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뭐래. 이 미친 곰이. (6/100)


06. 뭐래. 이 미친 곰이.
2022.08.20.



 


“손수건의 남자?”

원호는 그게 무슨 이야기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전에 세경이가 촬영장에서 만난 남자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거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아주 머리에 딱 박혔나 봐. 그날 너무 피곤해서 세경이가 촬영장에서 코피를 흘렸는데, 되게 잘생긴 남자가 다가와서는 ‘고개 숙여요.’ 하고 자기 손수건으로 피가 나는 걸 닦아줬대.”

유나는 마치 제가 겪은 일인 양, 신이 난 얼굴로 떠들었다.

그녀의 말에 몰입한 원호는 옆에서 오오, 하는 감탄사를 연달아 쏟아내고 있었다.

그보다…… 내가 저런 이야기까지 했던가?

대사까지 찰지게 붙이는 유나를 보며 세경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근데 그 남자, 배우는 아니라고 했지? 너 그 사람 만났어?”

“어? 어어.”

얼떨결에 대답을 한 세경이 물로 목을 축였다.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대답이라 유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에 대한 대답이야? 배우가 아니란 거? 아니면 그 사람 만난 거?”

둘 다.

속으로 답을 삼킨 세경은 곤란한 얼굴로 유나의 시선을 피했다.


“그 사람, 배우는 아니지만 문석주 배우님하고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 그럼 너 그분하고 만났을 수도 있겠네. 너 지금 문 배우님하고 같은 소속사잖아?”

기억력도 좋다 싶었다. 3년도 더 된 일인데, 왜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거지?


“그게…….”

세경이 눈동자를 굴렸다.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다고, 이제는 옆에 앉은 지원호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아니 왜, 청첩장을 받으러 온 자리에서 자신의 짝사랑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냐고.


“만나지는 못했어.”

“퇴사하신 거야? 그럼 문 배우님한테 물어보지. 그분은 알고 계실 거 아냐.”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사람은 회사를 나간 적도 없으니까.


“됐어.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얼른 먹기나 하자. 여기 곧 있음 문도 닫아야 한대.”

말을 돌린 세경이 유나의 접시에 샐러드와 파스타를 올려주었다. 그녀는 대놓고 말을 돌리는 세경을 향해 입을 뚱하게 내밀었다.


“수상한데…….”

“수상하긴 뭐가.”

무심히 대꾸한 세경이 그만하라며, 유나의 입에 닭고기 하나를 물려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 정도의 식사 자리가 끝나고, 레스토랑을 나온 세경이 두 사람을 배웅했다.

원호가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오자, 조수석에 탄 유나가 차창을 내리고 세경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못다 한 이야긴 나중에 꼭 다시 들을 거야.”

“그러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세경의 손을 유나가 꽉 움켜쥐었다.


“너도 알지? 내가 너한테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거. 우리 팀 너 없었으면 사실 7년 동안 버티지도 못했어. 누구보다 네가 많이 고생했다는 거 알아. 그때 너 아니었으면 우리……. 아니, 나는 정말 우울증에 빠졌을지도 몰라.”

유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울먹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세경은 부러 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메리지 블루인가? 오늘따라 어울리지 않게 왜 이래. 나 여기 닭살 돋은 거 봐.”

“야, 너는 진짜.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데.”

욱한 유나의 눈에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세경은 피식 웃으며 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진지한 거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 네 맘 다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 안 해도 돼. 들어가. 나중에 결혼식장에서 보자고.”

“씨이……. 알았어. 암튼, 나는 네 편이니까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뭐든 다 도와줄 테니.”

“그럴게.”

세경이 유나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세경도 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징징, 짧게 울렸다.

[너 정말 태조하고 아무 일 없던 거 맞지?]

난데없이 들어온 석주의 메시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지, 진 대표가 설마 다 기억을 한 건가?

세경이 답장을 보내려고 키패드에 손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화면이 바뀌며 액정에 발신인이 떠올랐다.

[진태조 대표님]

헉. 당혹감에 미끄러진 손이 초록색 통화 버튼을 쭉, 밀어버렸다.


- 여보세요?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경이 질끈 눈을 감았다.


“네. 대표님.”

어쩐지 목소리 끝이 양 울음처럼 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세경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왠지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

통화를 마친 태조는 핸드폰을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니라고 하는데, 거짓말하지 말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는 석주와 통화한 내용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호텔 방에 저를 혼자 데려다준 게 맞냐 묻자,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 틈이 뭔가 미심쩍었다.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대답만 하면 되는데, 그 오묘한 시간차는 대체 뭐란 말인가.


- ……비싼 술 먹고 왜 이래 진짜.

찰나의 간격을 두고 나온 말은 그에 대한 힐난이었다.

길바닥에 버리고 간 것도 아니건만, 왜 아침부터 호텔에 그를 데려다준 거 가지고 저를 달달 볶냐는 뜻이었다.


-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 이상한 일이라도 있어?

이상한 일이라면 있지. 셔츠는 벗겨져 있고, 이불 대신 가운을 덮고 있는 데다, 옷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이 남아 있는데.

이게 이상한 일이 아니면 뭐가 이상한 일이겠어.


“…….”

하지만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해도 저런 내밀하고도 사적인 영역까지 주절주절 밝힐 순 없었다.


“아니. 누가 있었던 거 같아서.”

- 귀신이 들어간 게 아니면 내가 있었겠지. 너 업고 들어간 게 힘들어서 내가 물 좀 마셨다. 왜? 그거 가지고 그러냐?

