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니키엘은 오후 운동 후 왕궁의 서고로 향했다.
폴은 목욕 후 니키엘이 머리도 안 말린 채로 나가는 걸 끔찍하게 여겼지만, 그가 잠시 연꽃 향유를 가지러 갔을 때 니키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도주했다.
“왜 이렇게 꽃 기름을 뿌려 대는 거야. 염병, 벌 꼬이겠네.”
오전, 오후로 나눠서 운동하는 데다가 오시니스를 뜨겁게 달굴 불의 계절이 코앞인지라 요즘 같은 때에는 운동 후 등목이라도 하지 않으면 꼴이 금세 수도 밖 부랑자 꼴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꼬박꼬박 목욕을 하고 나면 꼭 따라와 향유를 바르라니 단장을 하라느니 수시로 귀찮게 굴고는 했다.
꽃단장도 한두 번이지, 온갖 관리를 곁들인 목욕에만 반나절을 다 쓰고 나면 운동보다 훨씬 더 체력을 요하는 것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니키엘은 그렇게 때 밀기 싫다며 목욕탕에서 도망친 초등학생처럼 냅다 왕자궁을 벗어났다.
그리고 향한 곳이 본궁이었다.
‘마물에 관한 책도 좀 보고 관련 논문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여기는 대학도 없지.’
그러면 오시니스들의 학자들은 어디서부터 육성되는 건가 궁금해졌다. 폴에게 물어보면 좋겠지만 지금 도로 돌아가 그에게 질문하는 즉시 붙잡혀 온갖 향기 나는 것들을 갈아 만든 특제 화장품으로 얼굴과 몸을 마사지할 것이 뻔했다.
‘여기 이 기미 좀 보세욧! 이 백옥 같은 피부에 대체 무슨 무도한 짓을 하고 계신 겁니까!’
그것은 노화의 현상 중 하나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기에 폴의 기세가 사나웠다. 그럴 때는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불쌍한 척하는 것이 잔소리에서 빠져나오기가 쉬웠다.
‘…지금 괜히 불쌍한 척하시는 거죠.’
몇 번 시도하다 보니 그대로 들켜 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잔소리가 내리는 폭우처럼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 폴에게 묻는 일은 요원한 것 같았다.
나중에라도 꼭 물어봐야겠다는 생각 하며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걸을 때였다.
“대공 전하!”
누군가 다른 이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니키엘은 재빨리 원통 기둥 뒤로 숨었다.
굳이 숨을 필요는 없었지만, 괜히 누군가와 마주쳐 인사를 하고 어디 가는 길이냐 묻고 또 대답하고 날씨 얘기를 꺼내며, ‘귀댁 가정에 평화가 있길 바라오.’ 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몹시 짜증 났다.
‘애초에 궁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닭장 같은 집으로 돌아가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던 현대 사회를 사랑하던 니키엘에게는 다소 귀찮은 대화 형식이었다.
기둥 뒤에 숨어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던 니키엘은 곧 그 목소리가 부른 이가 율란 발트 대공이라는 걸 깨달았다.
‘안 덥나. 검은 옷만 입고 다니네.’
율란은 검은색 망토를 두른 채 검은색 비단으로 만든 왕국군 간부 장교의 옷을 입고 있었다.
견사 비단의 광택이 탄탄한 허벅지를 감싸고 있었다. 딱 봐도 알 수 있는 근육량에 니키엘은 작게 놀랐다.
골격이 장대하여 그냥 서 있을 뿐인데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북부의 늑대라고 불리는 대공다웠다.
망토를 두른 너른 어깨가 직각으로 떨어졌다. 쇄골이 무척 길 것 같은 생김새였다. 니키엘은 그의 신체적 우월함이 부러워졌다. 왕국군 정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사사롭게는 대공이나 그의 직위가 군사 총독이니 입궁 시에는 왕국군의 정복을 입는 듯했다. 지난번에 니키엘을 만났을 때는 저런 옷을 입지 않았으니, 왕을 알현했다는 뜻이었다.
니키엘은 일국 왕자로서의 체면은 생각도 하지 않고 기둥 뒤에 숨어 계속 그들을 지켜보았다.
“전하, 산림청 부장은 만나 보셨습니까. 토벌 대회로 여쭐 것이 있다고 하던데.”
“가는 중이오.”
율란의 말투는 이곳 말이 자동으로 한국어로 번역한 상태로 들리는 니키엘에게도 몹시 이질적이게 들렸다.
사극에서 쓰는 말투인 것은 수도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보다 어조가 무척 딱딱했다. 당시의 니키엘은 그것이 오시니스 왕국의 북부 지방 말투라는 것을 몰랐다.
오시니스 왕국은 말이 왕국이지 제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서라살 해협으로 갈라지는 동대륙과 서대륙 중 오시니스 왕국은 명실상부한 서대륙의 지배자였다.
서대륙에는 자잘한 왕국들이 많지만 오시니스 왕들은 딱히 정복 전쟁을 벌여 칭제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서대륙 절반의 영토를 갖고 있어 그 이상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잦은 반란의 소지가 될 것이라 여겼다.
주변 왕국에서도 그런 오시니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아우의 나라를 자처했다.
오시니스는 그들의 그런 성의를 높이 사 적당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수틀리면 전쟁 준비를 한다는 기색을 흘려 주변국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전쟁 없이도 제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양아치적 외교를 펼쳤다는 말이다.
그만큼 오시니스의 영토는 크나컸다. 그러니 북부인 이테렌에 거점을 두고 있는 대공 율란 발트의 말투가 수도인 라시리스와 차이가 지는 것도 당연한 얘기였다.
“산림청 부장이 하는 말로는 올해 마물의 수가 급증하였다던데….”
