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향수 뿌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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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향수 뿌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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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향수 뿌렸어?
2022.08.27.
몸을 뒤척이자 마른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세경은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스탠드 불을 켰다.
영화 홍보 행사와 드라마 카메오 촬영, 주말엔 유나의 결혼식까지. 정신없이 며칠을 보내서일까, 왠지 모르게 몸이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일어나야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세경이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은 침대와 하나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하고, 잠시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자 어느새 시간은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세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뻐근한 목을 돌리며 뒷덜미를 만지자 은근한 미열이 느껴졌다.
“감기라도 오려는 건가.”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세경은 잔기침을 하며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 끓어오른 물에 티백을 하나 적신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쳤다.
아, 맑은 하늘을 마주할 줄 알았는데.
몸이 늘어지는 게 날씨 탓도 있는 모양이었다. 흐린 하늘에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안개가 낀 듯 뿌옇게 젖어 있었다.
세경은 소파에 앉아 뜨거운 차를 후, 불었다. 창문에 동글동글 맺힌 빗방울이 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용하네.”
세경이 턱을 괸 채 웅얼거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세상이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지난주, 저를 소란하게 만들었던 그 사건이 무색하게도.
필름이 끊기면 기억이 날 수도, 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더니.
일주일 동안 연락 한번 없는 걸 보면, 태조는 끊어진 필름 조각을 완전히 소각해 버린 모양이었다.
덕분에 일주일간 졸였던 마음은 평온을 찾았지만, 이따금씩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만 다 기억하게 생겼네.”
세경의 입에서 바람 섞인 웃음이 샜다. 그때 이불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잘게 몸을 떨었다.
“어, 제훈아.”
- 누나, 일어나셨어요? 저 조금 이따가 집에서 출발해요. 호텔까진 한 40분 정도 걸릴 거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화보 촬영이 하나 잡혀 있었지.
세경은 슬쩍 시계를 쳐다보았다. 게으름을 피웠더니 시간은 곧 11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알았어. 시간 맞춰 나갈게.”
전화를 끊은 세경은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녀는 세면대 한쪽에 진열되어 있는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손에 쥐었다.
“얼마 안 남았네.”
세경이 향수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예전에 휴식차 남해에 내려갔다가 공방에서 직접 배합해 만든 향수였다.
세경은 양쪽 팔목과 목에 향수를 뿌린 뒤,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아, 이거…….”
상자엔 세경이 자주 착용하는 액세서리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짝을 잃은 귀걸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귀걸이는 자신의 팬이라는, 한 쥬얼리 디자이너에게 선물을 받은 거였다.
본인이 직접 디자인을 한 거라고 했던가. 꽤 마음에 들어 자주 하고 다녔는데, 언제부턴가 귀걸이 한쪽이 보이지 않았다.
“찾았으면 좋겠는데…….”
세경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팬이 준 거라 하니, 잊어버린 게 더 마음에 걸렸다.
숍이며 방송국 대기실이며 자신이 갔던 곳은 다 찾아봤지만, 귀걸이는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자다가 빠진 건가 싶어 침대와 바닥을 샅샅이 훑어봤지만 발견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복도에 흘렸나?”
동선을 되짚어 본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가방과 카드키를 챙겨 룸을 나섰다.
라운지로 내려가 프런트로 향하자, 세경을 알아본 호텔 직원이 상냥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신가요?”
“다른 게 아니라, 혹시 분실물 중에 이런 귀걸이가 나오지 않았나 해서요.”
세경이 들고 온 귀걸이를 보여주었다. 직원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희 쪽에 들어온 건 없는데. 혹시 객실에서 잊어버리신 건가요?”
“그건 정확히 모르겠어요.”
“음, 그러면 일단 저희가 객실 담당자에게 이야기는 해둘게요. 청소하면서 침대 밑이나 틈새도 자세히 살펴달라고. 따로 분실물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세경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호텔 정문으로 나오자, 때맞춰 도착한 밴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누나.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오늘은 늦잠을 좀 잤거든.”
제훈이 룸미러로 세경의 얼굴을 살폈다.
“누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제가 스튜디오에 도착하면 먹을 것 좀 사 올게요. 아, 그리고 저 촬영장 가기 전에 잠깐 회사에 들러도 될까요?”
“회사? 회사엔 왜?”
“책상에 다이어리를 놓고 와서요. 거기에 스케줄을 다 적어놨는데.”
눈이 마주치자 제훈이 미안한 듯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가는 길에 들르자.”
“넵. 그럼 출발할게요.”
씩씩하게 대답한 제훈이 차를 출발시켰다. 호텔을 벗어난 차는 20분을 달려 널찍한 주차장에 도착했다.
“누나, 차에서 기다리실래요?”
“아니. 같이 올라가.”
세경이 우산을 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매니저가 사무실에서 제 물건을 챙겨오는 동안 세경은 한적한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인사를 하러 가는 건 이상해 보이겠지?”
대표실 쪽을 흘끗거린 세경이 투명한 유리로 막혀 있는 탕비실로 걸음을 옮겼다.
뭘 마실까?
고민하던 세경이 음료수가 진열된 냉장고 앞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게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무실엔 어쩐 일이야?”
“어……. 매니저가 놓고 간 물건이 있다고 해서요.”
성큼성큼 걸어온 태조가 세경의 옆에 섰다.
그는 냉장고 안을 쓱 훑어보더니, 음료수병 하나를 꺼내 세경에게 내밀었다.
“…….”
음, 일단 주기에 받았는데…….
세경은 왜 그가 이걸 제게 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하고 많은 음료수 중에서 하필 이걸 골라 주는 거지?
“저 술 안 마셨는데요?”
