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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골난 고양이를 달래는 방법 (62/100)


62. 골난 고양이를 달래는 방법
2023.03.04.



 


“나 아니에요.”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로 돌아오자 심 원장이 말했다. 세경은 난데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지요. 내가 글 올린 거 아니라고.”

심 원장이 세경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눈짓했다. 뒤늦게 그 뜻을 알아챈 세경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의심 안 해요.”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 눈썰미 하난 알아줘야 해. 어떻게 그걸 다 알아채지?”

“그러게요. 저도 심 원장님한테 들은 말이 아니었으면 누가 꾸며서 말한 건 줄 알았을 거예요.”

드라마가 방송되면서 극 중 자신의 스타일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사적으로 나온 예능프로에서 제가 착용한 물건까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커플링이라니. 대표님은 그런 말은 일절 하지 않았는데.


“근데 아직 조용하네요? 커플링이란 게 알려지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소속사엔 문의가 좀 오는 모양이에요.”

“세경 씨 열애 중이냐고요?”

세경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병원에 오기 전 송 실장이 세경의 반지가 커플링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며 전화로 알려준 터였다.


“바로 결혼 발표할 거예요?”

“그건 고민 중이에요. 식은 나중에 올릴 생각이라.”

“아직 드라마 방송 중이라 그렇구나. 초기 때 식을 올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은 괜찮아도 아이 태동 느끼기 시작하면 배도 금세 불러올 거라.”

세경이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 앙꼬가 작아서 그런가. 배가 살짝 나오긴 했지만 확실히 이 전과 비교하면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입덧은 어때요?”

“요즘은 거의 안 하는 거 같긴 해요. 전엔 된장국 냄새에도 입덧을 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 보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15~16주 정도 되면 많이 가라앉긴 해요. 밥은 잘 먹고 있죠? 초음파상으론 문제가 없긴 한데, 세경 씨는 여전히 말라 보여서.”

“잘 먹고 있죠. 완전 육식파가 됐는데.”

“병원 오면 내가 알아서 잘 챙겨주겠지만, 임신 후기엔 철분제도 줄 테니까 꾸준히 먹고 그래요. 드라마 끝나면 이제 큰일은 없는 거죠?”

“드라마 같은 장기 촬영은 없어요. 광고 촬영은 좀 남아 있지만.”

“그럼 예약 날짜도 유연하게 잡을 수 있겠네요. 근데…….”

심 원장이 말끝을 흐렸다. 세경이 왜 그러냐는 얼굴을 하자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임신 4개월 차가 되어가는데, 앙꼬 아빠는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호호호.”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이미 몇 번 오셨는데.

세경은 솔직히 털어놓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오히려 병원엔 진 대표가 더 많이 오고. 앙꼬 아빤 반성 좀 하라고 해요.”

“그럴게요.”

시간을 확인한 세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실을 나서기 전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썼다.


“요즘 알아보는 사람이 많죠?”

“네.”

전부터 알아보는 사람이야 있었지만, 요즘 한창 드라마가 인기를 끌다 보니 제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병원에 올 때도 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히 가요. 다음 검진 때 또 보고요.”

“연락드릴게요.”

심 원장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세경을 배웅했다. 6층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이내 두 사람이 있는 중간층에 멈춰 섰다.

스르륵, 문이 열리자 벽에 기대선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6층에 있는 산후조리원에 방문했다 돌아가는 사람인 듯했다.


“다음 거 탈래요?”

심 원장이 속닥거린 말에 세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심 원장에게 눈인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빠르게 하강한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하자 동승한 사람을 토해내고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세경은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안도감에 긴 숨을 내쉬었다.


“놀랐네.”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 조수석에 던진 세경이 거울을 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출발해 볼까.”

차에 시동을 건 세경이 액셀을 밟았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는 곧 말간 햇살이 쏟아지는 도로에 진입했다.

봄을 앓고 여름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거리는 녹음으로 물들고 있었다. 만개한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던 거리는 이제 싱그러운 초록빛을 뽐내고 있었다.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으나, 세경은 일탈 없이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식탁 위에 차 키를 올려두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엄마가 가져다준 감귤즙을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남아 있는 팩의 개수를 헤아렸다.


