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기억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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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기억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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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기억의 오류
2023.06.21.
“그게 무슨…….”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모친이 자신을 구하다 죽다니. 애초에 그녀는 물에 빠진 일도 없었다.
“거짓말 말아요. 또 무슨 말로 날 속이려고.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해요. 태조 오빠가 병원에 있었던 거. 그리고 그날 바닷가에 있었던 것도!”
“그건 맞아. 태조는 병원에 있었고, 바다에 빠지기도 했지. 한데 너는 그때의 네 기억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있니?”
여리의 목이 느리게 들썩거렸다. 차분한 마 여사의 목소리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당시 네 나이가 고작해야 6살이었어. 그리고 그날 바다에 빠진 건 태조만 아니라 여리 너도 마찬가지였지.”
“하, 내가 바다에 빠졌다고? 나는 그런 적이 없어요. 내가 언제 바다에 빠졌다는 거야!”
꽃다발을 바닥에 던진 여리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자신의 기억이 마 여사의 말과 달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당연히 기억 못 하겠지. 넌 그렇게 바다에 빠지고 나서 일주일 동안 입원해 있었으니. 아마 태조를 봤다면 그때 잠깐 눈을 떠서 본 걸 거야. 태조도 하룻밤 입원해 있었거든.”
“…….”
“태조는 그때 별장지기였던 구 씨가 구했어. 열 때문인지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너는 그날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
“네 엄마가 널 구했다는 사실조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내가 어떻게 그런 걸 잊어. 어떻게…….”
엄마가 날 구했다는 걸 잊을 수가 있냐고!
“그리고 네가 입원해 있는 동안 우리는 선화의 장례식을 치렀지. 어린 네가 충격을 받을까 네겐 엄마가 널 구하다 죽었다고 말할 수 없으니 바위에서 미끄러져 죽은 걸로 하자고 했어.”
여리가 부릅뜬 눈으로 태조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 여사의 말에 부정하는 것 없이 고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마치 마 여사의 말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말도 안 돼. 지금 두 사람이 짜고 날 속이는 거죠? 저 여자가……. 윤세경이 다쳤다고 지금 날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어머니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으면.”
태조가 다가가자 흠칫한 여리가 뒷걸음질을 쳤다.
“여욱이나 오 사장님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여욱 오빠? 오빠는 왜…….”
“…….”
“설마 오빠도 알고 있다고?”
“여욱이가 왜 어릴 때 너를 그렇게 미워했는지 모르겠니?”
여리를 보는 마 여사의 눈빛이 측은해졌다.
“여욱이는 알고 있었거든. 선화가 너를 구하다 그렇게 된걸.”
여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릴 때 자신이 울면서 엄마를 찾으면, 여욱은 늘 제게 화를 냈었다.
그때 제게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않았는데.
설마, 그래서였을까. 자기 때문에 엄마가 죽은 거라 생각해서 나를 그토록 미워하고 외가로 떠나버린 건…….
달칵.
여리가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자, 마 여사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돌려놓은 탓에 신호음은 여리에게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거…….”
- 아, 마 여사님. 어쩐 일입니까?
연결음이 끊어지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익숙한 그 음성에 여리가 몸을 굳혔다.
“오 사장, 당신 딸한테 한 가지 확인해 줄 게 있어서 말이지.”
- 여리 말입니까? 그 녀석 지금 병원에 가 있지 않아요?
“여기 와 있어. 그보다 선화 말이야. 그날 바닷가에서 실족사한 게 아니라는 걸 여리가 알고 있던데.”
- 예? 여리가 그걸 알고 있다고요? 어떻게?
“누구에게 들었는지, 아니면 무슨 기억이 떠오른 건진 모르겠지만. 그때 선화가 누굴 구했는지 궁금해하는 거 같더라고. 내 말은 안 믿는 거 같으니, 오 사장이 직접 말해주지 않겠어?”
- 아이, 왜 그러십니까? 그때 여리 구하고 죽은 걸 알면 충격받는다고, 묻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야! 아니야아!”
악을 쓴 여리가 핸드폰을 세게 쳐냈다. 마 여사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바닥을 굴러 벽에 처박혔다.
“하아. 하아.”
흥분한 여리의 몸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마 여사에게 달려든 여리가 그녀의 재킷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다 거짓말이지! 아빠랑 짜고 날 궁지에 몰려고 이러는 거지!”
태조가 여리를 떼어내려고 하자, 마 여사가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여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럴 필요가 있니?”
“…….”
