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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인연이 아니라 악연 (81/100)


81. 인연이 아니라 악연
2023.05.10.



 
레스토랑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던 태조가 뒤를 돌아보았다.


“유나 씨 차는 어디에 있어요?”

“네? 아, 저는 여기요.”

유나가 차 키를 들고 누르자 주차되어 있던 차 한 대가 번쩍 빛을 내뿜었다. 그녀는 태조를 향해 웃어 보이곤 세경을 바라보았다.


“대표님도 오셨으니까 나는 가볼게.”

“애들이랑 더 있다 오지. 나 안 따라 나왔어도 됐는데.”

“에효,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또 열 내고 있었을 거야. 걔네는 나중에 또 보면 돼. 들어가. 대표님도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유나 씨도 운전 조심해요.”

태조에게 꾸벅 인사를 한 유나가 세경에겐 손을 흔들며 자기 차로 달려갔다. 그녀가 운전석에 오르자 세경도 태조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그 자리에 임주희도 있었지?”

세경이 안전벨트를 매자 태조가 차를 출발시켰다.


“네. 식사 끝나고 슬슬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 할 때 왔더라고요. 내가 있는 줄 몰랐나 봐요. 원래는 스케줄 때문에 못 오는 거 같았는데.”

“그 친구랑 무슨 얘기 했어?”

“음, 기자한테 임신 사실을 제보한 게 네가 맞냐고 물었어요. 처음에는 발뺌하다가 병원에서부터 쫓아온 이야기를 하니까, 그때부터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바라느냐고. 그게 뭐 큰 잘못이냐고 도리어 화를 내더라고요.”

다시 또 그 일을 생각하니 답답한 한숨만 흘러나왔다.

주희가 데뷔 전부터 저를 못마땅하게 여긴 건 알고 있었다. 긴 시간 연습생으로 있었던 주희에게 고작 몇 달 준비해 같이 데뷔한 제가 얼마나 얄밉게 보였을까.

그래서 같이 활동할 적엔 주희가 제게 불만을 내비쳐도 그럴 만하다 여기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드라마 촬영과 새 앨범 준비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적엔 잠을 줄여가며 무리하게 준비를 했고.

하지만 그렇게 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해도, 주희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항상 제게 짜증을 내며 제 말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드라마 촬영으로 세경의 인지도가 올라갈 적엔 그 강도가 더 심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위로 올라오라고 했던 거야?”

“처음엔 주희 때문이 아니라 애들이 태조 씨를 직접 보고 싶다고 해서…….”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는 태조의 연락을 받았을 때, 세경은 잠깐 고민을 했었다. 임주희가 있는 자리에 그를 불러도 되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누구보다 제가 불행하길 바라는 사람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고의 복수가 아닐까 하는.


“그러다 불쑥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주희에게 태조 씨랑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네가 날 싫어해서 무슨 짓을 하든 나는 타격 하나 없다는……. 뭐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아요.”

“…….”

“나 너무 속 좁은 건가요?”

“아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고작 그것밖에 안 했냐고, 화를 낼 거 같은데.”

“누가요?”

순진하게 되묻는 세경을 보며 태조가 웃었다.

진짜 이 순한 고양이가 어떻게 그 범과 쨉 날리는 토끼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건지.


“있어, 그런 사람들이.”

답을 얼버무린 태조가 세경의 손을 잡았다.

대체 누구냐 옆에서 종알대는 세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액셀을 밟았다.

***



- 아니. 뭐 그런 걸 가만히 두고 있어요? 뺨을 한 대 치든가, 똑같이 엿을 먹이든가. 아니면 고소장 정도는 날려줘야지.

“하하.”

분노를 표하는 예령의 말을 들으며 세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음, 예령 언니였구나. 고작 그것밖에 안 했다고 화를 낼 사람이.


- 몸이 무겁진 않아요? 움직이기 불편할 것 같은데, 강원도로 촬영까지 간다고?

