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손수건의 남자 (7/100)


07. 손수건의 남자
2022.08.24.



“헛소리 말고. 너 촬영은 다 끝났어?”

“다 끝난 건 아니고. 다음 촬영까지 대기 좀 해야지. 근데…….”

석주가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태조가 눈치껏 입을 열었다.


“여기 윤세경 씨 매니저가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비웠다고 하네.”

“뭐? 아니, 이 추운 날? 에이, 진작 말하지. 그럼 내 밴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을 텐데.”

“아니에요. 저도 조금 있으면 또 촬영 들어갈 텐데.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다니. 목소리가 새끼 염소처럼 달달 떨리는 게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들어가 있어요. 석주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거라면 걱정 말고. 어차피 내가 여기 있을 거라. 이 녀석은 내 차에 있으면 되니까.”

“아니. 불편하다니! 나처럼 편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오…….”

석주가 펄쩍 뛰며 반박했으나, 태조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준 손수건은 돌려받지 못했는데.

지이이이잉.

길게 우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태조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핸드폰을 든 그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고 팀장님.”

- 진 대표님.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고 팀장은 태조를 비롯해 그의 가족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됩니다. 말씀하세요.”

- 음, 낮에 말씀하신 성수동 주상복합 아파트 말입니다. 확인해 보니 당장 들어가 살아도 상관없긴 한데, 냉장고를 장기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고장이 난 모양입니다.

“그래요? 다른 건요.”

- 가전제품이나 가구 모두 바로 사용해도 될 만큼 깔끔합니다. 오늘 점검하면서 청소도 마쳤고요. 필요하다면 냉장고는 지금 바로 주문 넣어서 내일 설치 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표님이 그쪽으로 들어가시는 건가요? 지금 살고 계신 한남동 집은 어쩌시고요?

“제가 들어갈 건 아니고. 장기간 호텔에서 배회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일단 알았습니다. 그 사람한테 물어보고 다시 연락드리죠.”

-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고 팀장과 통화를 마친 태조가 세경의 번호를 찾았다. 핸드폰을 들고 있었는지, 그녀는 신호가 가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네. 대표님.

핸드폰을 귀에 댄 태조가 창밖을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떨려. 오늘은 춥지도 않은 거 같은데.


“뭐 하고 있었어? 전화를 빨리 받네?”

- 친구 만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음, 그보다…… 무슨 일이세요?

“아, 다른 게 아니고. 세경 씨, 지금 호텔에서 머물고 있잖아.”

- 네.

“혹시 다른 곳으로 들어갈 생각이 있나 해서. 지금 아파트 하나가 비는 곳이 있거든. 가구랑 가전은 다 있고. 냉장고만 교체하면 되는데. 세경 씨가 들어간다고 하면, 거기 쓰라고.”

- 아……. 그거 때문에 연락하신 거예요?

세경의 반응에 태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안도한 목소리였다.


“음, 그렇지. 왜, 뭐 다른 일 때문에 한 줄 알았어?”

- 그건 아니고요. 어. 일단 호의는 감사한데, 괜찮아요. 호텔 생활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기자가 아니라도 투숙객들하고 종종 마주칠 텐데. 불편하지 않겠어?”

- 마주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던데요, 뭐.

“진짜, 호텔이 더 괜찮아? 이거 그냥 빌려주는 거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 나 두 번은 안 권하니까.”

- 두 번 권해도 제 답은 똑같아요. 그래도 신경 써주신 건 감사합니다.

아무튼, 뭘 해줘도 쉽게 받아주는 법이 없지, 아주.


“세경 씨가 그렇다면 뭐. 그래도 그 집은 당분간 비어 있으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마음 바뀌면 말해.”

- 네. 그럴게요. 그럼 쉬세요.

“그래.”

통화를 마친 태조가 손안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귓가가 간질간질했다.

세경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지.


“옛날 일을 떠올려서 그런가?”

귓가를 긁적거린 태조가 소파 위로 핸드폰을 던졌다.

***

전화를 끊은 세경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태조의 전화를 받기 직전, 석주의 문자를 본 터라 겁을 집어먹은 탓이 컸다.

아무 일도 없었냐, 묻는 그 문자에 당연히 태조가 그 일을 기억해 낸 줄로만 알았다.


“후우.”

세경이 길게 숨을 내쉬곤 몸을 일으켰다. 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번엔 석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선배님.”

- 어, 세경아. 혹시 내가 보낸 문자 못 봤어?

“봤어요. 답장하려 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 누구한테?

“진 대표님이요.”

흐익. 반대편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석주는 태조가 아침부터 제게 전화를 걸어 저 혼자 방에 들어왔냐 계속 묻는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래서 제가 같이 들어갔다고 말씀하셨어요?”

- 아니. 네가 아침에 부탁한 것도 있어서 말은 안 했는데…….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석주가 말끝을 뭉그러트렸다.


- 걔가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 거 보면,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거거든.

“…….”

- 나야 세경이 네가 어떤 앤 줄 아니까 믿는데. 그게 참……,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만취한 태조가 너에게 몹쓸 짓이라도 했나 싶어서.

선배, 그 몹쓸 짓 저도 같이한 거 같은데요…….


