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진 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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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진 서방
2023.05.03.
“뭐가 좀 많네요?”
송 실장이 들고 오는 서류를 보며 세경이 살짝 겁먹은 얼굴을 했다.
스케줄 조정 차 찾아온 거였는데, 요즘 출연 요청하는 데가 많다고 하더니 그게 그냥 한 소리는 아닌 듯했다.
“일단 이번에 새로 제의 들어온 건 다 가져온 거예요. 내가 몇 개 골라놓긴 했지만, 그래도 뭐가 들어왔는지 세경 씨도 한번 봐야 하니까. 이 중에 또 하고 싶은 게 있을 수도 있고.”
“시나리오도 들어왔어요? 한동안 촬영도 할 수 없을 텐데.”
“시나리오는 다 일정에 여유가 있는 거예요. 크랭크인도 빨라야 내년 중후반쯤? 기간이 넉넉하니까 일단 찔러 보는 거지. 오늘 볼 건 이쪽. 예능 출연 요청 들어온 건데 나가도 괜찮을 만한 걸로 추린 거예요.”
송 실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종이 하나를 건넸다.
세경에게 출연 요청이 들어온 프로그램 리스트로 해당 예능에 나오는 고정 게스트와 프로그램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다른 건 다 스튜디오 촬영인데, 문 배우님 나오는 프로그램만 좀 멀리 나가야 해요. 강원도까지 가야 하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거기 문 배우님도 나오니까 세경 씨가 촬영하기 편할 것 같아서.”
“그러네요. 다른 분들도 다 제가 아는 사람이고. 그런데 이거 하룻밤 자고 오는 거 아니에요?”
“원래는 그런데 세경 씨가 나오면 그쪽에서 낮에 왔다 저녁까지 있다 가는 걸로 조정해 주겠다 하더라고요. 가면 문 배우님이 다 챙겨줄 거니까,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 여행 갔다 온다는 생각으로 가도 좋을 것 같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 세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래 여행을 간 게 언제였던지 까마득했다. 화보 촬영차 해외에 나가긴 했지만, 그것도 다 일의 연장선이라 제대로 쉬었던 건 아니었으니.
“당일이면 부담스럽진 않을 것 같네요. 운전하는 제훈이가 고생하겠지만. 이 프로그램은 나가는 걸로 해요.”
“그럼 이건 사전 미팅 잡히는 대로 알려줄게요. 그리고 잡지사 쪽에서 세경 씨 웨딩 화보나 만삭 화보 같은 거 찍을 생각은 없냐고 물어봤어요. 생각 있으면 자기네 쪽이랑 하자고.”
송 실장이 잡지사에서 보내온 거라며 세경에게 콘셉트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건 태조 씨랑 이야기해 볼게요. 근데 좀 신기하네요. 임신했다고 하면 일이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많이 들어온 거 같아요.”
“음,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넓어졌다고 해야 하나? 세경 씨도 곧 엄마가 되니까, 그와 연결해서 들어오는 거지. 예능도 봐요. 가족이랑 육아 예능 들어오는 거.”
세경이 손에 든 종이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확실히 예전과 달리 새로 제안이 온 프로그램은 대다수 육아와 관련된 거였다.
“‘우리 아이를 부탁해’ 같은 건, 나중에 세경 씨 육아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나가 봐요. 그건 스튜디오에서 영상 보면서 같이 이야기하는 거니까. 큰 부담은 없을 거야.”
“이 프로그램은 한번 찾아서 보고 난 뒤에 말씀드릴게요. 참, 저 계약된 광고주 쪽은 반응이 어때요?”
“처음 기사 나가고 좀 동요한 곳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반응이 나쁘지 않아요. 계약기간 끝나면 계속하자는 데도 있고. 대표님 집안이 좀 유명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송 실장이 웃으며 하는 말에 세경도 순순히 동의했다.
“그럼 오늘 준 거 살펴보고 출연할 프로그램에 결정하면 나한테 알려줘요. 아, 지금 대표님 외근 나가셨는데. 세경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이대로 집에 갈 건가? 아니면 대표님 좀 기다릴 거예요?”
“여기에 있다가 갈게요. 저기 빈 회의실 이용해도 되죠?”
“그래요. 내가 거기 사용 허가받아 놓을게. 아니면 편하게 대표님실에서 보든가.”