“난 그저 내 친구의 딸이었던 너를 잘 보살피고 싶었는데.”
마 여사는 제 옷을 잡고 있는 여리의 손을 떼어냈다. 툭, 여리의 손에 잡힌 브로치가 떨어져 나가며 뾰족한 핀 끝이 피부를 길게 긁고 내려갔다.
“너는 그것도 모르고 내 아들도 모자라 며느리, 그리고 손주까지도 위험하게 만들었구나.”
여리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병실은 순식간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똑똑.
그때 얼어붙은 공기를 깨며 노크를 한 남자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서울 중부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오여리 씨가 있다는 연락을 받아서요.”
“나를 왜…….”
건장한 체격을 가진 형사 한 명이 오여리를 쳐다보았다. 주먹을 쥔 여리의 손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형사는 난장판이 된 병실을 둘러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여리 씨, 윤세경 씨 폭행 사건으로 조사가 필요하니,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
바닥에 떨어진 꽃다발이 엉망으로 짓이겨졌다. 오여리가 형사들에게 끌려갈 때 저항하다 밟힌 흔적이었다.
“많이 놀랐겠구나.”
강 상무와 석주가 엉망이 된 병실을 치우는 동안 마 여사는 지친 얼굴로 세경의 옆에 앉았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세경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오여리의 등장에 놀란 것과는 별개로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게 돼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러니까 오여리는 여태껏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게 태조의 탓이라 여겼던 건가. 그래서 그가 제게 큰 빚이 있다 했던 거고?
“미안하다. 괜히 우리 일로 네가 피해를 봤네. 태조가 다쳤을 때만 해도 왜 저 아이가 제 잘못은 없다며 당당한가 했는데. 제 엄마 덕분에 태조가 살았다고 생각해서 그랬나 봐.”
“여리 씨, 어머니하고 많이 친하셨어요?”
“친했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어. 그래서 그 친구가 죽었을 때 더 충격이었단다.”
마 여사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차갑게 젖어버린 몸과 파리해진 입술. 생기가 빠져나가 딱딱해지는 몸의 감촉 같은 것들을.
그날 낮잠을 자고 있던 여리가 중간에 깨어나 몰래 바깥으로 빠져나가자, 놀란 선화는 딸을 찾으려 마을을 몇 바퀴나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거친 파도가 치는 해안가에 작은 여자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다급히 바닷가로 향했다.
여리를 찾았다는 것에 안도한 것도 잠시. 집채만 한 파도가 아이를 집어삼키자, 선화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마 여사도 태조가 휩쓸린 걸 알고 바다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녀를 말린 건 뒤따라온 별장 관리인 구 씨였다.
‘사모님, 이런 날 바다에 들어가시면 죽어요!’
‘하지만 아들이……. 태조가 파도에 휩쓸려 갔다고!’
‘태조 군 수영할 수 있죠? 저긴 제가 들어갈 테니, 사모님은 119에 전화부터 하세요. 예?’
구 씨의 말에 마 여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119에 연락을 하고 바다에 빠진 이들이 무사히 나오길 기도했다.
하나,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마지막으로 구조된 선화는 영영 눈을 뜨지 못했다.
“차마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서. 네게 다 말해주진 못하겠구나.”
“어머니.”
애써 웃고 있었지만, 마 여사는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제 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또 이런 일을 겪어서 어쩌나. 병실을 다른 데로 옮겨 달라고 할까?”
“아뇨. 괜찮아요.”
세경이 고개를 저었다. 마 여사는 세경의 손을 잡고 한참을 다독거렸다.
“너랑 아이 다치게 한 건 그냥 넘기지 않을게.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내가 정에 못 이겨 냉정해지지 못했구나.”
마 여사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세경은 그런 마 여사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를 얻은 오여리 씨가 이틀 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왔다는 소식입니다.
모 호텔 수영장에서 촬영 중 윤세경 씨를 수영장에 일부러 빠트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 부정하던 오여리 씨의 주장과 달리 당시 영상이 공개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리포터의 멘트가 끝나고 영상 하나가 흘러나왔다. 세경이 오여리와 수영장에서 대치하고 있던 그 당시의 동영상이었다.
[이게 그때의 영상인데요. 잘 보시면 영상 속에서 오여리 씨가 윤세경 씨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윤세경 씨의 몸이 수영장으로 향하자 그대로 손을 놓아버리는데요.
그 뒤에 휘청거리는 윤세경 씨의 다리를 발로 차더니, 물에 빠지는 윤세경 씨를 보고 오여리 씨가 웃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영상은 당시 촬영팀 카메라에 찍힌 것으로…….]
