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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너는 아니겠지만. (80/100)


80. 너는 아니겠지만.
2023.05.06.



 
또롱.

메시지 도착음이 울리자 태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알림 메시지에 앙큼한 고양이가 뜨자 태조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 친구들 만나러 가요. 유나 차 타고 가는데. 장소 찍어 보낼 테니까 혹시 퇴근 시간 맞으면 데리러 와줘요.]

세경의 메시지 아래 레스토랑 장소가 찍힌 링크 주소가 떴다. 위치를 확인한 태조가 예상되는 도착 시간을 찍어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세경 씨지?”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 상무가 말했다. 태조가 별다른 대꾸 없이 우현을 쳐다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한쪽 입술을 쓱 밀어 올렸다.


“그거 아냐? 너 세경 씨한테 연락 오면 입꼬리 하나가 춤을 추는 거?”

“모르겠는데.”

모르긴 뭘 몰라 지금도 웃고 있으면서.

우현이 헹, 코웃음을 쳤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태조에게서 애처가 모습이 보였다. 그가 옆에서 지켜본바, 진씨 가문 남자들에겐 애처가 유전자가 박혀 있었다.

태조의 아버지도 마 여사님께 꼼짝하지 못했고, 윤조 형도 형수님 한정으로 팔불출이었다.

그러니 그 진한 유전자가 진태조 저놈에게만 비껴갈 리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냐? 생각보다 큰 탈 없이 넘어가서. 솔직히 나 세경 씨 기사 나왔을 때 눈앞이 캄캄했거든. 우리가 먼저 밝힌 게 아니니까 예상보다 안 좋은 반응이 나오면 어쩌나 해서.”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아찔한 듯, 강 상무가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그 후에 다른 사건이 굵직하게 터져서, 상대적으로 세경 씨 일이 좀 금방 가라앉았지.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운이 좋다기보단 시대가 변한 만큼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변했으니까. 아, 너 세경 씨 석주가 출연하는 예능에 나간다는 거 들었지?”

“어. 강원도 간다며? 그렇게 멀리 움직여도 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선 괜찮다고 했어. 그래서 말인데, 세경 씨 촬영 잡히면 나도 그에 맞춰 한 이틀 휴가 내려고.”

“뭐?”

제 일이 늘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강 상무의 눈이 험악해졌다.


“너는 왜? 너도 촬영하냐?”

“아니. 나는 데이트하려고.”

“데이, 아, 진짜…….”

혈압이 오르는 듯 강 상무가 뻣뻣해진 뒷목을 붙잡았다. 진짜, 염장질도 가지가지지!


“그럼 그 이틀 동안의 일은?”

“네가 맡아서 해야지.”

“어휴, 정말. 내가 세경 씨랑 그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 봐준다.”

우현이 구시렁거리며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기사를 빠르게 훑어내리던 그는 뭔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잠깐…….”

낯익은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간 듯했다. 우현은 조금 전 지나친 기사 하나를 클릭했다.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의 홍보 기사였다. 기사에 덧붙여진 포스터와 출연진 사진을 살펴보던 우현은 사진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오여리 맞지?”

태조가 우현이 내민 태블릿을 받아보았다. 사진 속 여자는 그의 말대로 오여리가 맞았다.


“한국에 들어온다더니, 진짜 왔네.”

과거의 일이 떠오른 듯 우현이 진저리를 쳤다. 저 미친 망아지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개고생했던 게 생각나서였다.


“다시 연예계 활동을 하려는 건가? 염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우리 회사엔 찾아오지 않겠지?”

“그러길 바라야지.”

태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인터넷 창을 닫아 버렸다.

***

달그락.

커트러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곳은 삼성동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라 어색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것도 잠깐이었다. 같이 활동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치 그때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럼 세경이 너랑 결혼한다는 사람이 이 사람이 맞는 거야?”

식사가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자현이 사진 하나를 띄워 세경에게 보여주었다.

<우아한 가족>의 제작 발표회 때 찍혔던 사진이었다. 모자이크도 되지 않은 터라 태조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응. 맞아.”

“이런 사람이 회사 대표라고? 아니, 왜 직접 배우는 안 하시고?”