그건 싫다며 세경이 고개를 저었다. 태조도 없는 사무실에 굳이 혼자 있을 필요도 없고.
송 실장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세경도 서류를 들고 빈 회의실로 이동했다.
출연 제의가 들어온 프로그램 영상을 찾아보고 있을 때, 바깥에 나갔다 들어온 제훈이 양손 가득 무언가를 사 들고 왔다.
“누나,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탕비실에서 접시를 따로 챙겨온 제훈이 케이크를 꺼내놓았다.
세경은 그가 주는 자몽 주스를 쪽 빨아 마시며 달콤한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이번에 누나 출연하기로 한 프로그램이에요? 너무 많은 거 같은데.”
“다는 아니고. 여기서 몇 개 골라 나갈 거야. 아, 제훈아 나 너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떤 거요?”
잠깐 잊고 있었다는 듯 포크를 내려놓은 세경이 핸드폰 사진첩을 열었다. 화면을 내리던 그녀는 사진 하나를 찾아 제훈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 말이야. 그때 우리 카페 앞에서 봤던 사람하고 비슷하지 않아? 내 어깨를 치고 갔던.”
거북이처럼 목을 쭉 뺀 제훈이 눈을 좁혔다. 그리고 그날 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듯 눈을 위로 굴렸다 아래로 내리길 반복했다.
“비슷한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맞는 거 같은데요? 누구예요?”
“오여리라고, 우리 회사 초창기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이래.”
“헐. 그럼 진짜 연예계 활동을 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때 누나랑 저한테 낯익은 얼굴로 보인 거였나?”
“그랬을지도. 근데 지금은 따로 활동을 안 하는 거 같아. 검색해도 나오는 프로필이 없어. 송 실장님 말로는 연예계 활동 중단하고 해외로 나갔다고 하더라.”
“해외로 나갔어도 다시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운 나쁘게 저희가 그때 마주친 걸 수도 있죠. 암튼, 전 그 사람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요. 아직도 생각하면 화가 나네. 누나 막 치고 간 거.”
제훈이 씩씩대며 케이크를 욱여넣었다. 세경은 저 대신 화를 내는 제훈을 보며 웃었다.
“다시 볼일도 없을 텐데, 그냥 잊어버려.”
세경이 제 몫의 케이크를 제훈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제훈에게 확인도 마쳤겠다, 핸드폰을 내려다본 그녀는 오여리의 사진을 톡톡 두드리다 이내 삭제 버튼을 눌렀다.
***
“강원도?”
옷을 걸던 태조가 세경에게 물었다. 주문한 가구가 들어오고 청소까지 마친 새 드레스 룸에 태조가 옷을 걸어놓고 있었다.
정리를 하고 있는 건 안방에 딸린 드레스 룸에서 가져온 옷들이었다.
방에 붙은 드레스 룸에도 세경의 옷을 둘 만한 공간을 만들어 주겠다며, 태조가 부러 저쪽에 있는 자신의 옷을 옮겨오는 수고를 하고 있었다.
“양양이래요. 석주 선배가 촬영하는 데가. 피디님한테 연락을 받았는지, 아까 석주 선배한테 전화가 왔어요. 맛있는 거 먹여주고 보내줄 테니까 꼭 오라고. 아주 편하게 모시겠다나 뭐라나.”
세경이 석주가 한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아직 사전 미팅도 안 했건만, 피디가 무슨 바람을 넣은 건지 석주는 먹을 거로 세경을 꼬시고 있었다.
“뭘 해주겠다는데?”
“대게찜? 해산물이 싫으면 수육도 삶아주겠대요.”
“그거 당일 촬영이라고 했지?”
“네. 그런데 이왕 간 거 거기서 하룻밤 묵고 주변 좀 둘러보고 올까 해요. 선배가 근처에 바닷가도 있고 풍경 좋은 사찰도 있으니까, 원하면 구경도 시켜 주겠다고 했거든요. 강원도까지 갔는데 낮에 갔다가 밤에 돌아오는 건 좀 아쉽잖아요.”
세경이 태조의 옷을 야무지게 접어가며 대답했다. 옷을 다 건 태조가 바닥에 앉아 있는 세경의 뒤로 몸을 바짝 붙여왔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유독 석주하고 사이가 좋단 말이야.”
“전에 말했잖아요. 석주 선배가 촬영장에서 많이 챙겨줬다고.”
