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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5.
“세상에.”
핸드폰을 보던 세경의 입이 떡 벌어졌다.
포털의 메인 뉴스난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날이라도 잡은 듯 큰 사건들이 굴비 엮듯 줄줄이 터져 나온 탓이었다.
하룻밤 새 연예면 메인을 차지하던 기사들이 뒤바뀐 건 물론 경제면도 다른 뉴스로 화제가 되었다.
모 건설 기업 상무의 불륜 스캔들과 이혼 소송, 스포츠 선수의 음주운전 적발과 마약 사건까지.
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다 보니 세경의 결혼과 임신 소식은 아주 귀여운 수준에 속해 있었다.
“이래선 오늘 인터뷰하는 게 제대로 나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기사가 난 지 나흘째, 송 실장은 첫날은 좀 정신이 없었지만 이튿날부터는 그래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미 세경이 결혼과 임신을 기정화한 상태에서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태조에 대한 정보였다.
태조는 기본적인 신상만 언론사에 제공한 뒤 들어오는 모든 인터뷰는 거절했다.
그런데 또 귀신같이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 이들은 예전 <우아한 가족>의 제작 발표회 때 넘어지는 세경을 붙잡아주던 태조의 사진을 찾아내기도 했다.
“좀 일찍 출발할까.”
세경이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인터뷰까진 시간이 넉넉하게 남은 데다, 외출 준비는 이미 한 시간 전에 마친 터라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손에서 차 키를 굴리며 나갈 시간을 가늠했다. 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세경이 활짝 웃었다.
- 세경 씨, 오랜만. 그간 잘 지냈어요?
발랄하게 인사를 건네오는 이는 반예령이었다.
“네. 반 관장님도 잘 지내셨죠?”
- 나야 전시 준비로 바쁜 거 빼면 잘 지냈죠. 기사 봤어요. 어머님이 그거 보시고 도련님 소환했다면서요?
“네. 저 인사도 드리기 전에 미움받게 생겼어요.”
- 에이, 미움은 무슨. 우리 어머니 그렇게 속 좁은 분 아니에요. 그보다 오늘 사건 터진 거 봤어요? 경제면에 스포츠란, 연예계까지 아주 폭풍이 몰아쳤죠?
“방금 봤어요. 깜짝 놀랐어요. 몇 달에 걸쳐 나올 만한 기사들이 한꺼번에 터져서.”
- 사실, 그거 우리 어머니가 조금 손을 쓴 거예요.
예령이 비밀을 털어놓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게 무슨……. 태조 씨 어머니가 손을 쓴 거라니요?”
- 사람들의 이목을 돌리려면 기존의 이슈보다 더 큰 이슈가 나와야 하잖아요. 특히나 사람들이 분노할 만한 사건으로.
“그럼 그 이혼 소송이랑 음주운전 사건 전부…… 태조 씨 어머님이 내라고 지시한 거라고요?”
- 딱 집어서 그걸 내라 한 건 아니고요. 우리 어머니가 발이 좀 넓으시거든. 기사 터지고 나서 사람들이 세경 씨랑 도련님한테 안 좋은 소리 하는 거 보고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에요. 기자들은 돈 받고 기사를 골라 내니까 어머니가 광고 다 끊고 저들이 하는 짓들을 다 까발리겠다고 하셨대요. 그러다 보니 그쪽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지. 부랴부랴 돈 받은 거 돌려주고, 취재한 거 다 풀어놓는 거예요.
“그랬군요. 몰랐어요.”
- 어머니 성격에 당신이 하셨다 말씀하진 않으실 테니까.
왠지 작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예령의 말대로라면 태조의 모친이 자신을 마냥 밉게 보진 않을 것 같은데.
- 참, 내일 모레 올 거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네. 그때 뵙겠다고 연락도 드렸어요.”
- 그럼 그날 맛있는 거 준비해야겠네. 세경 씬 뭐 먹고 싶어요? 우리 어머니 음식 진짜 잘하세요.