아, 그러고 보니 협탁 위에 누가 물을 마셨던 흔적이 남아 있었지.

그래서였나? 욕실이 좀 흐트러져 있었던 건.


“넌 언제 갔는데?”

- 어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연락받고 금방 나왔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누군가 석주를 부르고 있어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명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석주가 저를 혼자 호텔에 데려놓았다면 제가 한 가정도 얼추 맞아떨어진다.

여자와 같이 밤을 보낸 게 아니라면 제가 알아서 해결한 거겠지.

주량을 한참 넘겨 필름도 엉망진창으로 끊어졌으니,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 그렇다면…….”

태조는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켰다. 찝찝함을 털어낸 그는 주방에서 커피를 내려 소파로 돌아왔다.

티비에선 아까부터 윤세경이 나왔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저게 3년 전인가?”

그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잔을 기울였다.

세경은 지금보다 앳된 모습이었다.

태조는 저 시절의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세경을 처음 만난 것도 딱 저쯤이었으니.

한파가 몰아치던 어느 추운 겨울날, 석주가 출연하던 드라마 촬영장이었다.

당시 석주의 매니저가 부친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회사는 그에게 임시 매니저를 붙여주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 붙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 손이 비는 건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매니저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장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고는 첫날부터 벌어졌다. 잠시 대기 중에 커피를 가지고 오던 매니저가 넘어지면서 촬영 의상을 못 쓰게 만들었다나 뭐라나.

그 일로 석주는 앞선 촬영까지 다시 찍어야 했고, 촬영장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시베리아 벌판처럼 얼어붙었다 했다.

물론 뒤늦게 보고를 받은 우현은 뒷목을 잡았다.

하지만 현장에 첫 출근을 한 신입 매니저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는 일은 그렇게 배우는 거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석주가 사과를 하면서 일은 그렇게 일단락된 듯했으나, 현장이 걱정됐던 우현은 태조에게 가서 피디라도 한번 만나보라 권했다.

그리고 때마침 근처에 볼일이 있던 태조는 일을 마치고 촬영장을 찾아갔다.


“하아.”

차에서 내리자 내뱉는 숨결에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그가 도착했을 때, 석주는 한창 촬영을 하는 중이었다.

태조는 신입 매니저에게 인사를 한 뒤,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멀찍이서 대본을 보고 있던 세경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날도 추운데 차에 들어가 있지.

추위에 덜덜 떠는 몸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저거였다.

영하 13도에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날이었다.

두꺼운 파카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지만, 찬바람에 노출된 뺨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 사람 매니저는 뭐 하는 거야?

태조가 마뜩잖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찰나, 자리에서 일어난 세경이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동시에 후드득,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빨간 피가 바닥을 적시자 세경이 손으로 제 코를 막고 고개를 젖히려 들었다.

깜짝 놀란 태조가 그녀에게 달려갔다.


“고개 숙여.”

태조가 손수건을 꺼내 세경의 코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뒤따라온 매니저에게 물티슈와 휴지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뭐 해? 고개 앞으로 숙이라니까.”

빨갛게 얼어붙은 귀가 놀란 듯 쫑긋거렸다. 태조는 굳어서 저를 보는 세경의 목덜미를 잡고 살짝 힘을 주었다.

그제야 뒤로 젖혀 있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던 세경은 태조의 눈치를 보다 손을 움직였다. 그러다 제 손에 피가 묻은 걸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저, 이제 괜찮…….”

“어디가 괜찮은데.”

손수건을 살짝 떼서 보자, 여전히 피가 주룩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하나도 안 괜찮네.”

태조가 다시 세경의 코에 손수건을 붙였다. 그녀는 피 묻은 손으로 그를 만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허공에 두 팔만 띄워 놓았다.

그 와중에 대본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이거 잡고 있어 봐요.”

태조가 손수건을 눈짓하자 세경이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녀가 손수건으로 코를 막는 사이, 태조는 매니저가 건네는 물티슈로 제 손을 닦아냈다.


“뭐야. 얼잖아, 이거.”

꺼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혹독한 추위에 얼어붙은 물티슈를 보며 태조가 인상을 썼다.

그는 빳빳해진 물티슈를 우그러트리곤 휴지를 뽑아 세경에게 내밀었다.


“매니저는 어디 갔어요?”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일? 자기가 담당하는 배우는 놔두고?”

“네. 저 말고 다른 멤버들 스케줄이 있거든요.”

“다른 멤버라니?”

태조가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자, 신입 매니저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윤세경 씨, 가수 활동도 같이하거든요. 걸 그룹 멤버예요.”

“아아.”

난 또,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기에 연기만 하는 줄 알았지.


“그렇다고 그쪽만 이렇게 덩그러니 두고 간 겁니까? 이 혹독한 추위에? 매니저 더 없어요?”

“네.”

“그래서 바깥에서 달달 떨며 대본을 보는 중이고?”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세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조는 추위에 덜덜 떠는 손을 보며 속으로 욕을 씹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회사길래, 이 추위에 자기네 연예인을 이렇게 내팽개치지?


“으악! 이게 뭐야!”

그때 뒤에서 문석주의 촐싹 맞은 비명이 들려왔다.

태조가 미간을 좁히고 뒤를 돌아보았다.

험악한 표정의 태조와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는 세경을 번갈아 본 석주가 충격에 찬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헉. 너 세경 씨한테 주먹질이라도 했냐?”

뭐래. 이 미친 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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