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외전 (1) - 아기공룡 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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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외전 (1) - 아기공룡 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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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외전 (1) - 아기공룡 규규
2023.07.05.
경쾌한 노래 사이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빠르게 섞여들었다.
나른한 오후의 햇볕이 쏟아지는 청담동의 한 스튜디오 안.
문 과장은 모니터에 뜬 사진을 보며 감탄을 쏟아냈다.
“오오.”
근 2년 만에 함께하는 화보 촬영이었다. 요 몇 년 새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서 그런가. 세경은 전보다 한층 더 성숙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너무 좋다. 2년 공백이 무색할 정돈데요?”
문 과장이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세경이 복귀할 거란 소식을 듣고 소속사에 연락해 제일 먼저 화보 촬영을 제안한 건 문 과장이었다.
그리고 세경은 그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래요? 화보 촬영은 오랜만이라 많이 어색한 거 같은데.”
예전이야 찍히는 게 익숙했다지만, 지금은 찍는 게 더 익숙했다.
세경이 머쓱하게 웃자 문 과장이 와서 보라며 세경에게 손짓했다.
“봐요. 요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뭘 써야 할지 고민해야겠는걸.”
문 과장이 사진을 몇 장 골라 보여주었다. 옆에서 같이 모니터하던 포토그래퍼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게. 전보다 표정이나 포즈가 더 편안해졌어.”
“예전에는 불편해 보였나요?”
“아이, 그건 아니고. 음, 뭐랄까. 예전엔 이런 포즈를 취해야지 하면서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면 지금은 그런 거 없이 자연스럽다는 거지.”
변명을 한 포토그래퍼가 영상 촬영 준비를 해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문 과장은 도망치는 포토그래퍼를 보며 피식 웃었다.
“결혼 생활이 좋긴 한가 봐요? 하긴 요즘 한창 달달하니 깨 볶을 신혼이잖아. SNS에 올라온 아이 사진도 보니 너무 귀엽던데.”
“귀엽죠. 음, 다만 요즘 걷기 시작해서 행동반경이 넓어진 게 좀 곤란하달까.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세경이 심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통통한 궁둥이를 씰룩이며 걷는 게 귀엽고 경이롭긴 한데, 잠깐 눈만 떼면 저 멀리 가 있으니 세경은 시시때때로 심장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었다.
저번엔 식탁에 이마도 꿍, 하고 박아서 엄청 울기도 했고.
“아직 아이가 어린데. 그래도 세경 씨 복귀는 상당히 빠른 편이네요? 아, 세팅 마쳤나 보다. 세경 씨 우리가 준 질문지 받았죠? 인터뷰는 영상으로 딸 거라. 대답도 잘 생각해 두고.”
“바로 여기서 찍어요?”
“응. 저기 앉아서 찍을 거예요. 내가 질문하면 세경 씨가 바로 대답하면 되고. 어떻게, 시간 좀 더 줄까요?”
“질문지 한 번만 더 볼게요.”
세경이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훈이 아까 받은 질문지를 건네주었다.
“여기요, 누나.”
“고마워.”
싱긋 웃은 세경이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답변 내용을 다시 한번 복기한 세경이 이제 준비됐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작할까요?”
세경이 흰 배경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간단히 인사를 한 그녀는 문 과장의 질문에 하나씩 답을 했다.
“얼마 전 SNS에 세경 씨 아이의 사진이 올라왔어요. 이름이 규원이라고 했죠? 이제 두 살 됐나요?”
“네. 이제 두 살이 됐고, 요즘 한창 걸음마를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얼마나 잘 돌아다니는지 몰라요.”
“아이가 아직 어려서, 사실 세경 씨가 몇 년 더 육아를 하고 복귀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분이 같이 육아를 해주고 있어서 그런 건가요?”
“남편도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사실 시댁에서 많이 봐주고 계세요. 제게 먼저 활동을 하라 권하신 것도 저희 시어머니시구요.”
오늘은 태조가 규원을 데리고 있지만, 세경이 촬영이 있을 때면 마 여사가 자주 규원을 돌봐주고 있었다.
원한다면 아이를 봐줄 테니 연예계 활동에 복귀하라며 세경의 등을 먼저 밀어준 것도 마 여사였다.
“와, 세경 씨 시댁 식구들이랑 같이 패션쇼에 참석한 것도 보긴 했는데. 정말 사이가 좋은가 봐요?”
문 과장이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결혼식이 있고 석 달 뒤였나. 사진 하나가 찍히긴 했었다. 마 여사를 가운데 두고 예령과 세경이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으로 명품 브랜드 패션쇼 참석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찍히고 나서도 말이 참 많았었다.
