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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바로 너였어. (92/100)


92. 바로 너였어.
2023.06.17.



 
낮은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누군가 제 뺨을 쓰다듬는 느낌에 손을 더듬거리자,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아.”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에 태조의 얼굴이 잡혔다.


“언제……. 지금 몇 시…….”

잠결에 웅얼거린 세경이 졸린 눈을 비벼댔다. 태조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곤 세경의 뺨을 톡 건드렸다.


“여섯 시. 졸리면 더 자고.”

“아니에요. 지금도 많이 자서, 더 자면 밤에 못 자요.”

세경이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 마른 입술을 달싹거린 그녀는 조금 전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억하곤 태조에게 물었다.


“누가 여기 왔었어요? 다른 사람 말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우현이랑 석주도 같이 왔어.”

“정말요?”

고개를 든 세경이 태조가 턱짓하는 곳을 쳐다보았다. 소파에 앉은 석주가 세경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괜찮아?”

“네. 어떻게 세 사람이 같이 왔어요?”

“둘 다 네가 걱정된다고 해서. 석주는 오늘 별다른 일이 없어서 회사에 왔었고.”

“그랬구나.”

세경이 꿈지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태조가 옆에서 그녀를 부축했다.


“그보다 나 핸드폰 좀 줘요.”

“왜?”

“심심해서요. 다른 사람들한테 연락도 하고 싶고. 또…….”

“기사도 보고?”

속내를 들킨 세경이 좀 봐달라는 듯 배시시 웃었다.


“상황 돌아가는 건 대충 알고 있어요. 여기 티브이 채널 돌리면 연예 뉴스 정도는 볼 수 있거든요. 대신 댓글은 안 볼게요. 태조 씨한테 전화하려고 해도 핸드폰이 없으니까 답답하잖아.”

“…….”

세경의 부탁에도 태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팔을 쭉쭉 잡아당긴 세경이 태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줘요, 태조 오빠.”

“하.”

태조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호칭은 아껴두겠다더니, 이 앙큼한 고양이가 이럴 때 쓰고.


“지금 줘도 바로 쓰진 못해. 배터리 충전이 안 돼서.”

“충전기…….”

“조금 이따 사다 줄게.”

세경의 코를 살짝 꼬집은 태조가 걸음을 옮겼다. 그는 병실 구석에 있는 옷장에서 세경의 핸드폰을 꺼내왔다.

아, 저기 있는 줄 알았으면 한번 뒤져 보는 건데.


“장모님은?”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어요. 이틀 내내 소파에서 주무시는 게 안쓰러워서.”

“잘했어. 저녁은 어떻게 할래? 아까 자고 있어서 밥은 따로 받아 두긴 했는데.”

“방금 일어나서 생각은 없어요. 석주 선배랑 강 상무님은요?”

“우린 나중에 나가서 후루룩 먹고 오려고요.”

강 상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진태조의 입에서 장모님 소리가 나오는 게 신기하다면서.


“태조 씨, 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음? 뭔데.”

세경이 손에 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태조에게 말했다.


“혹시 오여리 씨한테 빚진 거 있어요?”

“빚?”

제가 들은 게 맞는지, 고개를 기울인 태조가 확인하듯 되물었다.


“무슨 빚? 돈을 말하는 건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세경도 확신을 하지 못해 말을 어물거렸다. 태조가 우현을 쳐다보자 그도 이상하다 여겼는지 어깨를 들썩거렸다.


“돈이 아니면 무슨 빚을 말하는 거예요? 뭐, 목숨 빚 같은 거?”

“확신은 못 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비슷하다고요? 설마. 태조가 누구에게 빚지는 성격은 아닌데. 근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나 물에 빠질 때요.”

세경이 잠시 말을 끊고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오여리 씨가 그런 말을 했거든요.”

우현이 태조를 힐끔거렸다. 사실 그때 일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세경의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아 누구 하나 먼저 나서 묻지 못한 터였다.


“저기, 세경 씨. 우리도 궁금하긴 했는데, 그날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소파에서 일어난 우현이 세경의 곁으로 다가왔다.