서랍 안으로 태조의 옷을 집어넣은 세경이 옆을 돌아보았다.
지그시 저를 응시하는 시선에 가슴이 설렌 것도 잠시, 계속해서 이어지는 태조의 침묵에 세경이 설마 싶어 입을 열었다.
“아니죠? 석주 선배 질투하는 건.”
“내가 그 곰을 왜.”
그저 생각해 보니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었다.
먼 곳도 아니고, 석주가 있는 강원도에 촬영차 가는 걸로도 저리 신나하는데, 정작 자신과는 여태껏 제대로 된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한 것 같아서.
“그날 같이 있다 올까? 바닷가도 보고, 풍경 좋은 사찰에도 들렀다 오고.”
“시간 돼요?”
기대에 찬 눈빛이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사실 태조와 같이 가고 싶지만 그의 일이 많은 걸 알아 섣불리 말을 꺼내지도 못한 거였다.
“낮부터 같이 가는 건 무리겠지만, 촬영 끝날 때쯤에 시간 맞춰 갈게.”
그러니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만 석주와 같이 있으라며, 태조가 세경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제 여기도 정리됐으니, 세경 씨 짐도 들여와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태조가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윤세경도 들어오고.”
“지금요?”
고개를 끄덕인 태조가 세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짜 성격 급하다니까.
피식 웃은 세경이 태조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
세경이 정리된 옷방을 둘러보았다. 태조의 슈트와 제 옷이 한 공간에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제 정말 태조와 같이 산다는 실감이 난다고나 할까.
세경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살폈다. 오늘은 유나와 같이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입고 나갈 원피스와 가방을 몇 개 고르고 거울 앞에 서 있을 때였다. 벨 소리가 들리자 거실로 나온 세경이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액정에 뜬 정란의 이름에 세경은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엄마.”
- 어디니? 진 서방 집이야?
응?
정란의 입에서 나온 낯선 호칭에 세경의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엄마가 뭐라고 했지? 지, 진 서방?
“엄마, 지금 뭐라고 한…….”
- 어디냐고.
“아니 그 뒤에.”
- 뭐? 진 서방?
바뀐 호칭에 적응하지 못하는 세경과 달리, 태조를 진 서방이라 칭하는 정란의 목소리는 아주 천연덕스러웠다.
“언제부터 대표님을 그렇게 불렀어?”
- 2주 정도 됐나? 세경이 네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게 됐다면서 전화를 했었거든. 자기 부모님께 인사도 드렸고 결혼 허락도 받았다고. 식이야 나중에 올려도 세경이 너랑 집은 먼저 합치기로 했다면서. 그 전에 다시 인사드려야 한다는 거 내가 됐다고 했어.
태조가 따로 엄마에게 연락을 했을 줄은 몰랐다. 자신에겐 아무 말도 없었는데.
- 그러다 내가 계속 대표님, 대표님 하는 게 신경이 쓰였나 봐. 이제 가족이 되는데 편히 부르라고 하길래, 내가 진 서방으로 부르기로 했지.
“그랬구나. 난 또 엄마가 갑자기 그렇게 불러서 얼마나 놀랐는지.”
- 뭘 놀라. 하긴 계속 사위를 대표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암튼 엄마는 다행이라고 생각해. 안 그래도 너 주 수 늘어날수록 혼자 있는 거 걱정이었거든. 몸 무거워지면 옆에 누가 있어야지. 그래서 짐은 다 옮겼어?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삿짐 풀지 말 걸 그랬다.
“간단히 옷만 챙겨왔어. 집도 가까우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그때그때 챙겨오면 되고.”
- 진 서방 가족에게 인사도 했다며. 어른들이 잘 대해주시든?
“응. 나중에 엄마 보러 제주도로 내려가겠다 하시던데?”
- 아이, 무슨. 나 혼자 움직이는 게 낫지. 엄마가 나중에 올라갈게. 그때 한번 자리 만들어서 같이 뵙자.
“그래요. 엄마 편할 대로 해.”
- 엄마 갈 때까지 몸조리 잘하고. 무리하지 말고.
“걱정 말아요. 주위에서 잘 챙겨주니까.”
정란을 안심시킨 세경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시선이 거실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아, 늦겠다.”
30분 뒤에 유나가 저를 데리러 올 거였다.
시간을 확인한 세경이 바쁘게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