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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우리 결혼할까? (21/100)


21. 우리 결혼할까?
2022.10.12.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실에서 심 원장과 태조가 나오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지, 두 사람 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심 원장은 웃고 있지만 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 게 억지 미소를 짓는 듯했고, 태조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가자.”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대기실을 나서자, 심 원장이 잠시 기다리라며 어딘가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그녀의 손엔 흰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받아요, 세경 씨. 엽산제예요.”

“감사합니다. 계산은…….”

“진료비는 진 대표가 낼 거예요. 내 명함도 잘 챙겼죠? 초기니까 무리는 하지 말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밤늦게라도 괜찮으니까 전화하고요. 아이 아버지랑도 잘 이야기해 봐요.”

세경이 힐끗 태조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아이 아버지라고 밝히지 않았는지, 심 원장은 태조 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네.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나중에 아이 아빠도 꼭 데리고 오고요.”

거듭 당부한 심 원장이 세경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그 아이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온 건데…….


“네. 시간 되면요.”

세경은 제 손등을 두드리는 심 원장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본 태조가 그만 좀 놓으라는 듯, 심 원장의 손을 툭 쳐냈다.


“이제 좀 보내주지?”

“누가 안 보내 준댔나? 첫날이라 이것저것 알려주는 건데, 시비는.”

“다음에 해. 시간도 늦었잖아. 세경 씨도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야지.”

그건 또 맞는 말이라,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하겠다.

입술을 뚱하게 내민 심 원장은 태조를 한번 노려보곤 세경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가봐요, 세경 씨. 다음에 또 보고요.”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심 원장에게 인사를 한 세경이 병원을 나섰다. 그녀의 손에서 쇼핑백을 낚아챈 태조가 주차된 차 문을 열고 세경을 돌아보았다.


“타.”

“여기서 호텔까지 멀지 않아요. 저 택시 타고 갈게요.”

“택시는 무슨.”

엽산제를 인질 삼은 태조가 빨리 타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세경이 차에 오르자, 그가 차 시동을 걸고 핸들을 돌렸다.


“심 원장님한테 아무 말도 안 하셨나 봐요?”

“무슨 말? 내가 아이 아버지란 거?”

태조가 옆을 돌아보자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세경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네.”

“상황이 좀……. 말할 타이밍이 아니었달까?”

“왜요?”

“내가 그 자리에서 아이 아버지란 걸 밝히면…….”

말끝을 흐린 태조가 아까처럼 미간을 구겼다.


“심 원장한테 멱살이 잡힐 거 같아서.”

“멱살……, 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세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조의 멱살을 잡는 심 원장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를 상담해줄 때만 해도 얼마나 친절하게 잘 해주셨는데.


“아까 봤잖아. 세경 씨 손 조물거리면서 사심 채우는 거. 심 원장이 세경 씨 팬이거든. 열애설도 안 났는데, 아이를 가졌다고 하니까 걱정이 되나 봐. 나한테 애 아빠가 누구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도……. 멱살은 안 잡으실 것 같은데.”

“속지 마. 방긋방긋 웃는 거 다 자본주의용 미소니까.”

세경이 풋, 작게 웃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하더니, 툴툴거리는 말에서도 두 사람의 친분이 느껴졌다.


“그런데요, 대표님.”

“어.”

“지금 어디 가는 건가요?”

세경이 어둑해진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호텔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싶었는데……. 이젠 아예 낯선 길로 들어가는 게, 애초부터 목적지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내 집.”

“네? 대표님 집이요?”

세경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 늦은 시간에 진 대표의 집으로 간다니. 왜? 어째서?


“제가 왜 거길…….”

“낮에 못 했던 얘기 계속해야지.”

“…….”

“심 원장도 그러잖아. 아이 아버지랑 잘 얘기해 보라고.”

“그게…….”

오늘부터 하란 이야기는 아니었잖아요.

세경이 억울한 눈으로 태조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불거리는 길을 타고 올라간 차는 한 고급 빌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들어와.”

