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아드님을 제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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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아드님을 제게 주세요!
2023.04.19.
“예령아, 이것 좀 먹어보렴. 간은 어떠니? 너무 짜니?”
태조와 세경이 오기로 한 날.
퇴근하자마자 시댁으로 온 예령은 마 여사가 주는 떡갈비 조각을 받아먹었다.
입에 담긴 고기는 퍽퍽함 없이 살살 녹았다. 간도 밥과 먹기에 좋을 만큼 너무 싱겁지도 짜지도 않았다.
“아뇨. 딱 좋은데요.”
“그래? 저기 전골 육수는? 음식을 너무 기름지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예령은 휘어지다 못해 무너질 것 같은 식탁을 보며 웃었다.
엊그제, 마 여사의 호출을 받고 시댁을 찾았을 때 예령은 태조가 세경을 만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안 했다며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곧 세경이 인사를 하러 온다는데, 무슨 음식을 하면 좋겠냐며 예령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저번에 같이 식사했을 땐, 입덧 때문에 그런지 해산물을 못 먹는 거 같더라고요. 안 그래도 제가 세경 씨한테 물어봤는데 평소 먹는 음식이면 좋다고 했어요.’
‘그건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태조랑 처음 인사하러 오는 건데, 어떻게 그리 간단하게 대접을 하겠어?’
말은 저렇게 해도 평소 차려 먹는 음식들이 간소한 건 아니었다.
마 여사는 가족들이 다 모일 때면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하나씩 꼭 내보였고, 반찬의 가짓수도 평소보다는 대여섯 개 정도가 늘어난다고 홍 여사님에게 전해들었던 터였다.
그리고 오늘 세경이 온다는 말에, 마 여사는 자신의 요리 솜씨를 최고치로 끌어온 듯했다.
채소와 고기가 듬뿍 들어간 소불고기 전골에 떡갈비와 갈비찜, 그리고 찜닭까지.
거기에 정갈하게 담긴 밑반찬들까지 포함하면 웬만한 뷔페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예령아 지금 몇 시니? 얘들 7시까지 온다고 했는데.”
“시간은 거의 다 됐는데. 제가 한번 확인해 볼게요.”
주방에서 나온 예령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도련님은 운전하고 있을 테니, 세경 씨한테 전화해볼까?
잠시 고민하던 예령은 인터폰을 켜 대문 앞을 살펴보았다.
“어?”
그녀가 모니터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문 앞에서 들어오지 않고 서성거리는 커플이 보였다.
“자기야, 뭐 해?”
“응. 아무것도.”
인터폰 화면을 끈 예령이 남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곤 현관을 나섰다.
***
“후우.”
문 앞에 선 세경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팔딱팔딱 뛰어댔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다니까.”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 태조 씨는 우리 엄마 만날 때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잠깐 아이 아빠가 나라는 걸 나중에 밝혀야 하나, 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뭐. 내가 옆에 있을 건데, 무슨 걱정이야.”
태조가 세경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가 옆에 있다는 게 든든하긴 했지만, 사진 속 마 여사의 얼굴을 떠올리면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예계에서도 포스 넘친다는 중년의 여배우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마 여사의 카리스마는 그들을 한층 더 압도했다.
별칭도 ‘범 여사님’이라던데. 자신이 그 앞에서 기죽지 않고 있을 수 있을는지.
‘아니,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내가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마음을 다잡은 세경이 호랑이 굴의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묵중한 대문 너머로 타박타박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한 세경이 태조의 옆에 바짝 붙었다. 동시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며 예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해요? 안 들어오고.”
“지금 막 들어가려고 했어요.”
태조의 말에 예령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얼어 있는 세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른 들어와요. 음식 다 식어요. 가족들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데.”
“오, 오래 기다리셨나요?”
“그건 아니고. 7시에 온다니까, 다들 일찍 퇴근해서 시계만 보고 있다니까요. 어머니도 왜 안 오냐 채근하시고.”
세경이 ‘더 일찍 와야 했나?’ 하고 중얼거렸다. 예령은 조마조마해 하는 세경의 옆에 붙어 서서 입을 열었다.
“너무 떨지 말고. 어머니가 그래도 세경 씨 만나기를 기대하셨나 봐요. 음식도 맛있는 걸로 엄청 만드신 거 보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어떻게 그래요. 둘째 며느리가 되는 사람을 보는 자린데. 그리고 참고로 알려주면 우리 어머니 작고 연약한 거에 약하시거든. 혹시라도 큰 소리 낼 것 같으시다 하면, 이마에 손을 올리고 픽 쓰러져요.”