“그냥 평소에 드시는 대로면 돼요. 너무 차려주시는 것도 제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게다가 그날 제대로 밥이나 먹을 수 있을는지.
태조의 어머니 앞에서 떨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 해산물은 피하는 게 좋겠죠? 그때 부야베스 냄새에 입덧도 했으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입덧도 거의 안 하거든요.”
- 그래요? 그건 다행이네요.
“저 그날 괜찮겠죠?”
-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나도 그날 가니까. 일찍 가서 어머니한테 세경 씨 칭찬도 많이 해둘게요.
예령의 말에 세경이 웃었다. 태조 말고도 제 편이 그 안에 한 명 더 생긴 거 같아 마음이 조금 든든해졌다.
“그래도 반 관장님이 계셔서 마음이 좀 놓이네요. 태조 씨 말고 아는 사람이 없으면 진짜 많이 떨렸을 텐데.”
- 이제 곧 가족도 되니까 호칭은 바꾸는 게 어때요? 관장님 말고 언니나 형님이 좋을 것 같은데.
관장님은 거리감이 느껴진다며 예령이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그날 가면 언니라고 부를게요.”
- 오, 좋아요. 그럼 그날 봐요. 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알았죠?
“네. 그럴게요.”
예령에게 인사를 한 세경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태조 씨 어머님이 신경을 써주셨다고.”
그럼 도착하자마자 쫓겨나진 않으려나?
세경이 싱긋 웃으며 집을 나섰다.
***
주차장에 차를 세운 세경이 소속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또롱, 거리는 메시지 도착음이 들렸다.
[너 오늘 인터뷰하러 회사 온다며? 나 지금 매니저랑 회사에 있어. 도착하면 연락해.]
메시지는 유나에게서 온 거였다. 세경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디야? 회사 도착했어?
“응. 지금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는 중. 넌 어디에 있어?
- 나 6층. 너 인터뷰 하는 데가 여기라고 해서.
유나의 말에 세경은 디스플레이에 뜬 층수를 확인했다. 중간에 멈추는 것 없이 6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이내 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세경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송 실장과 제훈을 제외하면 기사가 난 뒤 처음으로 만나는 직원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따라 덩달아 얼어 버린 직원들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세경의 인사에 직원이 화들짝 놀라 인사를 되돌렸다. 세경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저 사람이 대표님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세경의 귀가 쫑긋 서졌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제 이야기에 귀가 먼저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 세경 씨!”
그때 안면 있는 직원들이 세경을 발견하고 우르르 달려왔다.
“축하해요. 결혼도, 임신도! 저번엔 대표님이랑 사귄다고 놀라게 하더니. 뭐예요. 이런 겹경사는!”
“송 실장님한테 들었는데, 식은 바로 안 올린다면서요? 그럼 웨딩사진은? 그것도 나중에 찍어요?”
순식간에 세경을 둘러싼 직원들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세경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네에. 지금 준비하기엔 조급한 거 같아서요. 아직 태조 씨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인사드리지도 못했고.”
“어머 어머, 대표님한테 태조 씨래.”
꺅, 비명을 지른 여직원이 옆 사람의 팔을 마구 쳐댔다.
“아니, 근데 세경 씨 아이 가졌다면서 왜케 날씬해요? 입덧이 심했어요? 아니면 아직 초기라 그런가?”
“배는 좀 나왔어요. 옷 품이 넉넉해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초기는 지났거든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새 세경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다.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한창 축하 인사를 받고 있을 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와 함께 송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거기 사람들 어서 빨리 흩어집시다. 세경 씨 그렇게 계속 붙잡고 있을 거예요?”
송 실장이 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며 손을 파닥거렸다. 사람들이 아쉬움에 한 발짝 물러섰다.
세경은 다음에 또 보자고 사람들에게 인사한 뒤 송 실장에게 다가갔다. 송 실장의 옆에는 유나도 함께였다.
“뭐 곤란한 질문 받고 그런 건 아니죠?”
“네. 다들 축하해주던걸요.”