피지컬도 완벽하다는 자현의 감탄에 세경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옆에 앉아 있던 유나는 몸을 기울여 사진을 보더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옆모습이네. 정면을 봐야 하는데. 실물은 더 멋있거든.”

“유나 넌 직접 봤어?”

“당연히 봤지. 계약할 때. 우리 회사 대표님이기도 하잖아.”

“맞다. 유나가 세경이랑 같은 소속사지. 아우, 쟤가 저러니 더 궁금하네. 잠깐 얼굴 볼 수 없을까? 혹시 여기로 안 오신다니?”

자현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눈을 했다. 태조가 여기로 오겠다고는 했는데. 잠깐 들어올 수 있냐고 물어봐야 하나.


“한번 물어볼게. 조금 이따 도착할 거라고 했거든.”

“으아, 궁금해라. 오랜만에 보는데 축하할 소식도 들려오고 좋다. 유나도 일이 잘 풀리는 거 같고.”

“그러니까. 유나는 원래 방송도 하고 싶어 했잖아. 누가 알았겠냐고, 결혼하고 일이 더 잘 풀릴 줄.”

“세경이 덕분이지. 나 얘 보러 갔다가 임 피디님 만난 거잖아.”

친구들의 말에 씨익 웃은 유나가 세경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그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고. 음, 그리고 이 분위기에 이런 얘기를 꺼내도 되나 싶은데.”

자현이 세경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어려운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혹시 나경이라고 알아?”

세경이 유나를 돌아보았다. 주희와 친하다는 그 친구의 이름이었다. 같은 소속사였지만, 뒤늦게 데뷔 준비를 했던 세경과는 그다지 접점이 없었다. 오다가다 몇 번 얼굴을 보긴 했지만.


“친하지는 않지만, 얼굴은 알아.”

“실은 걔도 우리랑 같이 모이는 멤버 거든. 오늘은 아이 때문에 못 왔지만. 나경이가 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달랐어. 자기가 주희한테 괜한 말을 해서 너를 곤란하게 한 거 같다고.”

“됐어. 나쁜 마음으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 친구가 아니었어도 그건…….”

Trrrrrrrr-.

그때 테이블 끝에서 시끄러운 벨 소리가 울렸다. 세경이 잠시 말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앗, 미안.”

핸드폰을 든 여자가 난감한 얼굴로 세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곤 목소리를 낮춘 채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그럼 다 모였지. 아, 우리? 이제 거의 다 먹고 슬슬 정리할 건데. 음, 아마도 자리를 옮길……. 뭐? 여길 왔다고? 아, 잠깐 기다려 봐. 내가 나갈…….”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생긴 듯 당황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문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밀자 바깥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왜 나와? 지금 자리 옮기려고? 자현이 이름 대니까 룸 번호를 알려주던데…….”

뒤늦은 등장한 인물로 인해 룸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세경의 앞에 앉은 자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마를 짚었고, 유나의 미간은 와락 일그러졌다.


“주희야, 너 어떻게……. 오늘 스케줄 있어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문 앞에 선 여자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세경과 주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세경은 말없이 주희를 응시했다.

여기에 세경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굳어 있는 주희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

자리에 앉은 친구들이 세경과 주희를 힐끗거렸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해졌다.

세경은 거의 다 도착해간다는 태조의 문자에 답을 한 뒤 앞에 앉은 주희를 쳐다보았다.

의외로 이 자리를 피해 돌아가려 한 주희를 붙잡은 건 세경이었다.

예전처럼 제 말을 무시하고 그냥 갈 줄 알았는데 그러면 도망치는 거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무슨 오기라도 생긴 건지, 주희는 순순히 들어와 세경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덕분에 이 자리가 불편해진 건 먼저 온 다른 친구들이었다.


“저기…… 우리 슬슬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까?”

얼어붙은 분위기를 깰 겸 자현이 이야기를 꺼냈다. 세경은 살짝 웃으며 잠시 기다려 달라 말했다.


“오늘이 아니면 주희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이어진 세경의 말에 주희가 불쾌한 듯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뜻이야? 이야기할 기회가 없다니? 내가 뭐 연예계를 떠나기라도 한다는 소리야?”

