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태조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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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태조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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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태조 오빠
2023.05.13.
“…….”
둥지의 알을 노리는 뱀과 같은 눈이었다.
세경은 왠지 모를 섬뜩함에 배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오여리의 시선에서 아이를 보호하듯이.
그 모습을 본 오여리가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경계해요. 윤세경 씨 결혼한다는 건 전국민이 다 안다 그러던데. 혹시 내가 그쪽한테 해라도 입힐까 봐 그래요?”
자신은 무해한 사람이라는 듯 그녀가 양손을 활짝 펴 보였다. 그럼에도 세경의 경계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윤세경 씨가 임신해서 태조 오빠랑 결혼한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오여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떠도는 소문을 듣고 말하는 것일 뿐, 제겐 악의가 없다는 것처럼.
하나, 그녀가 하는 말은 인터넷에 떠도는 악플과 다를 바 없었다.
“제가 그런 소문에 일일이 답을 해야 하나요? 게다가 오여리 씨랑 저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 물론 윤세경 씨는 나랑 관련이 없죠.”
“…….”
“태조 오빠라면 모를까.”
방긋 웃은 오여리가 세경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곤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근데 윤세경 씨도 날 알고 있나 봐요? 내 이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렌즈를 낀 까만 눈동자가 코앞에서 반들거렸다. 순간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세경은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다.
“우연히 알게 됐어요. 얼마 전 회사에서 예전 프로필 사진을 봤거든요.”
“아아, 그래요? 난 또 태조 오빠가 내 이야기를 한 줄 알았더니.”
입술을 길게 늘여 웃은 오여리가 숙였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아직도 내 사진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네요. 맞아요, 내가 윤세경 씨 소속사의 초창기 멤버였죠. 우리 집안이 태조 오빠네 집안과 좀 각별했거든요. 그래서 윤조 오빠가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린다기에 들어간 거예요. 어머니들끼리도 무척 친해서, 나중에 태조 오빠랑 나랑 결혼을 시키면 좋겠다, 뭐 이런 이야기도 종종 나오곤 했으니까.”
“…….”
“그래서 궁금했던 거예요. 태조 오빠가 어떤 사람이랑 결혼할지. 음, 근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세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좀 실망이네요. 태조 오빠 정도면 그쪽보단 더 세련되고 좋은 집안의 사람과 결혼할 줄 알았는데.”
오여리의 입에서 피식 비웃음이 샜다. 내리깐 눈동자는 세경을 한참 아래로 깔보고 있었다.
송 실장에게 오여리가 제멋대로란 말은 들었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예의가 없는 줄은 몰랐는데.
“저도 제가 태조 씨랑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세경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묻지도 않은 태조와의 친분을 제 앞에서 과시하는 건, 분명 저를 도발하기 위한 거였다. 그의 결혼 상대로 제가 부족하다 얕보는 것은 제 자존심을 긁기 위한 거였고.
그러면 뭐, 내가 울고불고하며 결혼 안 한다고 할 줄 알고?
“그리고 오여리 씨는 참견이 좀 과한 거 같네요. 가족도 아니면서 본인이 결정한 결혼 상대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
“내 말에 불쾌했어요? 난 그냥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인데. 내가 뒤에서 수군대는 짓은 못 하거든.”
제발 그런 건 뒤에서 혼자 수군댔으면 좋겠는데.
“그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면 공감 능력이 좀 떨어지시는 거 같은데. 앞으로 연예계 활동하실 거면 그런 점은 고치는 게 좋아요. 그리고 태조 씨랑 얼마나 알고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본인의 일도 아닌 이상 관심은 꺼줬으면 하고요. 결혼할 상대로서 그런 말 듣는 거 참 껄끄럽거든요.”
웃으며 악담을 했던 오여리처럼 세경도 입에 미소를 건 채 대답했다.
‘하, 이것 봐라?’
순한 얼굴이라 몇 마디 해주면 울며 뛰쳐 나갈 줄 알았더니.
세경이 지지 않고 말하자 오여리가 재밌다는 듯 입술을 치켜올렸다.
“윤세경 씨 생각보다 꽤…….”
덜컹.