화면이 바뀌며 경찰서에서 나오는 오여리의 모습이 보였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무장한 그녀는 몰려드는 기자들을 피해 검은색 세단에 올라타고 있었다.
“결국은 다 밝혀질 거, 왜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문병을 온 문 과장이 뉴스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곤 세경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괜찮아요? 저 영상 저렇게 나가는 거.”
영상의 출처는 다른 촬영팀에서 나온 거였다. 당시 촬영장을 지키고 있던 막내 스태프가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걸 보고 카메라 녹화 버튼을 몰래 눌러놓았다고 했다.
“어쩔 수 없죠. 오여리 씨가 계속 자기는 안 했다고 부정하니까. 저거보다 확실한 증거도 없고.”
영상이 퍼지자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오여리가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부정한 탓도 있었지만, 임신한 세경을 물에 빠트려 놓고 웃고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디 그뿐일까. 과거의 일이 재조명되면서 오여리의 불성실한 태도와 과거 술집에서 있었던 폭력 사건이 도마에 올랐다.
당시 태조에게 상처를 입혔던 남자가, 자신은 오여리에게 맞았다며 그녀를 고소했는데 그 일로 경찰서가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오여리 씨 쪽 사람이 와서 합의해 달라고 했다던데, 맞아요?”
세경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여리가 찾아온 다음 날, 오 사장의 비서와 유명 로펌의 변호사가 같이 찾아왔었다.
여리를 용서해달라며 합의서를 써달라 했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없어 태조에게 과하게 집착한 나머지 벌어진 일이었다고.
하지만 태조는 세경에게 내미는 합의서를 눈앞에서 찢어버리곤 저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경찰서엔 세경의 진단서를 제출해 여리의 혐의를 단순 폭행이 아닌 폭행 치사상죄로 정정하게 하였다.
“진짜 세경 씨랑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내가 정말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눈앞이 아찔해서.”
당시 일을 떠올린 문 과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 또한 그 일로 경찰서에 참고인 조사 겸 왔다 갔다 했다고 들었다.
“참, 이거 받아요. 세경 씨가 갖고 싶다고 해서.”
문 과장이 쇼핑백에서 액자 두 개를 꺼냈다. 거기엔 이번에 찍은 세경의 만삭 화보 사진이 담겨 있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네. 잡지에 못 싣는 건 아쉽지만요. 진짜 예쁘게 나왔는데.”
문 과장이 아쉬운 듯 눈가를 축 늘어트렸다.
그럼 찍어둔 사진이라도 싣는 건 어떻겠냐 물었지만, 문 과장은 그러다 오히려 자기들이 비난을 받을 수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사진도 줬겠다. 세경 씨도 쉬어야 하니까 이만 가볼게요.”
“바쁠 텐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마워요.”
“당연히 와야죠. 오히려 늦게 와서 이쪽이 미안한걸. 그래도 세경 씨 상태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몸조리 잘하고, 예쁜 아기 낳고 나서 다시 한번 우리랑 작업해요.”
문 과장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세경도 침대에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까지 나가려 했지만 더 나오지 말라는 문 과장의 말에 세경은 문 앞에서 그녀를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세경은 아랫배를 감싸듯 끌어안고 병실 안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얼마간 있었을까.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고 있어?”
“계속 침대에 있으니 답답해서요.”
태조가 안으로 들어오자 옅게 웃은 세경이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 전 문 과장에게 받은 액자를 들고 태조에게 다가갔다.
“이거 봐요. 좀 전에 문 과장님이 와서 주셨어요. 나 그날 만삭 화보 찍은 거.”
“…….”
사진을 내려다보는 태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 혹시 그날 일이 떠오른 걸까?
생각해보니 자신의 몸은 돌봐도 태조까지 신경을 쓰진 못했다. 그도 피를 흘리는 자신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텐데.
“당신도 많이 놀랐죠?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우리 앙꼬 건강하게 잘 태어날 거니까.”
태조와 마주 선 세경이 그의 손을 잡고 제 배 위에 올려놓았다.
“느껴지죠? 우리 애가 열심히 발 구르는 거.”
세경의 말대로 동동 뛰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치 제가 건강히 잘 있다는 걸 알려주듯이.
“그러게.”
희미하게 웃은 태조가 세경의 몸을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안도한 태조의 숨결이 내려앉았다.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꿈속에서 본 아기 호랑이를 떠올리며 세경이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