“네. 계속 집에 있으니까 심심하기도 하고. 석주 선배도 나오는 프로그램이라 부담이 덜 할 것 같아 놀러 가는 기분으로 갔다 오려고요. 태조 씨도 그때 휴가를 낸다고 하고요.”

- 그래, 맨날 집에 있느니 한번 기분 전환 겸 나가는 것도 좋지. 그럼 우리 만나는 건 강원도에 갔다 온 이후로 해요.

그럼 나중에 제가 연락을 하겠다며 세경이 전화를 끊었다. 방송국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제훈이 룸미러로 뒷자리를 힐끗거렸다.


“대표님도 거기 오신다고 하셨어요?”

“응. 저녁때. 제훈이 너는 낮에 나 데려다주고 일찍 퇴근해도 될 거야.”

“에이.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대표님이 오실 때까진 같이 있을게요.”

차에서 내린 제훈이 뒷문을 열어주었다. 세경이 내리는 것을 도와준 그는 그녀와 함께 방송국 안으로 들어섰다.


“저희 3번 회의실로 가면 되겠는데요.”

미팅이 잡힌 7층으로 올라간 제훈이 작가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세경도 그가 말한 회의실을 찾으려 주변을 살폈다.

그때 수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회의실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세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앞선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 순간 옆을 돌아본 한 여자와 눈이 살짝 마주쳤다.

저 사람…….

여우처럼 올라간 눈매에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자는, 전에 만났을 때처럼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오여리.

세경은 프로필 파일에서 본 여자의 이름을 소리 없이 되뇌었다.


“어, 저 여자…….”

세경의 옆에 멈춰선 제훈이 눈을 크게 떴다. 오여리도 이쪽을 보더니 세경을 위아래로 흘기곤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마치 그녀를 얕잡아 보는 듯이.

금세 시선을 거둔 오여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코너 쪽으로 사라졌다. 방송국에서 그녀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지, 지난번 기억을 떠올린 제훈이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죠? 설마 다시 방송 활동을 하는 건가?”

제훈이 오여리가 나왔던 회의실 앞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달린 프로그램명을 본 그가 눈썹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연예계가 좁다 좁다 하더니 뭐 이런…….”

제훈은 인터넷으로 프로그램명을 검색하더니 기가 찬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리얼리티 관찰 예능이었다. 그새 촬영을 마친 듯 홍보 기사도 올라오고 방송 날짜까지 잡혀 있었다.


“어? 세경 씨, 지금 오신 거예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셨네.”

저를 알아보는 목소리에 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메인 피디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유 있게 출발했거든요. 저희 지금 막 회의실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아, 우리 회의실은 이쪽. 들어오세요. 마실 건 뭐로 드릴까요? 막내 작가가 좀 전에 카페로 내려갔는데.”

“저는 카페인 없는 거면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무거나가 제일 고르기 힘든 거 알죠? 음, 블루베리 요거트는 어때요? 저번에 먹어보니까 맛있던데.”

“좋아요.”

“매니저님은?”

“저는 무난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막내 작가에게 전화를 건 피디가 메뉴를 추가하곤 두 사람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 곧 양손 가득 캐리어를 든 막내 작가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우선 출연 섭외받아줘서 고마워요.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석주 선배한테 꼭 나와달라고 연락이 와서요.”

“아아, 석주 씨한텐 우리가 좀 푸시 하긴 했죠. 와서 편하게 지내고 갈 수 있게 배려해줄 테니, 어떻게든 오게끔 꼬셔보라고.”

피디가 뇌물처럼 블루베리 요거트를 내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 저는 신희진이에요. 편하게 신 피디라고 불러요. 우리 프로그램이 어떤 건진 알고 있죠?”

“시골집에서 밥도 해 먹고 일손도 돕는 거요.”

“맞아요. 간혹 감자나 고구마도 캐고, 일손 부족한 어르신들 있으면 가서 돕기도 하는데. 세경 씨는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고…….”