오여리가 입을 떼는 순간, 두 사람만 있던 화장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같이 미팅을 했던 신 피디가 벽을 잡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어, 세경 씨. 여기 계속 있었어요? 매니저님이 늦게 오신다고 한 번 가 봐달라 해서요. 음, 근데…….”
말꼬리를 흐린 신 피디가 세경의 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저분과 이야기 중이셨나요? 그럼 저 먼저 가 있을까요?”
“아뇨. 같이 가요. 저도 지금 막 나가려고 했어요.”
세경이 오여리를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복도로 나온 신 피디는 여리 혼자 남아 있는 화장실을 힐끗거렸다.
“저 사람, 그냥 저렇게 두고 와도 돼요?”
“네. 저도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요.”
그런 사람이 세경 씨를 그렇게 잡아먹을 듯 노려 봐요?
신 피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뒤에서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투명한 유리문 안쪽으로 길쭉한 인영이 보이자, 신 피디가 세경의 뒤에 바짝 붙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소파에 앉은 세경이 쿠션 하나를 집어 들었다.
태조와 놀러 갈 곳도, 맛집도 찾아야 하는데 마음이 심란한 탓에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낮에 오여리를 마주한 탓이었다.
‘아직도 내 사진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네요. 맞아요, 내가 윤세경 씨 소속사의 초창기 멤버였죠. 우리 집안이 태조 오빠네 집안과 좀 각별했거든요. 그래서 윤조 오빠가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린다기에 들어간 거예요. 어머니들끼리도 무척 친해서, 나중에 태조 오빠랑 나랑 결혼을 시키면 좋겠다, 뭐 이런 이야기도 종종 나오곤 했으니까.’
세경이 누군가의 머리털을 쥐어뜯듯 쿠션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런 말이 오갔으면 뭐 해. 결혼은 나랑 하는데.”
몇 마디 쏘아붙이긴 했지만, 속에 쌓인 울분은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 세경은 화풀이를 하듯 주먹으로 쿠션을 팡팡 내리쳤다.
아주 말끝마다 태조 오빠, 태조 오빠 하는 게 계속 귀에 거슬렸다. 태조와 제가 결혼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어머니들끼리 친하다느니 서로의 집안이 각별했다느니 하며 으스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게다가 그런 말을 제 앞에서 흘리는 저의야 뻔했다. 본인은 솔직한 자기 생각을 말한 것뿐이라지만 태조에게 관심이 있다는 거겠지.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소문으론 오여리 씨 집안이 대표님 집안이랑 잘 아는 사이라고도 하고. 아무튼 오여리 씨 성격이 아주 제멋대로라 당시 강 상무님이랑 진 대표님이 엄청 고생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 일 있고 난 뒤에…….’
세경은 송 실장의 말을 되뇌이다 오여리의 이름을 검색했다.
지난번엔 동명이인에 대한 정보만 뜨더니, 이번에 새로운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런지 오여리에 관한 몇 가지 정보가 더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오성물산의 막내딸, 금수저 집안, 오여리 차, 과거 오여리 연기력 논란 등등.
세경은 기사에 적힌 오여리의 과거 출연작들을 검색하며 그와 관련된 기사들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내용은 연기력 논란이나 촬영장 이탈 사건이 전부일 뿐, 송 실장이 말했던 폭력 사건과 관련된 기사는 찾을 수가 없었다.
“기사가 안 나가게 했다더니. 어? 잠깐, 폭력 사건?”
세경은 문득, 떠오른 장면 하나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언제였던가. 자고 있던 태조의 얼굴을 관찰하다 이마 쪽에 난 상처를 발견했었다. 태조에게 그 상처가 왜 났냐고 물었더니, 그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싸웠다기보다는 휘말렸었지. 질 나쁜 취객들 사이에 끼어 있다가 다쳤어. 이건 그때 난 상처고.’
‘어떻게 휘말리면 이렇게 상처가 남을 정도로 다쳐요?’
‘아는 사람이 그 술자리에 있었는데, 그걸 빼 온다고 나섰다가 이런 거야.’
그때 그는 술자리에 있던 사람을 빼 오다가 다쳤다고 했다.
그 사람이 누굴까 싶었는데. 회사에서 기사를 막아주면서까지 지켜주려 했던 게 오여리였던 걸까?
띠띠띠띠띠띠.
도어 록 비밀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세경의 고개가 미어캣처럼 휙 돌아갔다.