“…….”

세경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수영장의 차가운 물과 배를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이 떠오르자 그녀가 살짝 몸을 떨었다.


“말하기 힘들면 하지 말고.”

태조가 그런 세경의 손을 잡아 쥐었다.


“아뇨.”

깊게 숨을 내쉰 세경이 제 배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작은 울림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점심 먹고 나서 잠깐 그 주변을 걷고 있었어요. 다른 촬영팀도 식사를 하는 중인지 사림은 거의 없었고, 오여리 씨도 보이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날 지켜보고 있었는지 갑자기 나타나 제 앞을 가로막았어요.”

“…….”

“그 사람과 몇 마디 말이 오가고, 내가 오여리 씨를 피해 가려던 중에 손이 잡혔어요. 그러다 내가 이런 짓 해봤자 태조 씨는 관심도 없을 거라고, 어릴 때 친한 걸로 망상에 빠져 있는 거 같다고 하니까…….”

“하니까?”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 태조 씨가 자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했어요. 그건 평생이 가도 못 갚는 거라고.”

“흐음.”

턱을 긁적거린 우현이 목을 울렸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기억엔 그런 일은 없는데. 오여리가 태조에게 빚을 졌다면 모를까. 솔직히 그 망아지 사고 친 거 뒷수습하느라 뼈 빠지게 고생한 게 누군데.”

“평생 가도 못 갚는 빚이라면 누구 하나 목숨을 잃을 뻔한 정도는 돼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깊은 상처라도 있든가.”

석주의 말에 흥분한 우현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오여리 때문에 태조가 죽을 뻔한 적은 있어도 태조 때문에 오여리가 손해 본 일이 있겠냐고.”

“야, 강우현. 입.”

석주가 눈에 띄게 굳는 세경의 표정을 보며 우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죽을 뻔…….”

“우현이가 과장한 거야. 여기 머리 좀 찢어졌던 거.”

태조가 대수롭지 않게 상처가 있는 이마를 건드렸다. 세경은 괜한 불안감에 태조에게 잡힌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럼 그 전엔? 우린 오여리를 알게 된 게 회사에 들어왔을 때부터라지만, 너희 가족들과는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었다며.”

“친분이 있긴 해도 어머니들 사이가 유독 더 돈독했던 것뿐이지, 내가 친했던 건 아냐. 오히려 어릴 땐 여욱이랑 더 어울려 지냈지. 그 뒤엔 어머니가 데려와서 조금 돌봐줬던 게 전부고.”

“그땐 아무 일도 없었어?”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인데 무슨 일이 있었겠냐면서.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아, 오여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지? 그건 어쩌다…….”

똑똑.

노크 소리에 우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드륵,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자, 그의 얼굴이 똥이라도 밟은 양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미쳤네, 진짜. 여기가 어디라고…….”

우현이 저 뻔뻔함에 질렸다는 듯 경악스럽게 중얼거렸다. 태조는 몸을 돌려 세경의 앞을 막아섰다.


“윤세경 씨, 몸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요.”

백합으로 가득 찬 꽃다발을 든 여리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여리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세경의 몸을 훑어보았다.

위독하다며 떠들어댔던 언론과 달리 세경은 얼굴이 좀 창백한 걸 제외하면 멀쩡해 보였다. 이불 아래 봉긋하게 솟은 저 배도 여전했고.


“언론에선 유산이다 뭐다 떠들어대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봐요?”

“유감인가요? 본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유감이라뇨.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내가 일부러 윤세경 씨를 물에 빠트린 거라고.”

어깨를 으쓱거린 여리가 자신은 죄가 없다 항변했다. 세경은 기가 막혀 헛숨을 내쉬었다.


“일부러가 아니라고요? 그때 그렇게 웃고 있었으면서?”

“나는 세경 씨가 손을 놔달라고 해서 놔준 거밖에 없어요. 그래서 말했잖아요. 나 원망하지 말라고.”