차락차락. 종이를 넘기던 피디가 세경을 슬쩍 쳐다보았다.


“세경 씨 혹시 음식 잘해요?”

“아주 맛있게는 아니지만 무난한 정도로는 해요.”

“그날 석주 씨가 세경 씨 온다고 대게찜이랑 수육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편하게 있다가 가라곤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 그림이 좀 이상할 것 같아서. 식사 때 간단히 된장찌개나 이런 거 준비해 줄 수 있을까 하고요.”

“그 정도는 괜찮아요.”

“또 중간에 잠깐 쉬면서 세경 씨 연애담도 들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어때요? 이야기 가능할까요?”

신 피디가 제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세경이 피식 웃었다.


“실은 그걸 제일 원하시는 거죠?”

“아니라곤 말 못 하겠네요. 다들 궁금하기도 할 거구. 마침 또 우리 프로그램에 석주 씨도 있으니까.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어디까지 이야기할지는 조금 고민해 볼게요.”

세경의 긍정적인 대답에 피디와 작가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 우리 어디서 촬영하는지 이야기 안 해줬죠? 주소는…….”

신 피디가 알려주는 시골집의 주소는 옆에 있던 제훈이 받아적었다. 그렇게 몇 가지 사항을 더 논의한 후 피디가 허기진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세경 씨, 뭐 먹고 왔어요? 우리가 애매하게 미팅 시간을 잡아가지고. 지금 먹을 것 좀 시킬 테니까, 같이 먹고 가요.”

“그럴까요?”

세경이 흔쾌히 동의하자 신 피디가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해 음식을 주문했다. 배달시킨 음식이 도착할 동안 세경은 손을 씻고 오겠다며 회의실을 나섰다.


“후아.”

세면대 앞에 선 세경이 한숨과 함께 뻐근한 허리를 뒤로 젖혔다. 앙꼬가 자라면서 배는 눈에 띄게 불러오고 허리 통증은 전보다 더 심해지고 있었다.


“빨리 마무리 짓고 들어가야지.”

수전을 올린 세경이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밀어 넣었다. 핸드워시를 쭉 짜서 손가락 사이사이를 씻어내고 있을 때,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가 세경의 등 뒤를 지나쳤다. 동시에 후각을 마비시킬 만큼 독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경은 남은 거품을 씻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울 속에서 저를 보고 있는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초면 아니죠?”

여자가 빨간 입술 위로 다시 립스틱을 덧바르며 말을 걸어왔다.

세경은 저 말에 대꾸를 해야 하나 싶어 잠시 답을 망설였다. 초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만큼 친근한 사이도 아니었다.


“이렇게 또 만나는 걸 보면 우리 무슨 인연이 있나 봐요?”

여자가 과장스럽게 눈가를 접으며 말했다.

인연이라니. 초면에 만났을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잊어버린 건가? 사람들은 이런 걸 인연이라 하진 않을 텐데.


“글쎄요. 인연이라 할 만큼 첫인상이 좋았던 건 아니어서.”

세경의 대답에 오여리가 픽 웃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클러치를 뒤적거리더니 담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 임신부 앞에서 담배는 좀 아닌가?”

인상을 쓴 세경이 여리를 쳐다보자, 그녀가 세경의 배를 한번 쳐다보곤 삐딱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보다 요즘은 건물 전체가 다 금연구역이라서요. 담배를 피실 거면 흡연 구역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친절하게 충고한 세경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오여리가 세경의 뒤통수에 대고 입을 열었다.


“참, 태조 오빠는 잘 지내요?”

태조 오빠?

친근하게 태조를 부르는 소리에 세경의 걸음이 멈칫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여리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더니, 태조 오빠 결혼 소식이 들려오더라고요. 그 상대가 윤세경 씨라 하던데…….”

그녀가 묘하게 말끝을 끌자 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눈빛이 세경의 배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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