“거의 다 먹었네.”

달고 시큼한 게 당길 때마다 찾아 먹었더니 그 많던 감귤즙도 금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두 상자만 더 보내달라 할 겸 세경이 핸드폰을 들고 정란의 번호를 눌렀다.


“아, 그러고 보니 엄마한테도 알려야 하는데.”

태조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 전, 모친에게도 아이 아빠가 진 대표라는 걸 미리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이미 한번 얼굴도 본 적 있으니 굳이 따로 소개할 필요도 없을 테고.


“12주 접어들면 이야기하자는 말도 했었으니까.”

그럼 이번에 전화를 하면서 슬쩍 흘려 봐야지. 깊게 숨을 내쉰 세경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카페 일이 바빠서 그런지 정란은 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을 따라 긴장한 세경의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 어, 세경아.

지루한 신호음이 뚝 끊기며 정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경은 핸드폰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엄마, 바빠?”

- 조금. 왜? 무슨 일 있어?

“일은 아니고. 저번에 가져온 감귤즙 말이야. 다 먹어서 두 박스만 더 보내 달라고.”

- 감귤즙? 그걸 벌써 다 먹었어?

“응.”

나만 먹은 게 아니라 우리 앙꼬도 같이 먹었거든.


- 금방 먹네. 알았어. 엄마가 이따가 주문해서 보내줄게. 다른 거 더 필요한 건 없구?

“다른 건 별로. 그리고 나 엄마한테 할 말이 있는데.”

- 무슨 말?

“아이 아빠 말이야.”

- …….

정란은 별다른 대꾸 없이 세경의 말을 기다렸다. 왠지 제 임신 사실을 알리던 날이 떠올라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태조가 아이 아빠라고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긴장한 세경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진 대표님이야.”

 

***



‘음?’

문을 열자 두 볼을 잔뜩 부풀린 골난 고양이가 보였다. 낮에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그새 왜 저런 얼굴이 되었나 싶었다.


“무슨 일 있었어?”

태조가 물었지만 뾰로통한 세경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아까 엄마하고 통화했거든요.”

“그래?”

어머니에게 안 좋은 소리라도 들었나?

태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세경이 그를 마주 본 채 뒷걸음질을 쳤다.


“곧 대표님 집에도 인사드리러 갈 거라 엄마한테도 먼저 이야기했는데요.”

“무슨 이야기?”

“대표님이 아이 아버지라는 거요.”

태조가 뒤로 걷는 세경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턱으로 뒤쪽을 가리키자 세경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두 발짝만 더 걸었으면 벽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몸을 돌린 세경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태조가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


“그랬더니 뭐라셔?”

“…….”

부루퉁하게 입을 내민 세경이 태조를 흘겼다. 정말, 여기까지 말했는데 계속 모른 척하시긴!


“아무 말도 안 했다면서요?”

“무슨 말?”

“아, 진짜! 저번에 엄마 공항까지 데려다주셨을 때요. 아이 아빠란 거 말 안 했다면서요!”

그가 계속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세경이 왁, 소리를 질렀다.

엄마에게 아이 아빠가 태조라는 걸 밝혔을 때, 얼마나 긴장을 했던가.

진짜냐고 재차 물어보겠지? 어떻게 사귀게 된 거냐 호들갑을 떨며 묻지 않을까? 그래도 처음 봤을 때 호감을 보였으니 나쁘게 보시지 않을 거야, 등등,

세경은 온갖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상정하며 정란의 말을 기다렸다.

한데 제 말을 들은 정란은 이번에도 자신의 예상과 한참 빗나가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어이쿠, 빨리도 말한다. 이제 엄마한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결심이 선 모양이지?’


‘……응?’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라 그랬을까. 세경은 정란의 말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저기…… 엄마, 진 대표님이라니까. 저번에 봤던 그 대표님이 아이 아버지라고.’


‘그래. 알고 있다고. 언제 말해줄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네.’

 
알고 있었다고? 아이 아빠가 대표님인걸?


‘어, 언제…….’


‘언제겠어? 너네 집에 갔을 때지.’


