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결혼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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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결혼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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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결혼의 이유
2022.10.15.
‘싫어요.’
“싫어?”
과거와 현재의 목소리가 오버랩됐다. 미간을 찌푸린 태조가 눈만 들어 옆에 앉은 사람을 쏘아보았다.
힘을 준 그의 손에서 서류 뭉치가 우그러지자, 흠칫한 우현이 지레 찔려 몸을 사렸다.
“뭐, 왜! 너 돈도 많으면서. 상금으로 백만 원 좀 내라는 게 불만인 거냐? 네 통장 잔고에서 백만 원은 잔돈 수준이잖아!”
저건 또 뭔 헛소리야?
여태껏 우현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있던 태조는 인상을 쓴 채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4월에 있을 워크숍 겸 야유회 일정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상금 운운하는 것을 보니, 야유회 일정 중 하나인 보물찾기에 관련된 이야기인 듯했다.
보물찾기는 작년에 강 상무가 산행 대신 넣은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다 큰 어른들이 무슨 보물찾기냐고 해서 유치하다 뭐다 말이 많았는데, 1등 상금이 현금 백만 원이라는 말에 직원들의 참여도가 가장 높았던 터였다.
물론 중간에 포기하고 그늘에서 일찌감치 쉬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백만 원 내면 너도 내라. 나머지 2, 3등 상금.”
“내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까지 뜯어가고 싶냐?”
그 월급, 나 다음으로 많이 가져가지 않나?
“그러게 누가 2, 3등 상금까지 현금으로 하래? 작년엔 1등만 현금이었잖아.”
“2회차니까 업그레이드해야지. 그리고 현금만큼 좋은 상품이 어딨다고! 이런 보상도 있어야,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도 하지.”
이거, 매년 업데이트하면 회사 기둥 하나 뽑아가겠는 걸?
“그래. 그러니까 내가 백, 네가 팔십.”
“네가 백오십, 내가 삼십.”
이 와중에 우현이 제 몫을 깎자, 태조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 새끼가 아주……. 지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아깝고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덜 아까운가 보지?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태조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고 손을 내젓자, 우현이 싱글싱글 웃으며 서류를 넘겼다.
“아, 너도 이번에 같이 갈 거야?”
“그때 보고. 참석자 명단은 다 정해졌어?”
“뭐, 사무실 직원들은 거의 다 됐는데. 매니저팀하고 연예인들은 아직. 중간에 스케줄 생기면 못 오는 거고, 오기 싫다고 하면 우리가 강제할 수도 없고.”
“그래.”
“근데 석주는 갈 거래.”
궁금한 건 곰의 참석 여부가 아닌데.
“참, 그리고 얘네는 우리가 이번에 데뷔시키는 애들. 요즘 애들 참 실력 좋아, 잘생기고. 콘셉트는 그중에서 고민이라는데, 네가 보기엔 어때?”
태조는 우현이 주는 태블릿에서 사진을 넘겨 보았다. 작년 봄부터 비주얼 디렉터까지 스카우트해 준비하고 있던 남자 아이돌 그룹이었다.
“요즘은 이런 얼굴이 인기가 많은가 보지?”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솜털 보송한 사내놈들은 잘생겼다기보단 예쁘장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그런가 봐. 아, 세경 씨가 아이돌 출신이니 우리보다 더 잘 알겠네. 한번 물어볼까?”
“됐어. 귀찮게 무슨. 전문가도 스카우트해 왔는데, 그쪽에서 어련히 잘하겠지. 이건 그쪽에서 최종 선택하고 나서 컨펌 받으라고 해.”
“알았어.”
“나머지는 잠시 쉬었다가 하고.”
태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회의 내내 딴생각에 빠져 있던 걸 알고 있었는지, 우현도 그러자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추위가 한풀 꺾인 바람이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사람이 없는 쪽으로 걸음을 옮긴 태조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세경과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싫다고.”
연기와 함께 내뱉은 목소리가 무심하게 흩어졌다.
심 원장을 만나고 온 날, 결혼을 하자는 태조의 말에 세경이 한 대답은…….
“싫어요.”
-였다.
자신을 좋아하는 데다, 아이까지 가졌으니 당연히 저와 결혼한다고 할 줄 알았다. 그랬기에 세경의 거절은 그에게 꽤 충격이었다.