“아니, 세경이가 뭐, 너 연예계 은퇴하라고 했냐? 왜 과민 반응이야.”

예민한 주희의 반응에 유나가 발끈해 소리쳤다. 주희의 뾰족한 시선이 유나에게 향했다.


“왜, 뭐. 이번에 너 드라마 중간 하차한 것도 세경이 탓하려고?”

“유나야.”

흥분한 유나의 손을 세경이 붙잡았다. 저를 말리는 세경을 향해 유나가 입을 삐죽거렸다.


“오해하지 마. 오늘이 아니면 너랑 말할 기회가 없다고 한 건, 내가 유나를 만나듯 널 자주 보는 게 아니라서 그런 거니까. 오늘도 봐. 네 스케줄이 일찍 끝난 게 아니었다면 얼굴을 볼 기회도 없었을 거잖아.”

“…….”

“근데 참 이상하지? 우리가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닌데, 나한테 무슨 기사가 뜨면 항상 네 이름이 들려오거든.”

이제 보니 친구들 앞에서 저를 비난하려고 부른 건가 싶어, 주희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아, 왜 나한테 들어오라고 하나 했더니. 내가 너튜브에서 했던 말 때문에 사과받고 싶어서 그래?”

“진심도 없는 사과 받아서 뭐 하게.”

무심한 세경의 대답에 주희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내 임신 사실 기자에게 알린 사람이 너라고 들었어.”

“누가 그래?”

날을 세운 주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경이 무슨 말을 한 걸까? 저를 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전과 달리 싸늘했다.


“증거도 없이 사람 몰아붙이지 말지? 네 말대로 우리가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네가 임신했는지.”

“증거 없다고 하지 않았는데. 기자도 네가 제보자라 했고, 병원에서 우리 회사까지 나를 쫓아온 차가 있다는 것도 확인했거든.”

“…….”

“그게 주희 네 차라는 것도.”

주희가 뿌득 이를 갈았다. 그 망할 기자. 제보자에 대한 정보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지 않는다더니!


“그래. 내가 말했어. 네가 임신한 거 같으니 한번 취재해 보라고. 근데 그게 무슨 죄라도 돼? 내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죄는 아니지. 하지만 알고는 있겠지. 그 사실이 터지면, 내가 곤란해질 거라는 것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 나 때문에 곤란해졌으니 엎드려 사과라도 받고 싶어? 아님. 너랑 결혼하는 사람한테 부탁이라도 해서 내 연예계 생활도 망쳐보려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네 상황은 네가 더 잘 알 텐데.”

주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야, 바닥을 친 자신의 이미지는 더 망칠 것도 없다는 건가?

세경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주희를 보며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한때는 같은 팀이었는데, 우리는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됐을까.

처음 너튜브 사건으로 인해 제 상황이 곤란해졌을 땐 속상함에 더해 주희를 원망하는 마음도 생겨났었다.

그다음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지며 태조와 앙꼬에 대해 사람들이 날 선 반응을 보였을 땐 분노가 치솟았었고.

주희를 찾아가 대체 제게 왜 이러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굳이 제가 따져 묻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제가 한 일에 대한 벌을 되돌려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에게 할 복수는 따로 있었고.


“나는 그냥 지금 네 상황을 돌아보라고 말해주고 싶은 거야. 네가 한 일이 결국 너한테 어떻게 돌아왔는지. 너는 그 일로 내가 불행해지길 바랐겠지만 나는 그 일로 잃은 게 없어. 오히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만 알았지.”

“…….”

“너는 아니겠지만.”

똑똑.

타이밍 좋게 들린 노크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돌아갔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사진 속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자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태조는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 세경을 바라보았다.


 


“데리러 왔는데.”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태조를 본 주희가 겁을 먹은 것처럼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세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유나도 뒤따라 일어섰다.


“먼저 갈게. 다음에 보자. 이건 나가면서 내가 계산할게.”

세경이 빌지를 챙겨 룸을 나섰다. 유나도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자 룸 안이 기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주먹을 쥔 주희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 누구 하나 섣불리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어, 우리도 이만 갈까?”

그 말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 다들 자신의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주희가 거친 숨을 들이켰다.

하나둘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에 그녀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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