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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7)화 (17/130)

17화

‘어떤 놈이 왕자님께서 다 열어 둔 문을 닫았냐.’

니키엘은 자신의 지위가 왕자임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사람처럼 사고했다. 때문에 그는 약간 빡이 친 상태였다.

감히 왕자님, 그러니까 바로 이 몸께서 열려고 한 문을 닫아 버려? 불경죄로 벌을 주리라 마음먹고 그 상판을 보려는데 손의 주인은 니키엘보다 꽤 위에 있었다.

니키엘 역시 키가 큰 편인데 시선이 이렇게 위에 있다는 것은 상대의 신장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와서 그렇게 키가 큰 사람은 단둘밖에 보지 못했다. 하나는 다신 니키엘과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가 버린 레이먼과 다른 하나는….

“엿듣는 게 취미야? 취미가 참 고상하셔.”

율란이었다.

니키엘은 그가 다짜고짜 반말을 내뱉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옅은 살기마저 띠고 있다는 것이 가장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제가 싫어도 그렇지 일국의 왕자에게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인가. 물론 대공의 지위가 왕자보다 손위이나 어쨌든 니키엘은 왕손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율란과 육중한 떡갈나무 문 사이에 갇힌 형국이었다. 커다란 손으로 벽을 짚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율란에게서는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다른 생들을 많이 죽이고 다녀 본 이만이 내뿜을 수 있는 살기가 저항 없이 무른 신체인 니키엘의 몸 위로 이슬비처럼 젖어 들었다.

부쩍 가까워진 그의 몸에선 옅은 풀 냄새가 났다. 풋내 같은 것이 아니라 들꽃이 핀 수풀더미에서 맡을 수 있는 야색의 향이었다.

정복을 차려입었음에도 느껴지는 들판의 향에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움칠거렸다.

율란의 단단해 보이는 가슴팍과 닫힌 문 사이에 갇힌 탓에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무것도 들리는 게 없는데 그의 호흡 소리가 들릴 것 같다는 착각이 일기도 했다.

단단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랫배가 살며시 당기는 기분이었다. 니키엘은 당황했다. 그저 두 사람 사이가 근접해진 것만으로도 그런 곳이 당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진짜 니키엘’의 신체는 율란이 제게 가까이 붙자 더없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아랫배가 묵직하고 가슴의 정점 언저리가 간지러워졌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몸이 자꾸 왜 이러는 거야.’

남녀 안 가리는 왕국 최고 난봉꾼의 신체다웠다. 니키엘은 저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저 육식 짐승 같은 남자 앞에서도 이토록 반응하는 신체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준다는 사람도 없는데 저 혼자 밥상부터 차리는 제 몸에게 주책이라고 말해 봤지만 통할 리 없었다.

그러나 잡념을 버리면 불 또한 차가운 법. 니키엘은 상병 시절 사단장실에 불려 가 바둑을

둘 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진정하려 애썼다.

게다가 니키엘은 지도 교수의 갈굼 아래 다년간 수련된 담력을 갖고 있는 박사 출신의 왕자였다.

“엿들은 건 내가 미안하오.”

“…사과도 할 줄 알아?”

율란이 고개를 모로 꼰 채로 살짝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반만 쓸었다.

나른하게 내리 깐 눈은 레이먼의 것처럼 경멸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원색적인 감정이었다.

…이를테면 지금 당장 목덜미를 물어뜯어 너의 생을 간편하게 끝내고 싶다는 의지?

니키엘은 그의 거친 살기와 불안한 제 눈빛과 그걸 지켜봐야 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율란이 살짝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은 혀의 끄트머리를 응시하고 있는 저 자신이 이해 가지 않았다.

이성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니키엘은 일단 낯빛을 굳혔다.

“근데 사람들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떠들어 놓고 다른 이 더러 엿듣는 게 취미냐니. 공은 남의 말 안 들으려고 귀 막고 다니는 취미도 있소?”

니키엘의 음색은 조곤조곤했다. 음의 높낮이 없이 일정하게 지껄이는 말은 그게 욕인지 책을 읽는 것인지 구분 못 하게끔 들렸다.

때문에 율란의 눈매가 좁혀진 건 니키엘의 말이 끝나고도 조금 지나서였다.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내가 말 좀 또박 하게 하면 의외라는 눈으로 보는군. 그전에는 얼마나 빡대가리였다는 거야.’

다들 사람을 아주 멍청이 취급하고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니키엘을 율란이 무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에도 생각했던 것인데 참으로 표정이 없는 남자였다.

눈매가 좁혀졌던 것도 니키엘의 말이 끝난 뒤 아주 잠깐. 그 이후로는 또 한 번 씻은 듯 표정이 없어졌다.

그는 황금을 물에 개 들이부은 후 굳힌 듯한 눈동자 색을 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의 색에는 오히려 금속성이 짙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율란은 정확히 그런 눈으로 니키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신 잃고 아예 백치가 됐다는 소문이 있길래 기대했더니, 이제는 꽤 대가리 굴릴 줄도 알고. 나의 전하시여, 안타깝게 됐소.”