‘어, 어떻게?’


‘음, 내가 다 봤거든. 엘리베이터 앞에서 너랑 대표님 뽀뽀하는 거. 다음 날, 차 타고 갈 때 확인차 묻기도 했고.’

 
그러니까 두 사람은 그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저만 까맣게 모르고 있던 거였다.

얼굴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새 마음이 맞아서 감쪽같이 저를 속이기나 하고.


“그래서 골이 난 거야?”

“골이 난 게 아니라, 대표님이 엄마랑 짜고 날 속이니까아…….”

늘어진 말끝이 태조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쪽. 짧게 입을 맞췄다 뗀 그가 세경의 입술 위에서 속삭였다.


“당신도 나 속였잖아.”

“제가 언제…….”

그랬느냐고 반박하려던 세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기억 안 나? 그럼 호텔에서 있었던 일부터 다시 설명을…….”

“아뇨. 기억해요.”

세경이 자신의 과오를 읊으려 하는 태조의 입을 손으로 꾹 눌렀다. 피식, 웃는 태조의 숨결이 손끝을 간질였다. 그가 세경의 손을 잡아 내리며 물었다.


“그래서 섭섭했어?”

“조금요. 나만 따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그날 말하자고 했었잖아.”

“…….”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고요.

한숨을 쉰 세경이 입술을 쫑긋 내밀었다. 여전히 화가 덜 풀린 세경을 보며, 태조가 손에 든 물건을 들어 보였다.


“화 풀어. 이제 속이는 거 없으니까. 그보다 배고프지 않아? 저녁 안 먹었다며.”

“별로 배 안 고픈…….”

“고기 사 왔는데. 그때 심 원장 병원에서 먹었던 스테이크.”

세경의 눈이 태조가 든 쇼핑백에 머물렀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고기 맛을 떠올린 세경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대표님은 드셨어요? 저녁.”

“아니.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흠, 그럼 같이 먹어요.”

세경이 태조의 손에서 쇼핑백을 가져갔다. 고기를 구울 세팅을 마치고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곧 식사를 시작했다.

그가 먹기 좋게 고기를 잘라 주자 세경이 특제 소스를 찍어 입에 넣었다. 고소한 육즙이 입안에서 터졌다. 세경은 고기를 우물거리다 허전한 태조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커플링이라면서요?”

태조와 눈이 마주치자 세경이 손가락에 낀 반지를 톡톡 두드렸다.


“근데 왜 나만 끼고 있어요?”

“주변에 비밀로 하고 있기도 했고.”

“…….”

“그거 지금 나한테 없거든. 저번에 다시 껴보니까 조금 꽉 끼는 느낌이 들어서. 사이즈 조정하느라 매장에 맡겨뒀어.”

“언제 찾아오실 건데요?”

“조만간. 시간 나면.”

“음.”

세경이 젓가락을 입에 물고 잠시 목을 울렸다.


“반지 찾아오면 대표님도 껴요.”

“회사에도 소문 다 나라고?”

“곧 다 알지 않겠어요? 강 상무님에 송 실장님. 그리고 그 총무팀의 직원분도 알고 있고. 커플링인 거 다 소문 나서 이제 숨기지도 못하는걸.”

지금이야 드라마에 피해가 갈까 열애 중이어도 그렇다 말은 못 했지만, 계속해서 입을 다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송 실장님이 그러시던데. 드라마 끝날 때까진 배우의 사생활이라 모르쇠로 일관할 거라고.”

“종방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때까진 그렇게 버텨보려고.”

“드라마 끝난 뒤엔 열애 중이라고 밝히는 게 낫겠죠? 사실 어떻게 밝혀야 하나 고민스러웠는데, 이게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해요.”

세경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태조가 그날 반지를 주면서 부부이몽에 출연할 때 꼭 끼고 나가라고 했었다. 설마 그때부터 이런 걸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뭔데?”

“저한테 반지 줬을 때,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준 건 아니었죠?”

태조가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세경의 접시에 내려놓았다.


“글쎄. 어땠을 거 같아?”

의미심장한 태조의 미소에 세경의 얼굴엔 복잡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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