“그거참 좋은 거 가르치시네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태조가 저건 따라 하지 말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잘 정돈된 정원을 지나 2층 건물 앞에 도착한 예령이 문을 열었다.
“어머니, 도련님이랑 세경 씨 왔어요.”
두 사람의 등장을 시끄럽게 알린 예령이 어서 들어가자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세경은 비장한 얼굴을 하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넓은 거실 앞에 도착하자 진 회장과 태조를 닮은 그의 형 윤조가 보였다.
“어서 와요, 세경 양.”
진 회장이 인자한 미소로 세경을 맞이했다. 예령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만든 기획사에 소속된 배우라는 접점 때문인지 윤조 또한 세경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왔니?”
주방에서 나온 마 여사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진 회장이나 윤조와 달리 마 여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세경입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마 여사가 몸을 돌렸다.
“들어와요. 이야기는 저녁부터 먹고 하죠.”
“네.”
기쁘게 맞아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냉랭한 마 여사의 반응에 세경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세경은 가지고 온 선물을 소파에 두고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예령의 말대로 식탁은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앉아요, 세경 씨.”
진 회장이 자리를 권했다. 세경은 태조의 손에 이끌려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차린 건 얼마 없지만, 많이 먹어요.”
차린 게 얼마 없다니요.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데요.
“네. 잘 먹겠습니다.”
세경이 싱긋 웃으며 마 여사에게 인사했다. 가족들이 식사를 시작하자 세경도 젓가락을 들었다.
차려진 음식이 많아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스러울 정도였다.
세경이 나물 반찬을 입에 넣어 오물거리고 있자, 태조가 떡갈비를 하나 집어 세경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
마 여사의 눈치를 본 세경이 태조를 힐끗거렸다.
“잘라줄까?”
“아니요.”
그냥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세경이 저를 챙기지 말라는 듯 태조의 허벅지를 툭 건드렸다. 가족들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세경이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올리곤 떡갈비를 한입 베어 물었다.
달짝지근한 양념이 입안에 확 퍼졌다. 뼈와 분리된 갈빗살도 혀끝에서 부드럽게 뭉개졌다.
긴장해서 음식이 넘어가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입맛이 돌기 시작하자, 세경의 젓가락이 식탁 위를 종횡무진 움직였다.
도토리를 줍는 족족 입안에 저장하는 다람쥐처럼 열심히 음식을 먹던 세경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대각선에 앉아 있는 마 여사의 시선이 제게 꽂혀 있었다.
“아…… 제가 너무 말도 없이 먹기만 했죠. 죄송합니다.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요.”
“잘 먹으면 좋지. 이것도 먹어봐요. 예령이한테 들으니, 입덧 때문에 해산물은 잘 못 먹는다고.”
마 여사가 빨간 양념이 묻은 더덕구이와 달짝지근하게 졸인 찜닭을 덜어 세경의 앞에 밀어주었다.
“이제 입덧도 가라앉아서, 다 잘 먹습니다.”
옅게 웃은 세경이 더덕구이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런 세경을 보며 픽 웃던 마 여사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건지, 마 여사의 눈이 태조와 마주쳤다. 짧게 헛기침을 한 그녀는 언제 웃었냐는 듯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를 거두었다.
“너도 어서 먹으렴.”
민망해진 마 여사가 태조를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아까는 웃지도 않으시더니.’
속으로 웃음을 삼킨 태조가 다시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
푸짐한 저녁 식사 후, 거실로 자리를 옮긴 세경은 마 여사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엔 따뜻한 루이보스 티가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고, 접시엔 알알이 분리된 샤인 머스캣과 애플망고가 담겨 있었다.
뭔가 오늘 여기서 먹은 것들이 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 나온 거 같은데.
세경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그가 포도 알을 하나 집어 세경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자연스러운 그 행동에 깜짝 놀란 세경의 눈이 커졌다.
찻잔을 든 마 여사의 눈이 미세하게 꿈틀거렸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령은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삐져나오는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태조 너, 저기로 좀 가지 않을래?”
마 여사가 진 회장과 윤조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턱을 까닥댔다.
“왜요? 저 떼어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그냥 여자들끼리 속 편히 이야기 좀 하려고 그런다. 안 그럼 내 서재로 세경 씨 데리고 들어갈까?”
태조가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보단 나아졌다고 하나 세경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요. 우리 선물 가져온 것도 회장님이랑 형님께 전해주고요.”