스위치를 켜자 집 안이 환해졌다. 세경은 주뼛거리며 태조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밥 먹다 말았는데. 뭐, 더 안 먹어도 되겠어?”

태조가 재킷을 벗어 소파에 올려두었다. 세경은 거실의 경계가 되는 계단 쪽에 서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네. 전 괜찮지만……. 대표님은요? 아까 저만 먹었잖아요.”

“난 세경 씨 결과 들으러 갔을 때 남은 초밥 먹었어.”

“그걸로 괜찮으세요?”

“출출하면 야식을 시키든지. 아니면 라면을 끓이든지. 그보다.”

태조가 말을 끊고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밤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우선 좀 씻을까?”

“네? 씨, 씻어요? 먼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요?”

“그게 언제 끝날 줄 알고.”

“…….”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보는 대로 방은 많으니까.”

“아니, 그건 좀…….”

세경의 얼굴에 당황함이 어렸다.

자고 가라니. 그와 단둘이 있는 집에서, 제대로 잠이나 잘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왜, 나 덮칠까 봐 그래?”

“누, 누가 덮친다고……!”

놀리는 태조의 말에 세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저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그냥 대표님 씻고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옷은 내 거 줄게. 좀 크긴 해도, 못 입을 정도는 아닐 거야.”

어깨를 축 늘어트린 세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핑계를 대든, 태조는 자신을 제 집에 묵게 만들 생각인 듯했다.


“뭘 겁먹고 그래. 오늘 하루는 같이 있자고. 임신 사실도 확인했는데, 혼자 두긴 그렇잖아.”

세경에게 다가온 태조가 그녀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


“세경 씨는 이쪽 샤워실 써. 손님들이 주로 쓰는 데라, 세면용품은 안에 다 있을 거야. 갈아입을 옷은……. 잠깐 기다려 봐.”

침실로 들어간 태조가 안쪽 드레스 룸에서 옷을 챙겨 왔다. 얇은 티셔츠와 트레이닝 팬츠였다.


“씻고 나와.”

세경에게 옷을 넘겨준 그가 친절하게 욕실 불까지 켜주었다. 그녀는 소파에 가방을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문을 잠근 세경은 선반 위에 옷을 두고 욕실을 둘러보았다. 공용 욕실이라 그런지 크기가 꽤 컸다.

안쪽에는 두 사람이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란 월풀 욕조가 있었고, 샤워 부스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샤워를 해도 되는 건가.”

처음 온 곳이라 그런지, 뭔가 낯설고 어색했다. 진 대표의 집에서 옷을 벗는다는 게 괜히 부끄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고.

다른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한 지붕 아래 그와 저, 단둘뿐이란 거 아닌가.


“그만.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짝짝, 손으로 뺨을 살짝 때린 세경이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빠르게 몸을 씻고 나온 그녀는 드라이기를 찾다 선반 쪽에 놓인 물건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어쩐지 익숙한 향기가 난다 했더니. 여기에 두셨구나.”

자신이 선물해준 디퓨저였다. 세경은 향을 맡고 원래 있던 곳에 디퓨저를 내려놓았다.


“크다…….”

머리를 말리고 태조의 옷을 입은 세경이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키도 크고 몸도 좋으니, 오버핏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누가 보면 원피스인 줄 알겠어.”

세경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바지를 입지 않아도 될 만큼, 길게 내려온 티셔츠는 세경의 허벅지를 가리고 있었다.


“키도 크고, 손도 크고…….”

……거기도 크고.


“크흠.”

헛기침을 한 세경이 태조가 만졌던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바닥에 끌리는 바지를 접어 올리고 욕실을 나오자,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경이 벽을 잡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평소와 다른 편안한 옷차림의 태조가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 씻었으면 저기 앉아 있어.”

태조가 거실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세경이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자, 그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집에 커피 말고 다른 게 없어서.”

“아니에요. 저 우유도 좋아해요.”

그녀가 후, 가볍게 바람을 불고 우유를 마셨다. 태조가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입을 열었다.


“세경 씨, 나 좋아해?”