“말씀드렸잖아요, 대표님 실수한 거 없으시다고. 음, 아마 셔츠가 물에 젖어서 그러신 걸 거예요. 대표님이 중간에 물을 찾으셔서 드리긴 했는데……. 반은 마시고, 반은 다 흘렸거든요.”

-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앞에 석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세경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시간 많이 늦었다. 들어가서 쉬어라.

“네. 선배도 쉬세요.”

통화를 마친 세경이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서늘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자, 그녀는 옆머리를 넘겨 귀에 걸었다.


“그 손수건 아직 가지고 있는데.”

세경이 유나의 말을 떠올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뺨이 얼어붙을 정도로 시렸던 겨울, 코끝에 스며들던 태조의 향기와 목덜미에 닿았던 따뜻한 체온.

석주가 옆에 있어도, 태조밖에 보이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 같은 건 믿지 않았는데, 그게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포마드로 넘긴 머리에 드러난 반듯한 이마. 태조는 슈트 위로 걸친 카멜 빛 코트가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심장이 자르르 울려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었다.

그 뒤로 못 볼 줄 알았으면 태조의 얼굴을 계속 눈에 담아두는 거였는데.


“큰일 났네.”

생각하니 또 보고 싶잖아.

당분간 태조를 피해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세경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여유로운 주말 아침.

푸석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선 태조가 잔뜩 인상을 썼다. 양치를 하느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손이 다른 생각에 빠지자 점차 느릿해졌다.

그게…… 무슨 꿈이었더라?

태조가 입안 가득 물을 넣고 우물거렸다.

분명 잠에서 깨기 전까지만 해도 뭔가 중요한 걸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주 잠깐 사이에 꿈의 내용이 휘발된 것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렇다고 잠을 설칠 만큼 꿈 내용이 별로였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깨고 나서도 기분이 좋을 만큼,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여자의 모습도 잠깐 보였던 거 같았다.


“대체 왜 이러지?”

요즘 시나리오를 너무 많이 봐서, 그게 다 꿈으로 나오는 건가?

연거푸 입을 헹군 태조가 세수를 하고 욕실을 나왔다. 그는 갓 내린 커피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티비를 켠 태조가 태블릿으론 포털 사이트의 연예면을 띄워 놓았다.

사건은 주중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터지니, 시간이 날 때마다 기사들을 체크해야 했다.


“밤새 별일 없었나.”

태조는 메인 페이지에 올라온 기사 헤드라인을 빠르게 훑었다.

소속사 연예인의 이름이든 그들의 현재 출연작이든, 익숙한 것들이 눈에 띄기만 하면 무조건 클릭부터 했다.

그리고 십수 개의 기사 중 태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문석주의 이름이었다.


“연기만 하는 곰인 줄 알았더니. 이제는 중매도 하네?”

태조가 석주의 기사를 보며, 픽 웃었다.

모 연예인의 열애설 기사에 석주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내용을 보니, 그 커플을 이어준 사람이 바로 문석주라고.

그 눈치 없는 곰이 정말 두 사람을 이어줬을까?

자신이 보기엔 문석주는 열애설이 터질 때까지 두 사람이 사귀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면…….


“자기가 먼저 연애를 하고도 남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 태조가 다른 기사들을 확인했다. 화면을 아래로 빠르게 넘기던 중 그의 손이 중간에 우뚝 멈추었다.

윤세경과 민폐 하객이라는 단어의 조합 때문이었다.


“민폐?”

태조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윤세경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의외로 순둥순둥한 면이 있어 엄한 놈에게 호구 잡히지 않을까 걱정인데, 민폐는 무슨.


“쯧.”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찬 태조가 기사 타이틀을 클릭했다. 그러자 두 장의 사진과 함께 기사 본문이 떠올랐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세경이 예전에 같이 활동했던 걸 그룹 멤버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그녀가 신부보다 예쁘다는 의미로 민폐 하객이란 수식어를 붙인 거였다.


“타이틀은 별로지만……. 사진은 예쁘네.”

태조가 손톱으로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남색 계열의 원피스를 입은 세경은 다른 곳을 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꽤 여유도 생긴 거 같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때의 세경은 안쓰럽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많이 지친 듯 여유도 없어 보였고.

원인은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한겨울에 자기들이 케어할 연예인을 바깥에 두고 가는 걸 보면, 그 회사의 수준도 알 만했다.

문제가 어디 그뿐일까.

나중에 세경이 활동한 내역과 정선서들을 살펴보니 일부 금액이 누락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쪽에서 내용증명을 보내고 소송까지 불사하겠단 의지를 보이자, 뒤늦게 사과하며 미지급된 정산금을 돌려주긴 했지만.

세경은 그 일의 내막까진 알지 못할 거였다. 태조가 그 전 소속사 대표를 만나 직접 담판을 지었다는 것을.


“아무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

설핏 웃은 태조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커피를 마시며 채널을 돌리던 그는 잔이 비워지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새로운 커피를 내리려 막,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좋아해요.」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대사에 태조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동시에 플래시를 터트린 듯, 환한 장면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

뭐지? 방금 눈앞에서 뭔가 번뜩인 것 같았는데.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장면이 바뀌기 전, 태조의 시선이 화면 속에 나타났던 세경과 짧게 부딪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