯤인지 한번 연락해 볼까.

핸드폰을 꺼낸 세경이 키패드를 누르고 있을 때였다. 출입문에 달린 종이 다시 한번 귀엽게 울더니 활짝 열렸다.

고개를 들자 낯익은 여자와 낯선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세경이 손을 들자, 남자의 팔에 팔짱을 낀 여자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뛰듯이 걸어온 유나가 의자를 빼고 세경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유나에게 인사를 한 세경이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인 남자는 세경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원호입니다.”

“윤세경이에요. 앉으세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제야 얼굴을 뵙네요.”

“그야, 네가 바쁘니까 그렇지.”

옆에서 한마디를 거든 유나가 세경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자, 먹고 싶은 거 고르세요.”

“네가 골라. 나는 다 괜찮으니까.”

“으휴, 또 나왔네. 저 입버릇.”

코끝을 찡긋거린 유나가 메뉴판에서 음식 몇 개를 골랐다.

직원이 주문을 받고 떠나자 유나는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세경에게 내밀었다.


“저 결혼합니다. 와주세요, 윤세경 배우님.”

두 손으로 봉투를 받쳐 든 유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세경은 피식 웃으며 청첩장을 꺼내 보았다.

심플한 디자인에 적힌 간략한 인사말 아래, 이유나와 지원호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너 그날 올 수 있어?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시간 비워뒀어. 가야지. 누구 결혼식인데. 근데…….”

장소와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세경이 말끝을 흐렸다. 유나가 왜 그러냐고 묻자, 세경이 청첩장을 갈무리하며 마저 말을 이었다.


“다른 애들한테도 연락했어?”

“누구? 우리 멤버들?”

“응.”

“음, 주희는 그 뒤로 연락 안 한 지 오래됐고. 다른 애들은 뭐……. 자기들도 바쁘다 보니까. 연락은 했는데 다들 일이 있어서 못 온다 하더라고.”

유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참, 주희는 배우 한다고 어디 소속사랑 계약했다던데. 봤어?”

“어. 오늘 만났어. 같이 예능 촬영했거든.”

“예능? 아니, 걔는 연기한다면서 왜 예능 촬영부터 했대?”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유나가 어서 먹자며 포크를 들자, 원호는 옆에서 피자 조각을 떼어내 두 여자의 접시에 내려놓았다.


“주희는 어때?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좀 변했으려나?”

“내가 볼 땐 똑같던데. 나한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하는 거 보니.”

피자를 우물거린 유나가 인상을 썼다.


“걔가 뭐라고 했는데?”

“…….”

세경은 슬쩍 옆에 있는 원호를 살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러 나온 자리인데, 어째 남의 험담을 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이 사람 눈치는 안 봐도 돼. 원호 씨도 알 건 다 알아.”

“네. 유나한테 다 들었거든요.”

예비 신부의 말에 예비 신랑이 맞장구를 쳤다.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데요?”

“유나가 연예계 생활했을 때의 일 전부요. 세경 씨가 자기 수입까지 나눠준 거랑 해체할 때 트러블이 있었다는 거까지.”

정말 다 이야기했구나.

세경이 별걸 다 말했다는 듯 눈을 흘기자, 유나가 민망함에 혀를 살짝 내밀었다.


“원호 씨랑은 계약 끝나고 얼마 안 돼서 만났거든. 정말 힘들었을 때 같이 있어 줬어. 그때 힘들어서 술도 막 마셨는데, 내가 취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다 했더라고.”

하긴 계약이 끝나고 그룹이 해체되었지만, 연예계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건 주희와 세경 둘뿐이었다.

유나는 가수가 아니더라도 연예계 활동을 계속하고 싶어 했지만, 자신과 계약하겠다는 소속사가 없어 그 꿈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요가 강사로,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팬들과 만나고 있었다.


“그래서, 주희가 뭐라고 했냐니까.”

유나가 포크를 접시에 두드리며 재촉했다. 세경은 촬영이 끝나고 나눈 대화를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혼자 돋보이려고 혼자 나댄다고. 주인공이 아니면 마음에 차지 않아 한대, 내가.”

유나의 턱이 떡, 벌어졌다. 쨍그랑, 손에서 떨어진 포크가 접시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자기반성이야? 아니, 고해성산가? 걘 왜 자기 얘기를 너한테 하는 건데?”

마치 제가 겪은 일인 양 흥분한 유나가 발을 마구 굴러댔다.


“너 또 바보처럼 그 말을 듣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아니야. 나도 한마디 했어.”

진짜? 라고 묻는 듯 유나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울면서 나가더라고.”

“진짜 안 변했네. 지한테 불리하면 먼저 눈물부터 흘리는 건.”

과거의 일이 생각나는지 유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호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직 제 편인 듯, 곁에서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세경이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자, 유나가 물었다.


“그나저나 세경이 넌, 사귀는 사람 없어?”

“어? 어, 나는…….”

순식간에 화제가 바뀌자 세경이 당황해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 얼굴도 예뻐 몸매도 돼. 거기에 돈도 많은데. 연애는 안 하는 거야, 못하는 거야?”

“그게 못하는 거 같은…….”

세경이 조그마한 소리로 대답을 하는데, 옆에서 원호가 끼어들었다.


“세경 씨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나 보지.”

“마음에 드는 사람? 아, 그 손수건의 남자!”

문득 떠올랐다는 듯 유나가 손바닥을 짝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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