푸흡.

아니, 뭐 이런 돌직구가…….


 
하마터면 우유를 뿜어낼 뻔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은 세경이 태조를 쳐다보았다.


“가,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안 되는 거 같기도 하고…….


“궁금했거든. 왜 세경 씨가 나랑 키스를 한 건지, 왜 그날 나랑 잔 건지.”

“…….”

연이어 쏟아진 태조의 말에 세경은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오히려 태조에게 임신테스트기를 들켰을 때가 더 낫다 싶을 정도로.


“곰……. 아니 석주에게 물었더니 술주정하지 말라고 해서.”

“그…… 저는 대표님을…….”

입은 뗐지만 말은 쉽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간 태조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했다던 여배우들에 대한 소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나. 이미 그의 아이까지 가진 마당에.


“……좋아해요.”

“언제부터?”

손수건을 제게 줬을 때부터 반했다고 하면, 좀 그런가?


“호감이 생긴 건…… 얼마 안 됐어요.”

태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만한 계기가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뭘요?”

“아이 말이야. 낳고 싶냐고.”

“아…….”

세경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낳고 싶냐 묻는 건, 그에게 이 아이의 존재가 곤란해서일까.

하긴 그에겐 갑작스러운 일일 테니, 자신의 임신 소식이 달갑지는 않을 터였다.

거기에 아이까지 생겼으니, 자신이 책임지라 할까 걱정도 될 터였고.


“…….”

울적해진 세경은 맞붙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왠지 그가 아이를 지우라고 하면 서러움에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대표님은…… 곤란하시겠죠, 생각지도 못한 아이라.”

세경의 입에서 시무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조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혼자 땅굴을 파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저런 말을 할 줄이야.


“혹시 화나셨어요?”

“어느 부분에서? 세경 씨가 나랑 자고 도망친 거? 아니면 나 본 적이 없다고 한 거?”

“도망친 건 아니고, 아침부터 스케줄이 있어서 제 방으로 돌아간 건데.”

“…….”

“앞의 거요.”

세경의 대답에 태조가 음, 하고 목을 울렸다.


“같이 잔 건…… 뭐. 나도 할 말은 없지. 기억을 잃어버린 것도 나니까. 오히려 나중엔 내가 좀 더 흥분해서 심하게 몰아붙인 거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 화를 낼 일이 있나?”

“…….”

“오히려 내가 화가 난 건 그 뒤의 일인데. 문석주랑 짜고 날 속인 거. 내가 요 한 달, 앙큼한 고양이를 찾느라 꽤 고생했거든.”

“그건…… 죄송해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세경이 곧바로 사과했다. 태조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해할까 봐 말해주는 건데,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그건 세경 씨가 결정할 일이야. 내가 지금 이걸 묻는 건, 앞으로의 대책 때문이고.”

“…….”

“세경 씨도 알잖아. 당장 몇 달은 숨겨도, 계속 숨길 수는 없다는 걸. 몸에 무리가 가는 것도, 앞으로 일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세경 씨야. 언론에서 시끄럽게 물고 떠들어 댈 것도…….”

태조가 잠시 말을 삼켰다. 그리고 무거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경 씨지.”

“저는…….”

세경은 꿈에서 본 하얀 새끼 호랑이를 떠올리며 입을 달싹거렸다.

부담스러운 일이란 건 안다. 커리어에 공백도 생길 테고, 결혼도 안 한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저를 상처 입히리라는 것도.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그 일을 해낸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본 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늘 제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 너를 낳지 않았다면, 당신은 더 후회했을 거라고.


“낳고 싶어요. 솔직히 아이를 지운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고요.”

“…….”

태조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세경은 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에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무섭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결정했다면 앞으로 스케줄을 좀 조정해야겠네. 문제는 언론 쪽인데…….”

세경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태조는 고개를 숙인 세경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곤 입을 열었다.


“세경 씨.”

“네?”

고개를 든 세경이 태조와 눈을 맞췄다.

그의 시선이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쇄골과 긴 목을 거쳐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우리 결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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