“말이 좀…. 많이 그런데, 대공.”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신탁이 어떻게 내려오든 상관없이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그대로 토벌 대회는 나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쇼.”

“…아니, 신탁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나….”

니키엘은 웅얼거리듯 말했다.

율란은 그의 벌꿀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똑같은 빛깔의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천천히 위아래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호수처럼 푸른 벽안이 율란의 어깨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 봐도 니키엘의 겉껍데기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그의 생김 자체까지 건국 왕 오시니스의 완벽한 재현이니 영혼 한가운데에 짐승의 터럭을 묻히고 사는 율란으로서는 그 외양에 심히 현혹됨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 율란은 저주해 마지않는 제 조부도 외양만은 꽤 그럴싸하다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살았다.

인간의 선과 악이 그 껍데기에 있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뼈에 새기고 사는 생이 율란 발트, 본인일 것이다.

그러니 니키엘의 속눈썹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아도 그의 성격이 추하고 영혼이 못났다는 걸 되새겨야만 했다.

비록 그의 근처에 가기만 해도 밤낮없이 끓어오르는 몸속 짐승이 온순해진다고 해도 말이다.

“수작 부리지 마. 내가 지켜볼 거니까. 전하께서 하실 일은 그저 이 충신이 해 드린 충언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율란은 말속에 살기를 넣어 니키엘의 온순한 귓구멍에 박아 주었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뒤로 살짝 넘겨 드러난 하얀 귓바퀴에 대고 천천히 용암이 끓는 듯 살기가 피어오르는 음색이었다.

날 때부터 포식자로 태어나 그 울음만으로도 소동물들을 벌벌 떨게 했던 그런 음색으로 말이다.

누구보다 신성하게 태어나 천한 영혼을 갖고 있던 니키엘조차 율란의 이런 음색은 견디지를 못했다.

북부의 매서운 서리가 느껴지는 차가운 어조에 포식자로서의 살기를 불어 넣어 말 그 자체로 위협이 되는 율란의 경고 앞에서 늘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어 대지 않았던가.

니키엘은 멍청하고 가시적인 것에 집착하여 눈앞에 놓인 이득만을 쫓아 경고를 잊어버리고는 했지만, 종종 이런 식으로 겁을 주면 그래도 한동안은 조용하고는 했다.

율란이 기대했던 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딱히 충신 같지는 않은데….”

“뭐?”

“나한테 충성스럽지도 않은데 충신이라니까 기이하여 말이오.”

“…….”

“게다가 신하라니. 공은 딱히 내 신하도 아니지 않소.”

그렇게 말하며 니키엘은 율란을 올려다보았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여겨지던 속눈썹이 눈꺼풀 사이로 스며들며 호수처럼 푸르른 벽안을 그대로 드러냈다.

레이스에 가려진 보석처럼 눈을 내리 깔았을 때는 속눈썹에 가려져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뽐내던 푸른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완전히 드러나니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식의 감동을 주었다.

니키엘의 벽안이 딱 그런 보석과 같았다. 율란은 시종일관 감정이 드러나지 않던 무표정을 깨트리고 한쪽 눈썹 위로 올렸다. 그 자신은 인식하지도 못한 변화였다.

“충성스럽지도 않고 내 신하도 아니니 다음부터 내 앞에서 공 자신을 지칭할 때는 충신 말고 ‘아무개’로 하시오. 이 아무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하. 라고 하시면 그때는 나도 공의 간절한 말을 경청하도록 하겠소.”

니키엘은 그대로 율란이 막고 있지 않던 쪽 문을 딱 제가 들어갈 만큼만 열고는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날다람쥐가 소나무 위를 오르는 듯 재빠른 몸짓이라 니키엘의 말을 곱씹고 있던 율란은 뒤늦게 뻗었던 손을 거뒀다.

그러고는 또 한 번 눈매를 좁혔다. 그것은 표정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가 보기 드문 명마를 발견했을 때 짓는 표정이라는 걸, 율란도 니키엘도 모르고 있었다.

***

“아, 새끼. 성질 머리 한번 좆같네.”

니키엘은 혼자 남게 되자 걸쭉한 욕을 쏟아 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소드마스터라 벽 하나를 뚫고도 제 혼잣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을 했다.

“누구는 성질 없는 줄 아나.”

니키엘은 허공을 향해 양손의 중지를 치켜들고 출입문을 향해 손가락 욕을 갈겼다. 그러고는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싹 잊었다.

건강한 신체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를 좌우명으로 알고 사는 니키엘로서는 근력이 강해지고 근섬유 세포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아드레날린 분비가 쉬워져 무슨 일이든 쉽게 화내지 않고 평온한 상태가 된 것이다.

잠깐 화났다가도 할 일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니키엘은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빠르게 안정되는 심리 상태에 쾌재를 불렀다.

‘운동이 짱이야.’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는 꽤 고생이 심했다.

당시의 니키엘의 몸은 20대 청년의 것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기침은 각혈을 동반하고 몰아치는 현훈 때문에 계속해서 숙취를 달고 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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