“알고 있었잖아요. 그때 손을 놓으면 내가 물에 빠질 거라는…….”

“세경아.”

태조가 흥분한 세경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랫배가 살짝 당겨오는 느낌에 움찔한 세경이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여긴 왜 왔어? 누가 반긴다고.”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냐.”

쌀쌀맞은 태조의 태도에 여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녀도 아버지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면 여기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오랜만에 딸과 통화를 하면서, 오 사장은 살가운 인사 대신 그녀에게 화부터 냈다.

마 여사가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대체 넌 뭘 하고 다니기에 아비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거냐며. 그는 윤세경의 병실을 찾아가 그녀에게 잘못했다 싹싹 빌라고 하였다.

하지만 왜, 제가 그래야 하나? 태조는 제 엄마 덕에 목숨을 구했는데도, 제게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때…….”

세경의 입을 떼자 여리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한테 그랬죠? 태조 씨가 오여리 씨한테 빚이 있다고.”

“아아, 그거.”

세경의 말에 여리가 태조를 쳐다보았다.


“태조 오빠가 아무 말도 안 해요? 아니면 너무 어릴 때 일이라 다 잊어버린 건가?”

“무슨…….”

태조가 인상을 썼다. 오여리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탓이었다. 어릴 때 일이라 잊어버렸다니. 오여리가 기억하는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리가.


“태조 오빠가 지금껏 살아 있는 게 누구 덕인 줄 알아요?”

뜬금없는 말에 세경이 태조를 힐끗거렸다. 눈이 마주친 그는 오여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다 우리 엄마 덕분이에요. 안 그랬으면 태조 오빤 일찌감치 죽었을…….”

“그게, 무슨 소리니?”

나직한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들자 여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건지, 마 여사가 예령과 같이 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줌마.”

여리를 일별한 마 여사가 병실 안을 훑어보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세경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 태조. 그리고 강 상무와 석주에게 시선을 던진 그녀가 다시 여리를 바라보았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다. 왜 갑자기 여기서 선화 이야기가 나오는 거냐고.”

“…….”

“그리고 세경이를 저렇게 만든 이유도 설명해야 할 거 같은데.”

마 여사가 저를 추궁하자 여리가 흥,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뻔뻔한 여리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웃어? 넌 지금 내 말이 우습게 들리는…….”

“뭘 그렇게 화를 내세요? 윤세경 씨가 우리 엄마처럼 죽은 것도 아닌데.”

“뭐?”

당혹한 마 여사를 향해 여리가 피식 입술을 끌어올렸다.


 


“언제까지 제 앞에서 모르는 척하실 거예요?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 오히려 제가 아닌가요? 저도 다 알고 있어요. 우리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척이라니. 너 무슨 소릴…….”

“다들 실족사라 했지만, 아니잖아요. 정확히는 사고사였지. 그날 바다에 빠진 태조 오빠를 구하다 죽은 거잖아요. 바위에서 미끄러진 게 아니라! 그런데도 나한텐 그런 사실을 까맣게 숨기고 가증스럽게도 날 위하는 척…….”

“잠깐!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선화가 태조를 구하다 죽었다 이 말이니?”

여리의 말을 끊은 마 여사가 아들을 쳐다보았다. 제가 들은 말이 맞느냐는 그 눈빛에 태조가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한번 까닥거렸다.


“세상에, 이게 무슨…….”

마 여사가 기가 막힌 듯 이마를 짚었다.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이런 말을…….


“아닌 척하지 말아요. 다 알고 있으니까.”

여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모든 걸 다 아는 제 앞에서 저런 제스처를 취하는 게, 그저 저를 속이기 위한 연기처럼 보였다.


“아니. 그래. 네 말도 일부 맞기는 하지. 그런데…….”

“…….”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그게 뭐냐는 듯 여리가 한쪽 눈썹을 까닥거렸다.


“네 엄마가 사고로 죽은 건 맞아. 바다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를 한 건 맞는데. 그날 네 엄마가 구하려던 건 태조가 아니라…….”

마 여사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쉬더니 여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너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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