해서 태조는 왜 자신과 결혼하기 싫냐고 세경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잠깐의 시간을 두고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절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허를 찔린 듯, 태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책임감 때문이라면 굳이 대표님이 저와 결혼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아이를 가진 거로 대표님께 결혼을 강요할 생각은 없고요.”
책임감.
태조는 저 말을 곱씹어보았다. 정말, 자신은 책임감 때문에 세경에게 결혼을 하자고 했던 걸까?
“그래서 나랑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혼자 낳아 키우겠다고?”
“네. 한동안 활동은 못 하겠지만…….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있고. 괜찮아요.”
안다. 세경이 그간 얼마나 돈을 벌어놓았는지.
자신이 소속사 대표인데,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모르고 있을까.
하지만 세경은 괜찮다 해도 태조는 괜찮지 않았다.
아무리 숨긴다 해도, 언젠가는 아이를 가진 티가 날 텐데. 나중에 기자들이 그런 세경을 두고 무슨 기사를 쓸지, 생각만으로도 불쾌했다.
아이를 낳은 후는 또 어떻고. 혹시라도 자신 말고 다른 남자가 제 아이를 본인 아이인 양 안기라도 하고 있으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짜증이 나는데.”
태조가 담배 끝을 갈아낼 듯, 질겅질겅 깨물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단순히 세경이 좋냐, 싫냐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였다. 하나, 그 좋다는 감정이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세경을 그런 식으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은 생각보다 세경을 더 좋게 보고 있다는 걸.
저와 밤을 보낸 사람이 윤세경이란 걸 알았을 때, 불쾌한 감정보다는 그녀가 왜 자신과 잤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고.
세경이 제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을 땐, 당황스럽긴 해도 그녀와 결혼까지 할 생각을 했었으니까.
웅웅-.
“누구야.”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태조는 액정에 뜬 발신인을 확인하고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왜?”
- 세경 씨한테 예약 전화가 안 와.
전화를 건 사람은 심 원장이었다. 태조는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끄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 네가 대표잖아. 우리 세경 씨 잘 챙겨서 병원으로 데리고 오라고.
몇 번이나 봤다고 우리 세경 씨야. 우리 세경 씨는.
- 아! 올 때 아이 아빠에 대해서도 알아 오고. 그 새끼, 네가 멱살 잡아서 데리고 와.
“…….”
통화만 하는데 왠지 모르게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태조가 넥타이를 잡아 느슨하게 끌어내렸다.
“때 되면 하겠지. 나도 세경 씨 스케줄 알아봐야 하니까, 일단 끊어.”
일방적으로 통화를 마친 태조가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가 매니지먼트실을 찾았다. 세경은 오늘 스케줄이 있는지, 신 매니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늘 세경 씨 스케줄 어떻게 됩니까?”
“오늘이요? 음……. 공식적인 스케줄은 따로 없는 거로 나오는데요.”
“그래요? 그럼 신 매니저는? 자리에 안 보이는데.”
태조가 빈자리를 가리키자, 눈동자를 굴린 직원이 뒤늦게 생각난 듯 손바닥을 짝, 쳤다.
“아! 오늘 세경 씨 이삿날이라 그거 도와준다고 했어요.”
“이삿날?”
집 리모델링이 다 끝난 건가?
“세경 씨가 이사한 집, 어딘지 알아요?”
“아, 저도 자세한 주소는 아직 듣지 못해서. 한남동 어딘가로만 알고 있어요. 지금 거기에 가 있을 텐데, 신 매니저한테 연락해 볼까요?”
“아뇨. 됐습니다. 내가 나중에 알아보죠.”
손을 내저은 태조가 사무실을 나섰다.
한남동이라면 그의 집과도 그리 멀지 않을 터.
조만간 그녀의 집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
“와, 우리 세경이 성공했다. 집 정말 좋네.”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갠 유나가 감탄 어린 눈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고, 이삿짐센터에서 보관한 짐들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아무리 이삿짐센터에서 다 해준다고는 하지만, 혼자선 힘들 거라며 유나와 제훈이 아침부터 찾아와 정리하는 걸 도와주었다.