두 손으로 헛개차를 감싸 쥔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태조의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서류를 보는 척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읽는 낌새는 아니었다. 종이를 비껴간 시선은 생각에 잠긴 듯, 바닥에 꽂혀 있었다.
뭐야, 이 녀석 또 왜 이래?
회의를 하러 온 우현이 얼굴을 구겼다. 지난주부터 약간 맛이 간 태조 때문에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회의 중에 딴생각에 빠져 있는 건 물론, 멍하게 있다 인상을 쓰는 일이 빈번했다.
“너 무슨 일 있냐?”
이 상태로 회의는 무슨 회의냐.
우현은 테이블 위로 두꺼운 서류를 툭, 내려놓았다.
“아니면 두통이야? 뭐, 약이라도 사다 줘?”
“그건 아니고.”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린 태조가 우현을 쳐다보았다. 무슨 심각한 고민이라도 털어놓는 건가 싶어 그가 긴장한 채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요즘 욕구불만인가 해서.”
뭐라는 거야, 이 나사 빠진 새끼가.
별 괴상망측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우현이 눈가를 찌푸렸다.
“아, 그래 욕구불만.”
우현은 힘이 들어가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래, 그럴 수 있었다. 저 녀석에게 여자가 없었던 게 햇수로 9년이 넘었으니까.
“그럴 수 있지. 너 여자 안 만난 지 꽤 됐잖아? 그래서 몸에서 사리라도 나오던? 나는 너 1년만 더 솔로로 지내면 부처라고 불러줄까 봐.”
“…….”
이쯤에서 욕이 한번 걸쭉하게 튀어나와야 하는데. 빈정거리는 말에도 태조는 반응이 없었다.
“……심각한 거냐? 진짜 여자라도 소개해줘?”
“됐어. 누가 여자 만나고 싶대?”
하긴 가만히 있어도 접근하는 여자가 수두룩할 텐데. 소개는 무슨.
“그럼 뭔데?”
“있어. 그런 게. 잠깐 쉬자. 머리 좀 식히고 올게.”
서류를 던진 태조가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던 그는 제게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요즘 들어 그는 이틀에 한 번꼴로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처음엔 기억도 안 나던 꿈이, 이제는 눈을 뜨고 있어도 술술 기억이 날 정도였다.
꿈은 술에 취한 날, 호텔에서 꾸었던 것과 비슷했다.
얽히는 두 다리와 겹쳐지는 몸. 가느다란 팔이 제 목을 끌어안으면 저는 짐승처럼 여자의 몸을 파고들며 연약한 살갗을 물어뜯고 있었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면 흥분한 몸을 가라앉히느라, 찬물에 샤워까지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말이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태조가 픽 웃었다.
답답한 건, 저를 그렇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에 더해 요즘엔 그 꿈의 영향인지, 대낮에 잠깐 눈을 붙이고 있으면 어떤 장면들이 조각조각 떠오르고 있었다.
제가 빨아서 빨개진 피부나, 작게 벌어진 입술. 그 안에 담긴 작은 혀, 뭐 그런 것들.
“……환장하겠네, 진짜.”
생각을 말아야지. 그게 또 뭐라고, 잠깐 떠오른 장면에 아래쪽으로 열이 몰리고 이러나.
“사춘기 애송이도 아니고.”
자조한 태조가 옥상으로 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무심코 돌아본 시선에 세경이 들어왔다.
“여긴 어쩐 일이지?”
송 실장이 불렀나?
냉장고 앞에서 뭘 먹을지 고민하는 세경을 본 태조가 방향을 바꿨다. 그가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눈이 저를 보고 더 동그래졌다.
“사무실엔 어쩐 일이야?”
질문을 던진 태조가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헛개차를 꺼내 세경에게 내밀었다.
“…….”
두 손으로 페트병을 쥔 세경이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술 안 마셨는데요?”
누가 술 마셔서 준다고 했나?
미간을 구긴 태조가 냉장고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이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제가요?”
세경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저를 보는 게, 마치 이걸 누가 좋아해서 따로 챙겨 먹냐고 묻는 거 같았다.
“아니야? 그럼 저번에 왜 나한테 이거 줬어? 가방에서 꺼내길래 챙겨 먹는 건 줄 알았는데.”
“어, 그건…….”
세경이 답을 못하자 태조가 눈가를 좁혔다.
뭐야, 자기가 먹으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나 주려고 산 건가? 혹시 내가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아뇨. 대표님 드리려고 산 건…… 아니었어요. 그날, 저녁에 술자리가 있을 거 같아서, 미리 샀던 거지.”
“그런 거야? 난 또 좋아하는 건 줄 알고, 따로 채워 넣으라 시켰더니.”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걸 억지로 먹을 필욘 없지.
태조가 세경에게 준 음료수를 도로 가져가자, 그녀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냥 주세요. 먹을게요.”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저번에 먹어보니 괜찮았어요.”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을까, 세경은 태조의 손에서 음료수를 낚아채듯 빼앗아 갔다.
가방 속에 음료를 집어넣느라 세경이 고개를 숙이자, 지난번 밴드에 가려져 있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살짝 긁혔다고 했던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나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옷 위로 슬쩍 보이는 흔적은 뭔가에 긁혔다기보단 물렸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았다.
태조가 상처를 더 자세히 볼 겸, 슬쩍 고개를 숙였다.
밀착된 거리에 화들짝 놀란 세경이 고개를 휙 돌리자, 동시에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기가 코로 훅 밀려 들어왔다.
아, 이거…….
태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벌어진 입술을 타고 올라가 갈색 눈동자에 머물렀다.
세경과 눈을 맞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경 씨, 향수 뿌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