어떻게 시댁 식구들과 저렇게 다정히 있을 수 있느냐며 다들 사진이 찍히는 걸 알고 연출한 거라고 했다. 물론 마 여사는 신경 쓰지 말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네. 가족들 모두 다 잘 챙겨주세요.”
“그럼 마지막 질문 하나 더 드릴게요. 요즘 세경 씨의 최대 관심사는 뭔가요? 최근 들어간 드라마 촬영?”
“그거야 물론…….”
문 과장의 질문에 세경이 웃었다. 요즘 그녀의 최대 관심사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귀여운 아들이죠.”
***
뽁뽁뽁뽁.
공룡 옷을 입은 아이 하나가 복도를 활보했다. 허공으로 솟은 두툼한 꼬리는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크흡.”
그런 규원의 뒤를 따라가던 우현이 입을 틀어막았다. 오리처럼 불룩 튀어나온 궁둥이가 발맘거리는 걸음을 따라 씰룩거리는 게 저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귀여움에 홀딱 빠진 건 우현만이 아니었다.
“꺅. 귀여워. 규원아, 여기 좀 봐.”
규원을 알아본 진 엔터 직원들이 소리를 질렀다.
제 이름이 들리자 걸음을 멈춘 아이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곤 저를 보는 이모들을 향해 짤따란 손을 붕붕 흔들었다.
뽁뽁뽁.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아기 공룡의 발걸음을 따라 귀여운 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러다 우뚝 멈춰선 규원이 옷 앞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조가 뭐라도 넣어줬나 싶어 그가 고개를 쭉 빼고 있을 때였다.
뒤를 휙 돌아본 규원이 우현을 빤히 쳐다보고는 헤, 하고 웃었다.
“어흑.”
우현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방긋 웃는 미소가 가히 살인적이었다.
진태조 판박이 얼굴에 저런 귀여운 미소라니!
우현은 규원의 주위를 뱅뱅 돌며 사진을 찍는 데 열중했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조가 주접스러운 친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진규원.”
“우웅?”
태조의 목소리에 규원이 고개를 돌렸다. 아빠를 발견한 규원이 꼬리를 흔들며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어? 이사님?”
엉거주춤한 자세로 규원의 뒤를 쫓아다니던 우현이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복도 끝 비상구 쪽 문이 열리며 잘생긴 사내 여섯 명이 우르르 나타나고 있었다.
진 엔터의 레이블인 J-list의 소속 가수들이었다.
“응? 너네들은 여기 왜 왔냐?”
카메라는 여전히 규원에게 고정한 채 우현이 물었다. 사내들은 우현이 찍고 있는 깜찍한 아이를 쳐다보았다.
“저희는 너튜브에 올릴 영상 찍느라. 근데 저 아이는…….”
사내들이 공룡 옷을 입은 규원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누구는 카메라를 저쪽으로 돌리라며 난리를 치는 참. 그 와중에 규원은 난데없이 쳐들어온 키 큰 삼촌들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죠? 윤세경 선배님하고 대표님의…….”
규원에 대해 아는 척을 하던 한 사내가 태조를 발견하고 몸을 바짝 세웠다. 그가 옆에서 떠들어대는 동료의 허리를 팔꿈치로 치며 태조를 눈짓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여섯 남자들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자 그 소리에 겁을 먹은 듯 규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에…….”
규원이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당황한 사내들이 아이를 달래려 몸을 낮췄다.
“아, 우리가 시끄러웠어? 미안. 울지 말고.”
잘생긴 사내들이 주변을 둘러쌌지만 규원의 삐죽거린 입술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울멍거리는 얼굴엔 눈물이 슬슬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태조가 그런 아들을 달래려 막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신 매니저와 이야기하는 세경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어마마마마마.”
귀를 쫑긋거린 규원이 세경에게 달려가려 했다. 태조가 그런 규원을 쫓아가다 앞으로 기우뚱거리는 아들의 몸을 달랑 들어 안았다.
“어머나, 우리 규원이. 아기 공룡이 됐네?”
세경이 태조의 품에 안긴 규원의 볼을 콕콕 눌러주었다. 엄마의 목소리에 마음이 안정이 된 건지,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그새 쏙 들어가 있었다.
“요 귀여운 공룡 옷은 누가 줬을까?”
“규규!”
“규규? 아, 규원이 공룡 이름이 규규야?”
엄마 말을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그냥 엄마를 봐서 기분이 좋은 건지. 규원이 저를 보며 방긋 웃자 세경이 태조에게 안겨 있던 아들을 품에 안았다.
“촬영은 다 끝난 거야?”
“네. 별일 없었죠?”
“뭐. 이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회사를 돌아다닌 것만 빼면.”
태조가 폭신한 꼬리를 잡고 흔들자, 세경이 말랑한 아들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근데 규원인 왜 울려고 했던 거예요? 나 보고 싶어서?”