니키엘이 그의 말투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사이, 율란의 앞에 있던 볏짚색 머리의 빼빼 마른 데다가 옹졸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쟤가 누구더라.’
기억 상실에 걸린 척하며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아는 귀족 얼굴이 많지 않았다. 폴이 초상화를 구해 와 몇몇의 얼굴을 익혀 두기는 했지만 풀HD 화소로 표현되는 사진의 세계에서 온 니키엘에게는 초상화가 익숙하지 않았다.
다 그놈이 그놈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궁내부 장관이었던가.’
그럼에도 대충 기억이 난 이유는 율란 앞의 남자가 그냥 흐릿한 인상의 추남이 아닌 뚜렷한 인상의 추남이었기 때문이다.
추남도 인상이 흐린 놈들이 있는 반면, 궁내부 장관의 얼굴은 다양하게 못생긴 형태였다.
‘기억할 만한 생김이었지….’
이곳으로 와 본 남자들의 생김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니키엘은 오시니스가 미남 생산국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율란이나 레이먼은 물론이고 부왕도 소싯적에는 헌헌장부라는 평을 들었을 것 같은 생김인데다가 하다못해 폴마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흐릿한 청동 거울 속 자신의 외모는 또 어떠하고. 니키엘은 이 얼굴로 현대에 태어났다면 셀러브리티로 수십억을 벌어 한남동 고급 빌라에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궁내 주요 요직들이나 대귀족들의 초상화를 본 순간 니키엘은 오시니스 역시 평범한 사람 사는 곳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그들이 각양각색으로 못생겼기 때문이다.
니키엘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율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수가 급증했는데 뭐.”
니키엘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지는 딱딱하긴 해도 정중한 말투로 말하고 있던 율란이 마치 부하 군인을 대하듯 무람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대답한 것이다.
율란은 날카로운 송곳으로 조금씩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생김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산맥처럼 우뚝 선 콧대와 눈썹뼈 밑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금안이 번쩍였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육식 짐승의 눈빛과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하게 했다.
그 눈빛에 궁내부 장관 역시 당황스러운 건 똑같았는지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볏짚색의 콧수염이 휘날리도록 콧김을 뿜더니 율란을 향해 말했다.
“대공 전하, 이 무슨 무례이십니까. 아무리 전하라 한들 법도가 지엄한 왕궁에서 오시니스의 궁내부 장관인 이 디고리 체필린에게….”
“말을 하다 마니까 귀공이 나이를 못 이기고 잠깐 주신을 뵈러 갔다 왔나 궁금해서 그랬는데.”
여전히 반말이었다. 디고리 체필린이라는 남자는 혈압이 오르는지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뒷덜미를 짚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율란은 웃지도 않고 지나쳤다.
“북부에 대해 자꾸 물으면 우리 사정에 관심이 있는 걸로 착각하게 되오. 그렇게 되면 왕께 그대의 사병을 북부로 파견해 주십사 친히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겠지. 귀공이 원하는 게 그런 걸까?”
그래서 사람 가는 길을 자꾸 막냐, 이 말이야.
율란의 뒷말은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체필린의 얼굴이 금세 새하얘졌다. 안 그래도 시체처럼 하얗던 남자의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가셔 버리자 더욱 처참한 몰골이 되었다.
무심한 표정의 남자는 그런 체필린을 두고 그대로 반대편 복도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체필린은 소드마스터인 그가 행여나 제 말을 들을까 봐 복화술로 욕을 하며 발을 쾅쾅 구르는 시늉을 하다가 엄지를 하늘로 추켜들기도 했다.
‘엄지 드는 것도 욕이랬는데. 뭐랬더라…. 네 애비를 내 노예로 부려 가장 먼저 요강 세척부터 시킬 것이다, 였던가….’
니키엘은 체필린이 한동안 판토마임 같은 욕을 허공에 쏟아 내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에게서 천천히 등을 돌려 본궁 장서관으로 향했다.
장서관에는 방문객이 적은지 복도를 걷는 내내 사람을 마주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은 오시니스 사람들이 중요시 여기는 오후 간식 시간이었다.
오시니스의 사람들은 오후 네 시만 되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간식 먹는 것을 좋아했다.
간식을 먹지 않으면 장차 자식에게 대접받지 못한다나. 그냥 간식 먹기 위해 하는 핑계로만 보였다.
물론 니키엘은 그 시간에 삶은 달걀 두 알을 먹어 단백질을 보충했다.
‘벌크업 세게 할 것도 아닌데 다당류는 섭취할 수 없지.’
단것을 먹어 살을 찌운 다음 근육을 벌크업 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니키엘의 주목적은 건강이니 부러 당이 많은 것을 섭취하여 혈당치를 올리는 일은 하지 않아야 했다.
지금도 가끔 넘치는 신성력 때문에 피를 왈칵 토하는 니키엘로서는 다당류 섭취보다는 철분의 섭취가 중요했다.
‘이 나라는 소의 간은 먹지 않나 보던데. 하긴, 중세 시대와 다름없으니 기생충 위험도 크고….’
그런 생각을 하며 서고의 문에 다다랐다. 장서관 문 앞에는 경비병도 없었다.
‘안에 사서가 지키고 있나? 왜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어.’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육중하게 생긴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손을 뻗었다. 문은 니키엘의 세 배만 한 데다가 떡갈나무 재질로 무척이나 무거웠다.
쉽게 열리는 문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 해 왔던 근력 운동 때문에 어찌저찌 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문을 당기려고 힘을 주었을 때였다.
쾅, 소리가 나며 누군가의 커다란 손바닥이 문을 밀어 닫은 것이다. 니키엘은 약간은 의아하게, 크게는 빡이 친 상태로 손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