세경이 마 여사의 말대로 하라는 듯 태조에게 눈짓했다. 그가 어머니를 한번 쳐다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물을 든 태조가 진 회장과 윤조에게 걸어가자, 세경도 준비한 물건을 마 여사와 예령에게 건넸다.
“이거, 처음 뵙는 데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요. 작은 선물이지만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와도 되는데. 나 지금 풀어봐도 돼요?”
세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령이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냈다. 포장지를 풀자 화려한 무늬의 스카프가 나왔다.
“예쁘다. 고마워요. 잘 하고 다닐게요. 어머니는 어떤 거예요?”
예령이 궁금한 듯 눈을 반짝이자 마 여사가 상자를 열어 보았다.
허벅지 위에 올라간 세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 여사는 선물을 받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어머,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스타일이네요.”
예령이 밝게 웃으며 하는 말에 마 여사가 눈을 흘겼다. 첫째 며느리가 벌써 윤세경의 편을 드는 게 뻔히 보여서였다.
“선물은 고마워요. 하지만 앞으로 이런 거 사 오지 말아요.”
자신이 고른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걸까.
가시방석에 앉은 양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러다 정말 앙꼬까지 싫어하시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세경 씨는 아직도 굳어 있네? 내가 무서워요?”
“아닙니다. 그저 제가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돼서…….”
“실수는 이미 오래전에 한 거 같은데.”
담담히 말한 마 여사가 차를 홀짝거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까다로운 면접관처럼 세경을 응시했다.
“우리 태조랑 결혼할 생각이에요?”
“네.”
“전엔 태조가 결혼하자고 하는 것도 거절했다면서요.”
“처음엔 대표님…… 아니, 태조 씨가 절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아이를 책임진다는 마음이 앞서 결혼을 하자고 말한 거라 생각해서 그땐 거절했던 거구요.”
“근데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마 여사의 말에 세경이 태조를 한번 쳐다보았다.
“네. 지금은 태조 씨도 저랑 같은 마음이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세경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마 여사는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세경을 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간 감돌았다. 세경은 바짝 마른 입술을 맞비비며 마 여사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는 이번에 일 터진 거 보고 두 사람에게 굉장히 실망했어요. 세경 씨 직업상 임신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거 이해는 해요. 나도 사업해 본 사람으로서 백번 이해는 하는데…….”
“…….”
“부모로선 섭섭한 마음이 더 커요. 이번 일로 태조가 세경 씨의 결혼 상대로 관심을 받게 된 것도 별로고.”
“죄송합니다.”
세경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마 여사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속상해요? 내가 이런 말을 해서?”
“아닙니다. 저도 사람들이 태조 씨랑 아이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걸 보면서 속상하고 화가 났는걸요.”
“그런 게 부모 마음이지. 근데 만약 내가 두 사람 결혼 허락 안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저 녀석은 자기가 허락받을 나이냐면서 나한테 대들던데.”
마 여사가 괘씸하단 듯 태조를 흘겨보았다.
“그럼 계속 찾아뵈면서 인정받을 수 있게 노력을…….”
“뭘 계속 찾아와. 그거 그냥 지금 해봐요.”
“네? 지금부터요?”
세경이 얼이 빠진 얼굴로 묻자, 마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윤세경 씨를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내 마음을 돌릴 만한 각오 같은 거 한번 내뱉어 보라구.”
“아, 그게…….”
갑자기 던져진 과제에 세경의 사고가 정지됐다. 그간 드라마 대본을 보며 신박하다 생각한 대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어지러운 머릿속을 맴도는 거라곤, 구식적이고 뻔한 멘트뿐.
“제, 제가…….”
입을 뗐지만,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기서 마 여사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찾아와서 태조 씨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 매달려야 하나?
세경이 마 여사를 쳐다보았다. 호랑이를 마주한 토끼처럼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자신을 말을 기다리고 있는 마 여사를 보며, 질끈 눈을 감은 세경이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태, 태조 씨를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드님을 제게 주세요!”
푸흡!
무언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남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들려왔다. 세경은 오들오들 떨면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
세경은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예령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온몸을 들썩이며 웃고 있었고, 마 여사는 그녀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린 듯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저 아가씨, 진짜 귀엽네.’
마 여사의 주변에선 볼 수 없는 타입이었다.
태조가 저런 모습에 반했을까.
그녀는 한쪽에서 웃고 있는 아들을 일별하곤 세경에게 말했다.
“그래요, 저 녀석 이제 세경 씨가 가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