“그건 아니고.”
태조가 뒤쪽을 눈짓하자 세경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긴장한 사내들이 몸을 바짝 세우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지 알아?”
“알아요. 우리 회사 소속 가수잖아요. 요즘 해외에서도 핫한.”
꾸벅 고개를 숙이는 후배들을 향해 세경이 눈인사를 했다. 그러곤 살짝 젖어 있는 아들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게 다야?”
“그럼요? 내가 뭐 모르는 게 있어요?”
세경이 의아한 눈을 했다. 같은 건물을 쓴다곤 해도 레이블이 다르고 활동 영역도 다르다 보니 저들과 마주친 건 오다가다 두세 번 정도가 다였다.
“규원이 가졌을 때, 저 녀석들 사진 달라고 했잖아. 저 얼굴 보고 태교하고 싶다고.”
“아.”
그게 저 친구들이었나? 아니, 근데 이 남자는 왜 지금껏 그걸 기억하고…….
“뭐예요. 당신. 여태껏 그거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누가 그렇댔나? 혹시 기억하고 있나 싶어 물어본 거지.”
“자기 얼굴 보고 태교하라면서.”
픽 웃은 세경이 규원의 뺨을 엄지와 검지로 꾹꾹 눌렀다.
“그래서 규원이가 자기랑 붕어빵이잖아요.”
“꺄아앙.”
뭐가 좋은지 규원이 손을 파닥거리며 웃었다. 그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제훈이 흠, 헛기침을 했다.
“누나, 저 뒤에 있는데.”
목소리를 낮췄다 해도 바로 뒤에 있는 제훈에겐 두 사람의 대화가 다 들렸다.
세경이 민망한 듯 웃으며 돌아보자, 제훈이 앞선 대화를 모른 척하며 규원과 눈을 맞췄다.
“안녕, 규원아.”
“규원아, 제훈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사쪼오오오!”
제훈을 자주 봐서 그런지, 규원이 반가움에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우현은 그런 규원을 보며 짐짓 서운한 투로 말했다.
“이 녀석. 나 볼 땐 저렇게 반갑다고 소리도 안 지르더니.”
“그래도 규원이가 강 상무님 보면서 방긋 웃잖아요. 규원이가 낯은 안 가리지만, 그래도 친하지 않은 사람한텐 웃어주지도 않아요.”
“그래?”
우현이 통통한 규원의 팔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말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마치 그렇다는 듯 규원이 우현을 보며 헤, 웃었다.
“규원이 지금 입은 옷 강 상무님이 준 건데.”
“우웅?”
“삼촌 감사합니다. 했어요?”
“……떠여?”
세경의 말을 따라하듯 규원이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우현이 어설픈 규원의 말투에 웃음을 터트렸다.
“요 녀석, 언제 자라 삼촌, 삼촌 하려나. 아, 세경 씨도 왔으니 태조 넌 바로 퇴근할 거냐?”
“아니. 좀 처리할 일이 남아서. 당신은 어떻게 할래? 규원이랑 먼저 집에 가 있을래?”
“오래 걸릴 거 같아요?”
“한두 시간 정도?”
태조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세경은 규원을 추슬러 안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가요. 우리 있는 게 방해되는 거 아니면. 아니면 나 규원이랑 여기서 놀고 있을 테니까.”
“그럴 리가. 같이 있다가. 규원인 이리 주고.”
한 손으로 규원을 안아 든 태조가 벽에 붙어 있는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수고해요.”
직원들에게 인사를 한 태조가 세경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
토닥토닥.
태조의 사무실로 들어온 세경이 잠이 든 규원의 등을 도닥거렸다.
태조가 일을 하는 동안 다시 회사 사무실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녔더니 좀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규원인 자?”
규원이 깰까 세경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태조는 노트북을 끄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꿈에서 맛난 거라도 먹고 있는지 규원의 작은 입이 쉴 새 없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지금 안으면 바로 깨려나?”
“좀 칭얼거릴 거예요. 참, 예령 언니 생일 다가오는 거 당신도 알고 있죠?”
“응. 그날 형이 형수님이랑 따로 시간을 보낼 거 같던데.”
“우리도 선물 하나 준비해야죠. 안 그래도 나 예령 언니랑 곧 만나기로 해서.”
“뭐 생각해 둔 거 있어?”
“하나 있긴 한데…….”
세경이 잠시 눈을 굴리다 태조에게 물었다.
“아주버님, 그날 레스토랑만 예약 잡으신 거죠?”
“그렇지 않을까? 왜? 무슨 선물을 주려고.”
“그냥 작은 바람을 담은 선물이랄까…….”
태조의 물음에 세경은 규원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남편을 보며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