“그럼 다행이고. 봐요. 세경 씨 아는 사람들은 다 축하하는 거. 참, 오늘 인터뷰하기로 한 기자님이 3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어요. 기자님 도착하면 연락할 테니까, 그 사이에 유나 씨랑 이야기하고 있어요.”
한쪽 눈을 찡긋거린 송 실장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세경은 어디로 갈까 물으며 유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들어가 있자. 너 인터뷰할 때 사용할 거라, 오늘 여기 비워 둘 거래.”
손을 뒤로 뻗은 유나가 빈 회의실을 가리켰다. 세경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유나는 탕비실에서 가져온 주스 하나를 세경에게 내밀었다.
“너 솔직히 말해라. 결혼에 임신. 이제 또 뭘 숨기고 있는지.”
“이제 숨기는 거 없어.”
음료수를 마신 세경이 은근슬쩍 유나의 시선을 피했다.
“저번에도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누가 알았겠냐고. 벌써 요 앙큼한 것이 아이까지 가졌을 줄.”
유나가 한쪽 눈을 들썩이며 세경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살이 안 찌는 스타일이라 그런가? 정말 임신했는데도 티가 안 나네.”
“옷이 딱 달라붙지 않아서 그렇지, 그래도 전보다 배도 조금 나왔어.”
“아이 태명은? 얼마나 됐어?”
“태명은 앙꼬. 이제 19주 넘기고 20주 되어가.”
“너도 대단하다. 그 정도가 됐는데도 여태껏 들키지 않은 게.”
“드라마 촬영이 없었으니까. 홍보 차 스케줄 활동할 때는 임신 초기라 많이 티가 나지 않았고.”
“그래도 몸은 피곤했을 거 아냐.”
“그거 다 고려해서 송 실장님이 스케줄을 잡아주셨어.”
그 덕에 별문제가 없었다며 세경이 배시시 웃었다.
“그냥 털어놔라. 사실 너 이미 법적으로 유부녀인 거지? 벌써 혼인신고도 마친 거 아냐?”
“그건 진짜 아니야. 아직 태조 씨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는걸.”
“너희 어머니는 아시고? 몰랐으면 나보다 더 놀라셨을 텐데.”
“저번에 집에 왔을 때, 그때 눈치채고 가셨어. 태조 씨랑 속이고 둘이 이미 이야기 다 한 거 있지?”
“진짜?”
정란의 반응이 예상된다며 유나가 큭큭 웃었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왔다.
새로 온 메시지를 확인한 유나가 세경을 흘끗 쳐다보았다.
“너 세라랑 자현이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지. 우리랑 같은 시기에 활동했었잖아. 그룹 해체한 뒤엔 한 번도 연락을 못 했는데.”
“나는 가끔 얘네랑 연락 주고받았거든. 얘들 이번에 한 번 모인다는데, 너도 같이 갈래? 너 본 지 오래됐다고. 같이 올 수 있음 좋겠다고 했었거든.”
“나도 한번 보고는 싶은데. 어색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못 본 지 꽤 돼서.”
“나도 그래. 연습생 때부터 알고 지낸 거라 정기적으로 모임도 가졌는데, 나 백수 되고 괜히 주눅 들어서 안 나갔었거든. 얘들은 괜찮다고 부담 가지지 말고 나오라고 하는데 그냥 내가 좀 작아지더라고. 얘들도 많이 궁금해했어. 네 기사 보고 축하한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은데, 너 번호가 바뀌어서 중간에 연락이 끊겼다고 하더라.”
“아, 나 영화 촬영 들어갈 때 번호를 한 번 바꾼 적이 있거든. 그때 몇몇 사람 빼곤 연락을 못 돌렸는데. 그거 때문인가 보다.”
“그러니까. 시간 나면 나랑 같이 가. 응?”
유나가 제 손을 잡고 흔들자 세경이 잠시 고민했다.
“나중에 약속 잡히면 날짜랑 시간만 알려줘. 그때 봐서 시간 나면 같이 가고.”
고개를 끄덕인 유나가 메시지에 답을 보냈다.
세경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금은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곧 태조의 부모님을 만날 생각에 머릿속은 이미 포화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