“근데 집이 좀 휑한 느낌이에요, 누나. 전에 살던 데보다 더 넓어서 그런가?”
“그런 것도 있고. 집 나오면서 오래된 물건은 다 버렸잖아. 당장 필요한 것만 사 놔서, 전보다 물건들이 없긴 해. 이제 살면서 조금씩 채워가야지.”
신문지를 깐 바닥에 세경이 배달 온 음식들을 하나둘 옮겨 놓았다. 이삿날엔 짜장면을 꼭 먹어야 한다며, 유나가 탕수육과 세트로 시킨 거였다.
“점심은 정말 이걸로 돼? 바깥에서 고기 먹어도 되는데.”
“고기는 무슨. 이삿날엔 바닥에서 짜장면 먹는 게 최고지. 그보다 이사 선물은 뭐가 좋아? 필요한 것만 말하셔. 청소기? 세탁기? 건조기 사줄까?”
맛깔나게 비빈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돌돌 만 유나가 한입 가득 입에 넣었다.
“에어프라이어 사줘. 저번에 쓰던 거 망가져서 버렸어.”
“에이. 비싼 거 말해. 비싼 거. 나 부부이몽 촬영해서 곧 출연료도 나올 건데.”
“어? 그거 촬영 다 하셨어요?”
“1회차만. 오늘 저녁에 방송해요. 그러니까 제훈 씨도 꼭 보고.”
“네. 본방 사수할게요.”
싹싹한 제훈의 대답에 유나가 이쁘다며 군만두 하나를 올려주었다.
“그것도 이제 막 시작한 거잖아. 비싼 건 나중에 더 뜨고 나서 사주고. 지금은 에어프라이어.”
“흐흠. 그럼 비슷한 기능으로 비싼 거 사줘야지.”
유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탕수육을 집어 먹었다. 세경도 뒤늦게 젓가락을 들어 짜장면을 비볐다.
“그보다 촬영은 어땠어?”
“그렇게 어려운 건 없었어. 관찰 예능이잖아. 평소처럼 지내라고 하는데, 오빠가 자꾸 카메라 의식하는 게 귀엽더라고. 임 피디님이 편집 다 하고 연락 주셨는데, 분량도 깔끔하게 잘 나왔대.”
“다행이네, 그건.”
“그치. 참, 어머니한테는 연락했어? 너 이사했다고.”
“저녁에 할 거야. 지금은 카페 영업시간이잖아.”
세경의 모친은 제주도에서 카페를 운영 중이었다.
소일거리 삼아 차렸던 디저트 카페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조금씩 규모를 키웠고, 나중엔 세경이 돈을 조금 더 보태 뷰가 좋은 큰 건물로 이전까지 하였다.
“어머니도 서울로 올라오시면 좋을 텐데. 너도 오늘은 좀 허전하겠다. 집도 넓은 데다 첫날이라.”
“금방 적응하겠지, 뭐.”
“에이, 그러니까 빨리 너도 애인 만들어서 결혼하라고.”
음, 어쩌면 결혼보다 육아를 먼저 할 거 같은데…….
세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훈 씨 진 엔터에서 오래 일했어요?”
“저요? 그렇게 길진 않아요. 세경 누나랑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으니까.”
“그렇구나.”
유나가 묘하게 아쉬운 표정을 짓자, 제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왜요?”
“아니. 우리 세경이의 첫사랑이 그 소속사에서 일했던…….”
“유나야!”
식겁한 세경이 유나를 불렀다. 하지만 중요한 단어들은 이미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뒤였다.
“에? 세경이 누나 첫사랑이 우리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에요?”
“그렇다니까요. 그 사람 엄청 잘생겼대. 듣기론 문 배우님과 친한 사이라고 하는……. 웁.”
세경이 군만두 하나로 유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그만해. 유나야. 나 민망해.”
세경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달아오르자, 유나가 군만두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경은 고개를 돌려 제훈을 쳐다보았다.
“문 배우님과 친하신 분이라…….”
그럼 우리 대표님과 강 상무님밖에 없는데?
또 다른 분이 계시려나?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던 제훈이 세경을 쳐다보자.
“너도 먹어.”
울상을 지은 세경이 매니저의 입에도 군만두를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