벌써 태조가 돌아올 시간이었나.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그를 마중하러 현관 앞으로 달려갔다.
“피디하고 미팅하고 온다며. 잘하고 왔어?”
현관에 들어선 태조가 저를 맞이하는 세경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네. 태조 씨 아직 저녁 안 먹었죠? 씻고 나와요. 같이 먹게.”
태조를 침실 안으로 들여보낸 세경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마 여사가 싸준 반찬들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채우고, 아까 만들어둔 된장찌개를 다시 데우고 있을 때 샤워를 마친 태조가 세경의 곁으로 다가왔다.
“앉아 있어. 나머지는 내가 할게.”
“다 했어요. 그보다 이거 맛 좀 봐봐요. 촬영할 때 음식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미리 끓여 본 건데.”
“와서 편하게 먹고 쉬고 가라고 한 거 아니었나?”
“아무리 그래도 베짱이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올 수는 없잖아요. 거기 고정 게스트가 한 명 빼고 다 나보다 선배예요. 게다가 이건 그렇게 손도 많이 안 가구요.”
세경이 수저로 국물을 떠 태조의 앞으로 내밀었다. 맛을 본 그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이건 내가 가져갈게.”
태조가 먼저 가 있으라며 세경의 등을 두드렸다. 그가 찌개를 던 그릇을 내려놓자, 세경이 그의 앞에 앉아 태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태조가 물을 마시며 묻자 세경이 뭔가 망설이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다 큼, 작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태조 오빠.”
“……쿨럭.”
반 박자 늦게 태조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사레에 걸린 그가 연거푸 기침을 쏟아내더니, 목이 빨개진 채로 세경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뭐야?”
“뭐가요?”
“방금 나 부른 거.”
“태조 씨요?”
“그거 말고.”
“…….”
“태조 오빠라고 했잖아.”
시치미 떼고 있는데 그냥 넘어가 주시지. 세경이 민망함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냥……. 한번 그렇게 불러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세경이 어설프게 변명했다. 차마 오여리가 그렇게 부르는 게 계속 귀에 맴돌아 저도 그랬다곤 할 수 없었다.
“한번? 이젠 그렇게 안 부르는 거야?”
“왜요? 태조 씨보다 태조 오빠라고 부르는 게 좋아요?”
“뒤에 게 좀 더 설레긴 하는데?”
“……”
“처음 듣는 거잖아.”
세경이 입술을 쫑긋거렸다. 그러다 핏줄이 살짝 선 태조의 목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부르다가 태조 씨 맨날 사레 걸려서 기침하면 어떡해요?”
“오늘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들어서 그런 거고.”
“음. 그래도 이건 좀 아껴둘래요. 설렌다고 하니까, 나중에 곤란한 부탁할 거 있으면 그때 필살기로 써먹어야지.”
젓가락을 든 세경이 밥알을 휘적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세경의 얼굴을 보며 태조가 물었다.
“혹시 미팅하면서 무슨 일 있었어?”
세경이 밥알을 우물거리며 눈을 굴렸다.
있긴 했죠. 원치 않게 오여리 씨를 만났고, 내가 태조 씨한테 한참 부족하다는 조롱도 좀 받았는데.
“…….”
하지만 그 모든 걸 태조에게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입에서 오여리의 이름을 듣는 건 더욱 싫었고.
“아니요. 별일 없었어요.”
다만,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건…….
“태조 씨.”
“응?”
세경의 부름에 태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 만나기 전에 결혼 이야기가 오갔던 사람 있었어요?”
“뭐?”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태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그런 이야기 오갔으면 내가 진작 결혼했겠지.”
“아…….”
그럼 그 말은 오여리가 꾸며낸 걸까?
“왜, 누가 또 이상한 말이라도 하고 다니는 거야? 부모님들 허락까지 받은 마당에, 갑자기 결혼 약속을 한 사람이라니.”
태조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세경이 손을 저어 부정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아까 연애 상담 프로그램에 나온 내용을 보고 내가 너무 몰입했나 봐요.”
변명을 한 세경이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밥맛이 없었는데.
“우리 이 쌀 더 주문해야겠어요. 밥이 달고 맛있는 거 같아.”
이제 보니 아주 꿀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